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한 운무가 결국 비로 변했다
기체가 액체로 서서히 변하는 액화 현상을 체험하며 무룡산에 도착했다.
“상 찡그리지 말고 웃어.”
1491.9m라고 표기된 무룡산舞龍山, 정상석 앞에 축축한 모습으로 섰어도 카메라 앞에서 웃는 모습은 산사나이답고 싱그럽다.
구름이 되려는가, 하늘이 되려는가. 아래로 깔려 운해가 되어야 할 안개가 짙은 운무 되어 끝도 없이 오르려 하다가는 결국 우정의 높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더니 아래로 미끄러진다.
“짜식, 넘볼 걸 넘봐야지.”
등성이를 타고 피어오르는 운무 속에서 춤추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연상만 하고 무룡산을 떠난다. 빗방울이 더욱 거세진다. 1500m 고지에서 맞는 가을비는 몹시 차갑다. 그래서 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한다. 4.2km를 단숨에 걸어오니 동엽령이다. 바로 백암봉으로 향한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육십령을 거쳐 뻗친 백두대간은 여기 백암봉에서 오른쪽 송계사 방면으로 꺾어진다.
“강행군이구먼.”
“화대 종주 때보다 더 힘든데요.”
“날씨 탓이죠.”
대간을 낀 덕유산의 능선과 골들은 그 경관이 수려하고 호방해서 눈을 뗄 수 없는 대하드라마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자주 쉬며 드라마에 심취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쉴 곳조차 마땅치 않다. 길이 수월한 편이기도 하지만 쉴만한 곳, 구경할만한 장면이 없어 주 능선에 올라와서는 비교적 빠르게 온 편이다.
“비가 그쳤어요.”
졸음도 쫓고 걸음 탄력도 받을 겸 곧바로 중봉으로 향하려는데 어느새 비가 그치면서 아주 천천히 중첩된 산들의 형체가 뿌옇게 드러난다.
“오늘의 태양이 이제라도 떴으면 좋겠건만.”
중봉을 지나 정상 향적봉까지의 1km 구간 사이에는 원추리 군락과 구상나무숲, 덕유평전이 볼만한 곳이다. 봄철 덕유산은 철쭉꽃밭에서 해가 떠 철쭉꽃밭에서 해가 진다는 말이 있다. 향적봉에서 남덕유산 육십령까지 이어지는 능선에 펼쳐진 철쭉군락들이 겨울이면 온통 상고대와 눈꽃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철쭉이든 눈꽃이든 덕유평전이 가장 화려하건만 오늘은 그마저도 눈길 주지 않고 향적봉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바삐 통과한다. 비에 젖어 축축한 고사목들이 온기마저 빠져나가 금세라도 휘어지고 꺾어질 것만 같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은 유일하게 1600m대 고지의 산이다. 해발 1614m의 향적봉, 세 해가 지나 다시 찾은 향적봉. 그해 겨울엔 엄동설한에 동상이 걸릴 만큼 추웠는데 지금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젖은 옷차림에 몸을 움츠리며 정상에 섰다.
덕유산은 한반도 남부의 한 복판을 남북으로 꿰찬 군사적 자연 장벽이자 영호남을 가르는 장벽 가운데서도 가장 험한 경계선 중 하나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이던 국경선,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는 곳이니 그럴 법도 하다.
아마도 중봉이 최종적으로 향적봉을 사수하려는 백제와 신라 양측 최고도의 군사 분계선쯤 되지 않았을까. 산꼭대기에서까지 얼굴 붉혀가며 아군 적군 따지지는 않았을 성싶다.
“야, 문디자슥아, 밥 묵었나?”
“거시기해서 잔뜩 배 채웠당께.”
입가에 웃음 머금고 덕유산 전경의 사진판을 들여다보니 북으로 가깝게 적상산이 있고 멀리 황악산, 계룡산이 흐릿하게 솟아있으며 서쪽으로 운장산, 대둔산, 남쪽으로는 오늘 우리가 들머리로 삼은 남덕유산이 있다. 지리산 반야봉과 동쪽으로 가야산, 금오산들이 장대하게 연출하는 산그리메를 오늘은 머릿속으로만 그려본다.
덕이 많아 한없이 너그러워
덕유德裕라 명명했다지.
이만큼 높이 올라서도 향 풀풀 내뿜으니
향적香積이라 불린다지.
배움이 귀히 여겨지려면
가슴 깊이 덕과 어우러져야.
연륜이 가치를 지니려면
지나온 경험에서 향이 풍겨야.
허나 그런 깨우침이 억지로 되는 일이던가.
깨우치려는 의식조차 떨쳐버리지 못해 오히려
부질없는 욕심으로 드러나는 게 우리네 삶
늘 고개 숙이면 적어도 천정에
이마 찢는 불상사는 없으리니
세상에 낮은 것은 오로지 저 스스로뿐
그저 땀 젖은 육신 씻어 만족스러우면
그 자체가 득도 아니겠나.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고 하기에는 그 길이 만만치 않다
“케이블카가 자꾸 눈에 들어오네요.”
설천봉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못 들은 척 설천봉에서 눈을 돌린다.
“걸어 내려가게나.”
오히려 바로 지척에 세워진 운송 시설물로 크게 위상을 깎인 향적봉이 버럭 소리 지르는 것만 같아 얼른 백련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조선 명종 때의 문장가 임훈은 덕유산 풍광에 반하여 53세에 덕유산을 올라 무려 3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향적봉 기香積峯記’를 남겼다고 한다. 얼마나 장엄하고 멋진 산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덕유산은 북동쪽 칠봉 산록에 대규모 국제야영대회를 치를 수 있는 청소년 야영장과 자연학습장인 덕유대德裕臺, 산자락에 길게 스키장 등을 설치하였다.
겨울철이면 눈이 많이 내리는 지리적 기후특성으로 인해 1990년 덕유산 자락에 건설된 무주리조트는 700만㎡에 이르는 초대형 산악 휴양지로 1997년에는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긴 6.1㎞의 실크로드 슬로프와 37°에 달하는 급경사의 레이더스 슬로프가 있다.
“산은 특히 국립공원은 자연을 보전하는 게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맞아.”
“케이블카가 설치되었으니 저 아래엔 호텔과 레스토랑이 들어설 거고 그러면 유흥가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지요.”
일행들의 생각이 같다. 이렇게나 수려한 계곡과 파도처럼 굽이치는 고봉들로 명성 자자한 덕유산에 무주리조트 스키장이 주봉까지 치고 올라왔다는 건 치명적인 실책이라는 생각을 접을 수 없다. 등산객들과 관광 인파가 뒤섞여 하산 곤돌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천년을 거슬러 일찌감치 대자연을 훼손한 거란 느낌에 찜찜하기 짝이 없다.
가뜩이나 지리산 화대 종주나 설악산 서북 능선 종주 때와 달리 막바지에 만끽한 희열이 부족한 산행이었는데 찜찜함까지 담고 내려가기가 싫어 편의시설에서 등을 돌리고 만다.
산이 천하 비경의 심산유곡으로 전혀 오염이 되지 않았을 때도 누군가에게 산은 그저 먹을 것을 챙겨주는 수단에 불과했었다. 화전민은 물론이고 심마니나 사냥꾼들에게 산은 그저 생계를 해결하는 터전에 그쳤던 곳이다. 산만큼은 절대 부르주아bourgeois의 이해타산이 넘나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내리막길이 미끄럽지 않다. 덕유산 여덟 계곡 중 설천에서 발원한 28㎞ 길이의 무주구천동계곡은 덕유산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경승지로 폭포, 담, 소, 기암절벽, 여울 등이 곳곳에 숨어 구천동 33경을 이룬다고 한다. 그중 몇 곳이 하산 길에 있다.
데크와 계단 등으로 길을 잘 다듬어놓아 예상보다 어렵지 않게 내려왔다. 빛깔 고운 단풍은 백련사에 와서야 겨우 볼 수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백련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가 전쟁 후 새로 지었다는데 9천 명의 성불 공자成佛功者가 살고 있어 구천둔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지명인 구천동으로 바뀌었다는 유래에서처럼 불교가 성행했던 덕유산의 중심 사찰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날머리 구천동 삼공 탐방안내소에 이르자 그제야 가을이 고여 있는 걸 보게 된다. 아직 물 빠지지 않은 단풍나무 밑에 서서 서로에게 안산 완주를 축하하며 악수하는데 꽉 쥔 손마다 온기가 그득하다.
“날 좋을 때 다시 오자.”
비 오면 비 맞는 그대로, 폭설에 발 빠지면 또 그러한 대로 산은 지나오면 값진 의미이자 귀한 흔적이다. 어스름 물드는 구천동의 해거름이 비 온 뒤라 그런지 더욱 곱다.
때 / 늦가을
곳 / 육십령 - 할미봉 - 서봉 - 남덕유산 - 월성재 - 삿갓봉 – 삿갓재 대피소 - 무룡산 - 동엽령 - 송계 삼거리 - 백암봉 - 중봉 - 향적봉 - 백련사 - 구천동 상공 탐방안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