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산 24
빼앗기기 전에 놓아버리면
계절 바뀌는 과정도 순탄하련마는.
훌훌 털어내면 오늘도 영원이요,
내일도 찰나의 이음에 불과하련마는.
강촌은 영원한 젊음의 장소이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강촌은 여전히 생기 넘치고 젊음이 발랄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의 강촌교 건너 강 마을로 삼악산, 봉화산과 검봉산 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강촌천이 북한강에 유입되는 합수 지역에 삼삼오오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MT 또는 캠프 등 휴양 및 야영을 즐길 수 있게끔 조성한 곳이 강촌유원지이다.
“파릇한 청춘은 유원지에 발산하고 노회 한 잿빛 기운은 산에 뿌리노라.”
한때 젊은 시절이 있었음을 회상케 해주는 강촌유원지를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짓는다. 세월 흐름 따라 육신은 노쇠해질지라도 젊은 시절 초롱초롱한 추억은 여전히 파란빛을 띠고 있다. 군사정권의 흉측한 정치 합리화에 분노하여 젊음 한구석 잿빛 같은 그늘이 존재하긴 하지만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화음 맞추며 추억을 쌓아갔었다.
“그랬었지. 통기타 둘러메고 청량리에서 경춘선 열차를 타면 아무리 비좁아도 마음이 들떴었지.”
“추억은 오로라처럼 생성되건만 지나간 세월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누나.”
햇살 푸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렇게 옛 추억을 떠올리고, 그렇게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며 강촌으로 왔다. 작년 이맘때 지리산 화대 종주를 함께 했던 병소, 계원, 은수와 그날의 긴 여정을 또 추억 삼으면서 삼악산을 찾았다.
강촌교 너머로 정면에 두툼하게 솟은 봉우리를 보게 된다. 삼악 좌봉이다. 다리 건너 경춘 국도를 통과하는 육교 뒤에 산으로 통하는 좁은 들머리가 있다. 밖에서 볼 때와 달리 속은 바위 날카로운 급경사의 산세이다.
삼악산은 강촌유원지에서 강촌교를 건넌 춘천시 서면에 소재하여 삼악산성의 유적과 삼악사 터가 남아 있고 남쪽 산기슭에 높이 15m의 등선폭포가 있어 강원도 시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바 있다.
거칠게 숨 내쉬면서 412m 봉에 이르자 등산로 왼쪽 사면으로 기울어 뻗은 소나무들 사이로 길게 이어진 의암호 물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게 인공호수라고?”
북한강 중류 수계의 의암호는 그 호수면 너비가 5㎞, 길이 8㎞로 춘천시가지를 둘러싼 형상의 인공호수이다. 1967년 수력발전소를 만들기 위해 의암댐이 조성되면서 춘천호, 소양호와 물살을 맞대고 있다.
“여태까지 북한강 물줄기로 알고 있었어.”
“산에 오면 산 이외의 지식도 많이 얻게 되는 법이지.”
한여름 이른 오전에 구름은 많지만, 시계가 확연하게 트여 연인산, 명지산, 화악산 등 경기 동북부의 고봉들이 뚜렷하다. 한북정맥에서 나뉘는 명지 지맥과 화악 지맥에 쭉 늘어선 경기 명산들을 가까이 느끼며 산행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내려다보면 출발지 강촌유원지가 한눈에 잡히고 오른쪽으로 강촌을 병풍처럼 둘러싼 봉화산, 검봉산 강선봉이 바로 허리춤에 있다. 멀리 용문산, 중원산 도일봉과 유명산을 조망하는데도 무리가 없다.
“여기서도 내가 갔던 산들이 꽤 많이 보이네.”
“8년 차 마니아에 국내 3대 종주를 뚝딱 해치운 병소 형님이신데 어련하시겠어요.”
“그렇군. 나도 초짜는 벗어났지?”
병소와 계원이의 대화가 흥겹다. 산은 보는 곳이지 가는 곳이 아니라던 두 사람이 어느새 부쩍 자란 아이처럼 느껴져 미소를 머금게 된다.
속속 거친 암릉이 이어져 경관에만 한눈팔 수 없게 한다. 표고 570m의 삼악 좌봉에 다다르자 가평을 에워싼 준봉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잡힌다. 시원스럽게 이어진 곡선 가로금을 다시 바라보다가 좌봉에서 내려와 우회로 갈림길을 마다하고 험한 규암 덩어리 바위 구간을 택한다. 삼악산 바위 봉우리들은 대다수 수억 년 전에 퇴적된 사암砂岩이 높은 온도와 압력에 의해 생성된 변성암이라고 한다.
암벽에 매어진 팽팽한 밧줄을 잡고 철제 발 디딤판을 밟아 오른다. 건너편 좌봉을 돌아보고 내려서면 조금 전 우회로와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0.4km를 걸어 고도 632m의 등선봉에 닿는다. 나무들에 조망이 가려진 등선봉은 머무름 없이 지나친다.
계획을 바꿔 619m 봉에서 흥국사 방향으로 길을 잡아 청운봉으로 향한다. 등선폭포로 하산할 예정이었는데 시간도 넉넉한지라 네 사람이 의견을 맞춰 조금 더 산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오봉산의 구성폭포, 문배마을의 구곡폭포와 함께 춘천의 3대 폭포로 꼽히는 등선폭포는 서면 덕원두리 원당마을에서 삼악산 등산코스를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기암절벽과 우거진 노송 사이에 있는 1·2·3폭의 아름다운 폭포이다. 다들 등선폭포를 거쳐 올라온 경험이 있어 오늘은 능선 유람에 시간을 할애하기로 한다.
“오늘처럼 조망권이 생생하면 산에서 내려가기 싫을 때가 있더라고.”
“병소 형님은 이제 산사람이 다 되셨어요.”
“첨부터 죽은 사람은 아니었지.”
“헐~”
모든 만남이 걸으며 이루어진다는 산객들의 말처럼 이산에서 저 산으로 또 다른 산으로 마구 건너뛰고 싶어질 때가 있다. 병소의 지금 기분처럼 아마 그때가 가장 산과 친근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한가롭게 하늘을 유영하던 구름 떼가 자취를 감추자 조명 밝히듯 햇살이 창창하다. 앞서가던 몇몇 산객들조차 보이지 않아 삼악산 정상부는 햇살 부서지는 묵음默音과 우리 네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이어질 뿐이다.
“너무 평온하군.”
“진짜 그러네요.”
막바지 사력을 다해 빛을 쏟아내는 여름의 끝은 평온하지만 처절한 슬픔이기도 하다. 검정 한지를 구멍 낼 듯 치열한 투사投射의 몸부림은 차라리 애절하다. 너무나 고요해서일까, 얼핏 가을 오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딱히 슬플 일이 없는데도 깨질 듯한 푸름, 먼 산까지 시야에 들어차는 청명한 삼악산에서 가는 여름을 부여잡고 싶은가 보다.
온 세상 눈부시도록 발광하며 자신을 태워 붉은 가을로의 인수인계를 게을리한들 누구라서 꾸짖을 텐가. 이미 나무들은 제 살을 도려내고 수풀 여기저기 멍들듯 붉다가 검어지기 시작하는걸. 책장 하나 넘기듯 가벼이 보내기엔 아쉬움 잔뜩 남을지 모르지만 읽은 쪽 넘기고 읽어야 할 쪽 펼쳐야 순리가 아닐까 싶다.
빼앗기기 전에 놓아버리면 계절 바뀌는 과정도 순탄하련마는. 훌훌 털어내면 오늘도 영원이요, 내일도 찰나의 이음에 불과하련마는. 표시 나지 않게, 수선 피지 않고 짧은 인생 인식하며, 그저 불순하지 않고 소신 굽힘 없이 하루하루 잇다 보면 책 한 권 덮듯 또 다른 책을 펼치게 되지는 않을까.
너무 평온해서였나 보다. 오랫동안 작은 탈도 없이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불안해질 때가 있었다. 현재의 온순한 평온을 더 오래 간직하고픈 마음이 생기면 은근히 감성이 두드러지고 만다.
삼악 3봉의 하나인 청운봉(해발 527m)은 삼악산성을 쌓던 바위 더미에 그 높이를 표기해 놓았다. 여기서 이정표 상의 계관산 방향으로 가면 석파령을 지나 화악 지맥을 잇게 된다.
화악 지맥의 저쪽 끄트머리 부근, 화악산 아래 몽덕산에서 시작해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을 지나고 석파령 건너 여기 이 자리까지 와서 다시 오늘 걸어온 길을 역으로 내려갔었다. 딱 재작년 이맘때다. 마실 물이 떨어져 갈증을 견디고 길을 놓쳐 헤매다가 밤늦게 강촌에 닿아서야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를 채웠었다.
“다시는 혼자서 연계 산행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그때 그렇게 결심했었다.
“훌쩍 떠나자꾸나.”
시간이 지나 실바람 살랑이고 햇살 맑은 주말이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몇 개의 산을 잇고자 또 혼자 떠나게 된다. 섬광처럼 번쩍이며 느닷없이 호객행위를 하는 곳이 산이다. 그 푸르른 유혹이 무뎌질 때쯤이면 무릎도, 호흡도 무뎌져 있으리라.
결국엔 혼자 한 결심이 무너졌던 그 방향에 추억 새기듯 눈길 던지다가 또 다른 방향인 최정상 용화봉으로 향한다. 춘천 시내와 의암호가 비스듬히 내려다보인다.
박달재를 지나 용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산성 터가 있다. 삼한 시대 맥국의 성이었다는 삼악산 성지 안내판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해 패잔 군졸들과 피신했던 곳이라고 적혀있다. 험준한 자연지형을 이용해 암벽과 암벽 사이를 부분적으로 축성했는데 현재는 길이 5km가 남아있다고 한다.
“궁예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도망 다녔었네.”
“하하, 맞아. 그 표현이 적절해.”
“이리저리 쫓아다니던 왕건도 꽤 힘들었을 거예요.”
싸움에 패해 쫓기는 궁예의 울음은 여기 삼악산 뿐 아니라 백운산, 운악산, 명성산에서도 들린다. 패자의 서러운 흔적을 그 산들에서도 본 바 있다.
길지는 않아도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넘자 삼악산 주봉인 용화봉(해발 654m)이다. 햇빛 받은 의암호가 은빛을 반사한다. 종도와 붕어섬을 휘감은 물길 너머로 호반의 도시 춘천이 많은 산을 배경으로 펼쳐있다. 용화산과 오봉산의 이음새가 선명하다. 양평 쪽으로는 용문산 가섭봉이 우뚝 솟아있다.
가리산과 구절산도 짚어보고 한강기맥의 높고 낮은 산군들을 두루두루 둘러보다가 상원사 쪽 하산로로 내려선다. 햇살은 여전히 창창하다.
어미 멧돼지가 새끼 멧돼지를 업은 모습의 바위를 지나고 다시 돌탑을 지나서 제2지점이라는 팻말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 480m를 내려온 곳이다.
소나무들 틈으로 의암댐을 보면서 철 계단을 내려선다. 깔딱 고개를 지나 상원사에 이르도록 강변의 풍치와 멋들어진 소나무, 조심스러운 바윗길 내리막의 연속이다. 삼악 산장을 지나 국도로 내려섰어도 햇살은 더욱 잘게 부서진다.
때 / 여름
곳 / 강촌교 - 412m 봉 - 삼악 좌봉 - 등선봉 - 619m 봉 - 청운봉 - 박달재 - 용화봉 - 상원사 - 삼악 산장
https://www.youtube.com/watch?v=zn6bjKZyVdM&list=PLk1KtKgGi_E5Hmrr7WVs_I40SvW54I1B6&inde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