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순영 Dec 16. 2021

붉은 치마 벗고
흰 저고리 곱게 갈아입은 적상산

전라도의 산 4

적상산 향로봉을 사모하며 덕유산에서 피워대는 향내가 

예까지 날아와 코로 스미는듯하다. 

다시 가을 돌아와 붉은 치마 갈아입으면 고혹적인 매력, 

곧은 정열에 향적봉은 어찌 맘 추스를거나. 


                   

적상산赤裳山은 전북 무주군의 명산인 덕유산의 정상 향적봉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지점에 있으며 병풍을 두른 듯 사방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을이면 온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것처럼 단풍이 붉게 물든다 해서 지은 이름이다. 오늘 적상산은 붉은 치마도 벗고 화장마저 지운 채 기운 치마 바느질하는 산처녀의 수수한 모습이다.

무주구천동으로 널리 알려진 전북 무주군은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전라북도 등 5개 도가 서로 접경을 이루고 있어 접한 위치에 따라 같은 군이면서도 생활권이 달라 호남권, 영남권. 충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올라서니 덕유산이 바라보고 있다


양수 댐이 들어선 이후 주 등산로가 된 적상면 서창마을을 들머리로 잡는다. 마을 뒷산에 산신당이 있고 중앙에 당산수가 있는데 마을 앞에는 고속 할미라는 입석이 있어서 마을 수호신을 암석 신앙으로 하는 제축이 행해진다고 한다.

바로 어제, 충북 영동의 천태산을 홀로 산행하고 거기서 멀지 않은 적상산으로 왔다. 이번에도 혼자다.


“혼자라서 쓸쓸하긴 하지만…….”


누군들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던가. 그리워 찾아가는 곳은 혼자 출발하여 결국 둘이 되지 않던가. 그렇게 적적함을 부인하며 산에 안긴다.

      

휘이잉, 위잉 엄동 모진 삭풍 

회오리처럼 휘감아 돌다 귓전에 얼어 

이명처럼 울리거든

그때도 난,

발자국 눈에 묻힌 산마루 지날 테요.

가파른 바윗길 무심히 오를 테요.

귀먹어

아무 소리 듣지 못할지라도 이 산

흔적마다 주워 담아

책갈피 펼쳐가며

고이 꽂아놓을 테요. 

최영 장군의 칼질에 동강 난 장도바위에 잔설이 남아있다

    

“길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하던 중이었다. 단풍 붉게 물든 적상산의 풍경에 이끌려 이곳을 오르는데 절벽 같은 바위가 길을 막아 더 오를 수 없게 되자 정상까지 가고자 했던 최영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를 뽑아 바위를 힘껏 내리친다. 

순간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길이 열렸다니 대단한 무예가 아닐 수 없다. 하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최영이었으니 황금인들 두 동강이 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그렇게 두 동강이 남으로써 장도바위라고 불렸단다. 이성계에 맞서 조선 개국을 저지했던 고려 충신 최영의 다혈질적 기질을 엿보게 된다. 

용담문龍潭門이라고도 불렸던 서문은 기록에 의하면 2문 3간의 문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문 밖 서창에는 쌀 창고와 군기 창고가 있었는데 지형이 험해 성내까지의 운반이 어려워 사고지史庫址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유래로 지금까지도 마을 이름이 서창西倉이다.

유난히 당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적상산이 그 이름값을 얼마나 톡톡히 할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오랜 옛날부터 군사요충지로 주목받을 만큼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서창마을에서 향로봉까지 오르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편이다. 

순탄한 등산로에 비해 암릉 절벽의 사면은 무척 가파르다


차곡차곡 넓적한 바윗돌을 쌓아 축성한 적산산성 터를 지나 하얀 눈길을 걷는다. 지그재그식으로 길을 내 가파르고 험한 산을 오르내리기 쉽도록 다듬었다. 고속도로나 터널과 달리 등산로를 수월하게 꾸몄다는 건 산길을 길고 멀게 늘려놓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꾸불꾸불 긴 길을 돌고 돌아 올라서서 산정 능선 향로봉 삼거리에 이른다. 삼거리에서 700m의 거리에 있는 향로봉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 능선의 바람이 시리다 싶었는데 향로봉(해발 1024m)에 이르자 제법 드세게 몰아친다.

누군가를 곁눈질하는데 이미 그 사람이 나를 빤히 보고 있다. 그 사람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의식하게 된다.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눈가루를 맞으며 건너편 덕유산을 바라보는데 덕유산에서 이곳 적상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가칠봉과 칠봉의 호위를 받는 주봉 향적봉이 우뚝 솟아 이쪽을 마주하고 있는데 그 시선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보호 본능 가득한 눈빛처럼 보인다.

붉은 치마 벗고 흰 저고리 갈아입어 더 그럴까, 어쩜 그리 정숙하고 조신한가. 올곧은 소신, 꽉 들어찬 지성 가벼이 대할 수가 없구나. 와보니 알겠더라. 덕유산 향적봉이 이 산 향로봉 마주 보며 왜 진한 향 피워대는지. 

그랬다. 숱하게 가본 덕유산에 비해 적상산의 이미지는 무척 소박하고 가냘팠지만, 막상 올라와 보니 그런 적상산의 이미지가 장점으로 두드러지는 것이다.

존재감이 약하거나 크게 관심 끌지 못했던 어떤 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강하게 부각되며 머리에, 가슴에 들어찬다. 상대가 이성일 때면 흔히 말하는 상사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화중지병이로다. 너무 멀어 만지지도 못하고 입이 열리지 않아 말 걸지도 못하니 아린 상사병에 바람조차 얼어붙네.

적상산 향로봉을 사모하며 덕유산에서 피워대는 향내가 예까지 날아와 코로 스미는듯하다. 다시 가을 돌아와 붉은 치마 갈아입으면 고혹적인 매력, 곧은 정열에 향적봉은 어찌 맘 추스를거나.

향로봉에서 다시 삼거리를 지나 안국사 쪽으로 평평한 능선을 걷다 보면 안렴대를 300m 남겨둔 지점에 적상산이라 적힌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가 정상(해발 1034m)이라 할 수 있다. 적상산의 주봉은 해발 1024m의 향로봉이나 최고봉은 이곳 기봉이다.


     

역사와 문화과학이 두루 어우러진 산  

   

그리고 송신탑을 지나 안렴대, 적상산 남쪽 층암절벽 위에 있는 안렴대는 사방이 낭떠러지이다. 꼭대기 바위 끄트머리로 철제 난간을 둘러 세웠어도 아찔하다. 

저 아래로 가늘게 뻗친 대전, 통영을 잇는 고속도로가 아득하다. 남덕유산에서 향적봉까지 길게 이어지는 육구 종주의 능선 마루금을 한참 눈에 담으며 곧 만날 것을 약속한다. 

고려 시대 거란이 침입했을 때 3도道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쳐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로 불린다.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의 석실로 옮겨 난을 피했다고 하니 적상산이 호국護國의 기운을 지닌 산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안렴대에서 150m 거리의 송신탑에서 안국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산성 터 아래의 안국사는 꽤 크면서도 깔끔한 사찰이다. 고려 충렬왕 때 월인 화상이 창건했고 조선 광해군 때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사고를 설치하여 이를 지키는 수직 승의 기도처로 삼았다. 

그 뒤 영조 때 법당을 다시 짓고 나라를 평안하게 해주는 사찰이라 하여 이름을 안국사安國寺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0년에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의 도량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89년에 적상산 양수발전소 댐 건설로 절이 수몰 지역에 포함되자 호국 사지護國寺址였던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또한, 적상산성은 총길이 8143m의 성으로 산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았다. 본래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고려 때 거란군이 침입하였을 때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축성의 형식으로 보아 삼국시대로 추측할 뿐 정확한 축성 시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국사 일주문을 나와 적상호를 들러본다. 해발 800m 지대에 인공 조성하여 양수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이젠 본격 하산로인 좁은 숲길로 들어서서 다소 지루한 눈밭을 걷다가 눈가루 흩뿌리는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이어서 층층 몸집 큰 바위에 얼어붙은 암반수 앞에서 시선 멈추게 되는데 여기가 송대폭포다. 

역사와 문화, 과학이 두루 어우러진 적상산 산행 중 마무리 즈음에 만나게 되는 자연 그대로의 장소이다. 

객지에 나왔다가 집이 그리워지면 일시에 피로가 몰려오나 보다. 아담한 치목마을로 들어서며 어제 천태산부터의 산행을 마무리할 즈음 눅진한 피로감을 느낀다.


                     

때 / 겨울

곳 / 적상면 서창마을 – 서창 매표소 - 장도바위 – 서창 고개 - 향로봉 – 서창 고개 - 적상산 - 안렴대 - 안국사 - 적상호 - 송대폭포 - 치목마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