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서니 그들의 쓸쓸한 영혼이(3)
노비제를 해체하고 인권 확립에도 심혈을 기울이다
영조 집권기는 중세사회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시점이었다. 영조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모순된 제도를 개혁시키고 신문화를 창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신분제도의 측면에서는 1731년 남자 노비가 양인의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인정하는 노비 종모법奴婢從母法을 확립함으로써 노비제 해체의 중요한 단초를 이룬다. 1772년에는 그동안 사회 진출이 막혀 있던 서자庶子들이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1774년 첩 자손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경제면에서 볼 때 두드러진 제도는 균역법均役法이다. 영조는 당시 농민경제를 위협하던 양역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더니 결국 1751년에 양인의 군포 부담을 2 필에서 1 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나, 인두세人頭稅의 성격이 강했던 군포 일부를 결역미結役米로 1 결당 2말씩 토지에서 거두는 토지세로 전환시킴으로써 신분간의 조세 불균등을 어느 만큼은 시정시켰던 것이다.
또한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추가 형벌을 금지했으며, 전옥典獄 이외에서의 인신 구류를 금지함으로써 인권 확립에도 힘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다시 1761년, 죄인의 부모·형제 또는 처를 잡아 가두는 법을 폐지하고, 노비에 대한 상전의 사형私刑을 금했다.
1771년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방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1725년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대신 그 원료로 무기를 만들게 했으며, 군사에게 조총을 복습시키고, 1730년에는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금 총을 만들게 했다. 그 외에도 해군력을 강화시키고 국경지역에 토성을 쌓게 하는 등 국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이룰 만큼 각종 도서의 편찬과 간행 및 보급에 애썼는데 영조 스스로 학문을 좋아했던 이유가 많이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영조 대에 이르러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실학이 발전했으며, 어사 박문수를 통해 암행 사찰을 하게 함으로써 두루 민심을 보살펴 한때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였다.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만 달랑인 임금의 침전
소령원에서 나와 앞을 내다보니 안산인 고령산이 훤히 들어온다.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 영조가 숙빈 최 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 소령원과 보광사와 곳곳에 자국처럼 남아 있는 영조의 자취는 거개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이다.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숨어 있는 눈물에 그 아들은 젖어들고 또 젖어들었으리라.
영조는 검약을 몸소 실천한 군주였다. 그의 침전에는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만 달랑 있을 뿐 병풍조차 없었다고 전해진다.
갑자기 영조의 면모를 우리 시대에 재임했던 실패한 대통령들과 비교하면서 경외감이 생겼다.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는커녕 부패와 치부致富에 급급하여 끝내 국회 청문회에 끌려 나오는 역대 대통령들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또 수치스러워했던가.
보광사의 향내가 저만치 사라질 때쯤, 필자는 자신도 모르게 영조의 생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개었다.
영조가 천인賤人 출신의 친모로 인해 평생 떨쳐내기 힘든 자괴감에 빠져있었다면, 박정희는 친족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아킬레스건 때문에 정치적으로 시달려야 했다.
영조는 즉위한 후 어머니의 묘호를 승격시켜 수시로 배알함으로써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 했고, 박정희도 대통령이 된 후 유별나게 공산주의를 배척했다는 사실史實이 두 사람을 흡사하게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숙종의 2남이자 왕세제王世弟인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는 임금이 되고 싶은 야망에 노론이 제의한 택군擇君을 받아들임으로써 형인 경종으로부터의 왕권 탈취를 위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에 목숨을 걸게 된다.
육사 8기의 후원에 힘입어 5. 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군사정권을 태동시킨 박정희 역시 성공적으로 정권을 손아귀에 쥐게 되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본질은 이기적 탐심으로 제도를 뒤엎고 역사를 다시 쓰게끔 한 장본인들이었다.
과연 엉뚱한 비유일까. 박정희는 아마도 영조에게서 성공한 쿠데타를 스스로 합당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고령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지존의 실루엣이 나란히 보인다. 그들의 애민사상愛民思想만큼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대통령들이 본받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조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 중 가장 긴 52년간 재위했다가 83세에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에 안장했다.
처음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쳤다. 역시 역사는 정통과 쿠데타를 엄격히 구분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