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서니 그들의 쓸쓸한 영혼이(3)
탕평책 실시! 영조대왕,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숙종이 아버지이며, 앞서 말한 것처럼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 씨가 그의 어머니이다. 정성왕후貞聖王后를 정비로 두었으며, 계비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년)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
숙종의 뒤를 이어 희빈 장 씨禧嬪 張氏의 아들, 경종이 33세로 즉위했으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이에 1721년, 노론 측이 소론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힘을 얻은 노론은 경종의 유약함을 들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 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후 거듭되는 당파 갈등에 신축 옥사, 임인옥사 등 수많은 위기를 거치면서 연잉군은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노론 편인 인원왕후의 강력한 비호로 조선 2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 직후 김일경을 필두로 신임사화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고 조태억 등 소론 대신을 파직시켰으며, 민진원, 정호 등을 불러들여 노론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노론 4 대신을 신원해 복관 시켰다. 그러나 영조는 더 이상 살육의 보복을 중단하고, 노론의 독주를 막아야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노론 측의 강경론을 누르고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탕평책을 펴게 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를 겪었던 노론은 이에 불만일 뿐 아니라 소론의 재등장을 꺼려하여 노·소론의 파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불행한 역사는 시대를 넘어서도 되풀이되는가
명분이나 이유가 어떠했건 필자는 영조와 영조 시대의 정치상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반추하게 되며, 아직도 그 흔적이 확연한 3김 시대를 보는 듯하다. 권력의 맛에 중독된 이들은 그걸 놓지 않으려 아등바등거리고 상대는 발전적 동반자가 아니라 걸림돌이요, 역적이다.
이런 원시적 정치역정을 볼 때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대원칙 중 하나인 양당제 혹은 다당제는 실로 그 특장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영조가 말년에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죽이고 마는 비극도 근본적으로는 정쟁政爭에 그 원인이 있었다.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맡았던 장헌세자莊獻世子는 내심 노론의 전제정치에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소론이나 그 밖의 반대세력의 정견에 더 관심이 있었고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노론은 장헌세자가 장차 왕위에 오르면 노론이 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보아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를 제거하려 했다. 또한 노론의 의리와 명분론에 근거하여 왕위에 오른 영조로서도 정통성 고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론의 입장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영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어머니 숙빈 최 씨에게는 지극한 효심을 베풀었음에도 세자인 아들을 죽게 한 아버지…. 그에게는 내리사랑이란 말이 전혀 가당치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한참이 지나서였지만 영조는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헌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을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한다.
영조의 효심이 그득 깃든 곳, 소령원.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 씨의 묘에 4개의 비를 세웠는데 정자각 동쪽에 있는 비각과 무덤 동편 비각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비석이 있다.
왕릉 정자각에 비해 다소 낮게 지은 소령원 정자각 위에는 원숭이 모습을 한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 등의 석상이 얹혀있다.
다시 숙빈 최 씨의 무덤 뒤로 보면 잉이 솟아 있고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적송赤松들이 주변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수호동물이 여덟 마리가 있는 왕릉과는 달리 양쪽에 두 마리씩 모두 네 마리가 있는데 이것까지도 최대한 원園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 애쓴 흔적처럼 보인다.
더구나 무덤의 묘비는 대궐의 지붕 문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을 극복해보려는 몸짓으로 보여 딱하기조차 했다. 이런 영조의 열등감 만회 몸부림은 신도비를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존도 바꾸지 못하는 신분의 벽
영조 즉위 이듬해에‘숙빈 최 씨 신도비’가 소령원 초입에 세워졌는데, 화강암을 곱게 다듬어 만든 비각 8개가 보인다. 그 거대한 주춧돌만 보더라도 성큼 영조의 효심이 헤아려지고도 남는다.
소령 묘에서 소령원으로 격상시키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렸던지라 그동안 영조는 끊임없이 갈등했으리라. 당대의 지존으로서 자신의 어머니를 왕비로 추존하고픈 마음이 어찌 생기지 않았으리.
원에 그치지 않고 능陵으로 격상시켜 최고의 안식처로 꾸미고 싶은 마음이 왜 아니 들겠는가. 그러나 묘로서 묻혔던 숙빈 최 씨의 무덤은 원으로 승격하는 데까지가 한계였다.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 씨가 왕비의 신분이 될 수 없었던 탓에 종묘 신위神位에 올라가지 못하자 눈에 띄게 실의에 젖었었던 것 같다.
대신들 일부가 그런 대왕의 심경을 알아차리고 능으로의 승격을 건의하지만 영조는 이를 물리친다. 아무리 왕일지라도 오랜 전통과 서열을 파괴하면서 숙빈 최 씨를 왕비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즉위했을 때 설사 최 씨가 생존했더라도 그녀를 왕비로 추존하긴 어렵다. 후궁인 빈의 신분으로는 그 아들이 제 아무리 대왕일지라도 추존 왕비가 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신분제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이 장희빈 사건 이후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일을 국법으로 금지해 버렸으니 영조로서도 육상궁이라는 사당을 짓는 것 외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