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청 5산 종주(3-3)
다섯 산의 끝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어라
이제부터는 다섯 번째 청계산으로 접어든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청계산의 옛 이름 청룡산을 이렇게 읊었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다리 지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찌나 졸리던지... 쏟아지는 졸음을 무릅쓰고 그예 국사봉까지 올랐다,
화강암 기단 위에 커다란 바위를 올린 정상석을 보며 그제야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숨을 고르고 또 고려 멸망의 시간대로 이동해본다.
“나라가 망했는데 목숨을 부지하는 건 개와 다름없다.”
고려 충신 조윤은 그래서 고려 멸망 후 자를 종견從犬이라 지었다. 개는 그저 주인을 연모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충신의 오롯한 충심을 어떻게 가늠하겠는가마는 국사봉과 망경대를 오가며 망국의 슬픔을 곱씹었을 조윤의 가슴속이 얼마나 찢어지고 망가졌을지는 헤아려지고도 남음이 있다.
국사봉國思峰은 그렇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된 곳인데 낮지만 넓게 뻗은 소나무의 푸름이 충절을 대변하듯 의연하게 정상석을 지키고 서 있다.
이수봉에 도착해서도 다들 쌩쌩하다.
이수봉二壽峰(해발 547m)은 조선 연산군 때 세자 시절 연산군의 스승이던 정여창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에 숨어 두 번 위기를 모면했다고 지어진 명칭이다. 그의 호 일두一蠹도 한 마리 바퀴벌레라는 자괴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몽주, 김굉필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라 칭송받았던 일두 정여창 선생은 갑자사화가 일어난 1504년에 죽은 후 다시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두 번 살아나 두 번 죽임을 당한 셈이다. 그는 온갖 동물들이 드나들어 오막난이굴이라고도 불리는 청계산 마왕굴에서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망경대 정상의 금빛이 감도는 샘물인 금정수를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그 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복관이 되자 붉어진 샘물은 다시 금빛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의 정사와 야사가 뒤섞여 많은 이야기를 뽑아내는 이수봉 너른 터에 옛골이나 절 고개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한다.
여기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망경대 갈림길을 지나 석기봉에서 바위 구간을 우회하여 청계산 주봉인 망경대望京臺(해발 615m)를 찍는다. 이곳 또한 조윤이 이성계를 피해 여기서 막을 치고 고려 수도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랜 곳이다.
정여창 선생이 피눈물을 흘린 곳이 여기 혈읍재인데 우리도 무척이나 힘이 겹다.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 청계산에 은거했던 그가 망경대 아래 고개를 넘다 통분해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가 피눈물을 뜻하는 혈읍재라 명명했다고 한다.
청계산은 조윤이나 정여창의 일화에서 보듯 도피 혹은 은둔의 장소였나 보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말년을 지냈다고 하니 말이다.
힘들면 혈읍재 아래 샛길로 빠져 옛골로 하산할 수 있음을 부언했지만 딱 부러지게 응하지 않고 가는 데까지 가보잔다. 그래서 다 같이 매봉(해발 583m)까지 이르게 된다. 이젠 옥녀봉 안부까지 거의 내리막 계단만 남은 셈이다.
내리막 1240계단이 시작되는 곳이다.
늘 계시던 스님이 오늘은 일찌감치 퇴근하셨는지 보이지 않는다. 돌문 바위에는 청계산 정기를 듬뿍 받아가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기는 한데 지닌 정기나마 흘리지 않고 남은 길을 가면 다행이다. 그 마지막 힘을 뽑아 원터 고개를 지나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옥녀봉(해발 376m)까지 내딛는다.
아예 마지막 힘을 뽑아 더욱 빠른 걸음으로 옥녀봉까지 내달았다. 이때가 오후 6시 50분, 서녘으로 붉게 노을이 물드는 시간이다.
전국 수많은 산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내려오는 전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청계산의 옥녀봉은 봉우리 모양이 예쁜 여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엔 그런 것도 같았는데 오늘은 옥녀봉의 미모가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화물터미널 갈림길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통나무 계단을 내려섰다. 드디어 26km, 꼬박 한나절의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다.
"실로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다네.
하루 꼬박 걸리는 장거리 산행이 처음인데도 다들 무리 없이 완주했음이 대단하고
비교적 빠른 보폭이었음에도 전혀 거리차 없이 동반 완주했다는 게 놀라웠다네. 그대들과 함께 5산을 종주해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추억을 함께 쌓아 올릴 수 있어 더욱 행복하다네.
국사봉 거쳐 이수봉 지나도록 햇살 아직 뜨거운데
매봉 아랫길 천이백 계단 밟아 옥녀봉 이르니
희뿌연 하현달 놓칠세라 에메랄드 황혼 뒤쫓누나
이른 초저녁별 물 양으로 산새 한 마리 공중으로 치솟더니
막 지나온 옥녀봉 서둘러 어둠 뿌려 날머리마저 지우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