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악산과 석룡산
“멀고, 높고, 거친 데다 또 너무 추워서…….”
하얗게 덮였던 눈이 세찬 바람에 쌀가루 흩어지듯 휘날리던 겨울에 딱 한 번 다녀오고 화악산은 그렇게 안티anti로 밀려나 있었다.
화악산과 대성산은 최전방이라는 수식어와 가장 추운 곳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묘한 공포와 거부감을 준다. 게다가 6·25 격전지여서 봉우리와 능선마다 매몰되어 있을 숱한 죽음과 고통이 영기靈氣처럼 깃들어 현장에 가면 우울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생겼었다.
그럼에도 지난달 춘천 대룡산에서 북쪽 하늘을 온통 장악하고 있던 화악산의 웅지를 보고는 언제 그런 인식이 있었냐는 듯 바로 오르고 싶어졌다.
대개 악岳 자가 들어가는 산은 산세가 험하고 암괴가 거칠게 드러나 있다. 화악산 역시 육산임에도 사면이 가파른 험산이다. 관악산, 운악산, 감악산, 송악산과 함께 경기도 다섯 악산에 속하는 화악산華岳山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기도 최고봉이다. 전방이긴 하지만 살짝 2선으로 물러나 있는데 응봉(해발 1436m)과 중봉이 어우러져 산악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사방으로 뻗친 골과 능선이 웅장하고도 중후하다.
정감록의 화악 노정기華岳路程記편에 지리적으로 화악산이 우리나라의 정중앙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정상을 중봉中峰(해발 1446m)이라 불러왔다. 또 중봉에서 800여 m 거리의 신선봉을 포함한 화악 3봉이 한북정맥에서 뻗어 나와 경기도와 강원도를 구분 짓는 화악 지맥 정상부를 형성하고 있다. 한북정맥 산들의 고도를 능가하고 그 품새도 광활하다.
최전방이 아닌 국토 정중앙의 산
화악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 중 오늘은 물길 수려하고 비교적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화천 사내면 삼일리 쪽을 들머리로 골랐다. 가평 화악리에서 사내면 사창리 쪽으로 가다가 341번 지방도로로 들어서면 길옆으로 맑은 계류가 길게 흐르는 삼일계곡을 끼고 점차 구불구불 고도를 높여 화악터널에 닿게 된다. 해발 870m 위치에 개통한 터널이다.
여기서 실운현으로 보다 빠르게 접근하는 가파른 경사로가 있긴 하지만 군사 보급로였던 길을 택해 초반 에너지를 축적하기로 한다. 석룡산까지 갔다가 내려가려면 제법 긴 시간을 걸어야 한다.
붉은 병꽃과 철쭉 만발한 숲길은 무척 한적하다. 아니 산악회에서 이곳을 찾은 일행 여덟 명이 없었다면 여긴 옅은 봄 햇살과 실바람만 내내 봄꽃들과 어우러졌을 듯하다.
숲길 지나면서 조망권이 생기자 사창리 너머 대성산이 눈에 들어온다. 대성산 너머 이북 땅까지도 볼만한 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 실운현 사거리에 닿는다. 널찍한 콘크리트 포장 공터에서 응봉 군부대 길이 아닌 북봉과 중봉을 향해 열려있는 포장도로로 가야 한다.
헬기장을 지나 중봉으로 바로 가는 포장로가 있지만 완만한 오솔 숲길로 들어선다. 모처럼 온 화악산인지라 북봉을 외면하고 지나가기가 꺼림칙하다. 숲길 들어서자 연초록 봄물이 뚝뚝 떨어졌다가 금세 마르고 만다.
올라갈수록 초봄이다. 진달래, 양지꽃, 노랑제비꽃이 이구동성으로 우린 이제 겨울을 막 보내고 갓 피어난 새 생명임을 강조한다. 산 아래에 활짝 핀 철쭉과 달리 여기선 아직 꽃잎을 펼치지도 못하고 있다.
하늘 열려 시야가 트이면서 정상부 군 기지가 보이고 실운현에서 중봉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군사 보급로가 허연 곡선을 긋고 있다. 곧 이어가게 될 석룡산도 살짝 웅크려 몸을 낮추었다. 촛대봉 뒤로는 몽덕산,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까지 이른바 몽가북계 4 산 마루금이 펼쳐졌고 석파령을 꺾어 삼악산까지 라인이 이어진다.
곧이어 바위 지대에 시멘트 기둥이 세워진 걸 보게 되는 데 여기가 군부대 100m 정도 아래의 북봉이다. 환히 트인 시계에 북으로 두륜산, 대성산과 고개를 돌려 한북정맥 광덕산, 복계산, 복주산, 명지산, 운악산이 쭉 늘어섰다.
설악산이 보이려나 두리번거리다가 끝내 형체를 짚지 못한다. 군부대 철조망까지 오르고 나서야 화악산에 절이 귀하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명산대찰이라 했는데 이처럼 웅장한 산에 군부대가 정상을 점령했는데 흔한 절이나 암자 하나 없어 불교 유산이나 문화재가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정상부에 와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산임에도 화악산은 왠지 모르게 소외된 것처럼 느껴진다. 산은 군인보다 스님하고 더 어울리는 곳인가 보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오르기 시작한 일행들이 모두 모이자 함께 식사하고 헬기장 삼거리로 내려선다. 사창리 쪽이 아닌 석룡산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완만한 내리막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바위 지대를 우회하고 방림 고개에 닿는다. 석룡산 들머리 삼팔교에서 올라오다 보면 석룡산과 화악산으로 갈라지는 길이 바로 이 지점이다. 석룡산 정상까지 700m의 거리이다.
능선을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석룡산은 전 사면이 대체로 급경사이다. 화악산보다 바위가 많고 수림이 우거진 데다 계곡이 수려하다. 올라서도 딱히 조망권이 없는 석룡산 정상(해발 1147m)인지라 정상석 앞에서 인증 사진만 찍고 걸음을 옮긴다. 산꼭대기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석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아마도 다른 유래처럼 바위가 용으로 변해 승천하였는지 그런 바위를 보지 못하고 내려간다.
무척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진다. 화악산 정상부 능선을 보며 내려서는 외에는 평범한 나무숲 길이다. 그러다가 계곡으로 접어들면서 산객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바윗길의 이어짐. 아래 조무락골과 함께 석룡산의 명소인 복호동폭포伏虎洞瀑布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 지었단다. 여기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약 6km의 계곡이 새들이 지저귀고 춤춘다는 조무락鳥舞樂골이다. 가평천 최상류의 계곡답게 연이어 맑고 시원한 담과 소가 이어진다.
아직은 일러 한기를 느끼게 하는 조무락골의 골뱅이소, 가래나무소를 밟고 건너뛰며 내려오면 어느덧 두 산의 날머리 용수목에 이르게 된다.
겨울 산, 여름 계곡의 최상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화악산과 석룡산, 그리고 조무락골이지만 그 계절이 아니더라도 여기는 찾아온 이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청정자연의 중심에 있다.
삼팔선 경계점에 이르러 표지판을 보면서 앞으로는 이곳이 머나먼 격지가 아니라 국가 중심지역으로 교통상의 요지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게 된다.
때 / 봄
곳 / 화악터널- 실운현 사거리 - 헬기장 - 북봉 - 헬기장 삼거리 - 방림 고개 - 석룡산 - 방림 고개 - 복호등폭포 - 조무락골 - 삼팔교 – 용수목 종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