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산 25
법석거리지 않은 곰배령에서
훌쩍 넘어서고픈 점봉산은 더욱 애틋하다.
천국을 연상케 하는 정갈한 하늘 꽃밭, 거기서 다시
두 분 부모님을 뵙고 이승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푸르디푸른 활엽수림에 온갖 야생화 만발한 지상천국
곰이 하늘 향해 배를 드러내고 누운 형상이라 이름 지어진 곰배령, 혹은 밭을 고르게 일구는 농기구인 고무래의 강원도 사투리 곰배가 그 어원이다. 해발 1100m 고지 약 165,290m²(5만 평)에 형성된 평원에는 계절별로 수많은 야생화가 만발하여 하늘정원을 이루고 있다.
산중 오지여서 6.25 한국전쟁 때도 총소리조차 듣지 못한 곳이란다. 그래서 더욱 찾고 싶었는데 꽤 늦고 말았다. 벼르고 벼르다가 겨우 찾아서였을까. 뒤늦게 찾아뵈어 부모님 산소에 잡초 무성하도록 불효한 느낌까지 든다.
지금 곰배령으로 향하며 가슴이 저리고 심히 울렁인다. 한계령을 넘어올 때마다, 오색에서 설악산 오르며 뒤돌아볼 때마다 손짓하며 부르던 점봉산 자락이라 더욱 그러하다. 점봉산을 떠올리노라면 군사분계선 너머의 금강산보다 더 애틋한 그리움이 생긴다. 짙은 모성애에 젖게 한다. 하늘 가까이 점봉산 능선 걷다 보면 거기 두 분 부모님이 웃고 계실 것만 같은데.
산은 어머니의 품이다.
기다림과 그리움 가득 담게 하는 충직한 본능
한 방울 물기마저 없애려 빨래 비틀 듯
세월에 영혼 담아 당신 몸 사르는 기도
산은 뒤늦게 불효에 통한케 하는
떠나신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동익아, 고마워.”
“뭐가?”
“곰배령 예약한 건 여태까지 네가 했던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일 거야.”
메아리 산방의 회장이자 산악 대장인 동익이가 쉽지 않은 곰배령 탐방을 예약했다. 남영이까지 세 명이 별러왔던 곰배령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곰배령은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분소가 있는 귀둔리 주차장에서 오를 수도 있는데 이곳은 국립공원을 통해 예약하게 된다.
우리는 또 한 곳의 오름길인 산림청에서 관리 예약하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218의 주소에 있는 점봉산 생태관리센터로 향한다. 어느 곳으로 가든 곰배령을 탐방하고 들어온 곳으로 원점 회귀하여야 한다. 이곳의 곰배령 입구는 단목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그쪽은 출입을 제한한다. 그래서 막힌 점봉산이 더욱 애틋하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설피 없이는 못 살아.”
진동 2리 일대는 설피 밭이라고 불러왔는데 겨울이면 너무 많은 눈이 내려 설피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강우량도 많아 다른 지역에 가뭄이 들어도 이 계곡에는 물이 넘쳐났다고 한다.
예약 확인을 마치고 들어서면서부터 이슬에 젖었던 수풀 내음이 향긋하다. 순도 높은 음이온이 몸속 깊이 스며들고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가느다란 대나무 모양의 속새가 무성하다. 물소리 들으며 소나무와 잣나무 쑥쑥 뻗은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담한 산골 마을에 이른다. 강선마을엔 군데군데 와이파이존도 있고 먹거리 집도 있다. 마을을 지나 큼직한 바윗덩이를 눕혀 만든 다리를 건너 초소에서 출입증 확인을 받고 본격 곰배령을 탐방하게 된다.
2.8km 거리의 곰배령 방향으로 낮고 완만한 경사로를 걷는다. 빼곡히 들어차 곧고 푸른 활엽수림의 연속이다. 곰배령 정상 일대 너른 초원지대에 이르면 지금까지 오솔길 양옆에 이어진 통제 밧줄 대신 나무데크로 만든 길이 나온다. 그 위로는 낮게 깔린 파스텔톤 하늘이 곰배령의 지붕이 되고 만발한 야생화들의 온실 역할을 한다. 늘 구름 안개에 덮여있기 일쑤라는데 오늘은 그나마 시계가 양호한 편이다.
“산소 밭을 걷는 기분이야.”
“산소 밭? 그런 밭이 있다 한들 이만큼이나 싱그러울까.”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어.”
곰배령 정상석에 천상의 화원이라는 수식어가 적혀있고 해발고도 1164m라는 걸 표시하고 있다. 하단에 적힌 곰배령의 명칭 유래를 읽고 고개를 들면 제일 먼저 우측으로 볼록 솟은 봉우리가 눈에 잡힌다. 작은 점봉산이다.
작은 점봉산에서 주봉인 큰 점봉산을 지나 망대암산과 한계령까지 가고 싶지만 생태계 보전을 위해 출입을 통제한 구역이다. 출금 기한인 2026년까지 인내로 버텨야 할까. 백두대간을 종단하는 산객들이 출금으로 인해 화중지병처럼 여기는 코스지만 아마도 그림 속의 떡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적잖이 있을 것이다.
탐방로 오른쪽으로 새로 조성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중턱쯤에서 곰배령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동자꽃, 노루오줌, 물봉선 등의 야생화 감상과는 또 다른 풍광이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웅장하다거나 수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박하고 수더분한 자연미를 지닌 곳이다. 올라와 살피니 명불허전이다. 천상의 화원이라는 비유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만지려 하면 손에 닿을 듯하고 느끼려 하면 가슴에 스며들 듯한 청정 기운이 마냥 상큼하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걷노라면 영혼마저 유체 이탈하여 천상의 화원을 자유롭게 떠다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악산 마루금이 있어 더더욱 친근하다.
정상에서 생태관리센터까지 5.4km의 내리막 능선 길에도 제각기 다른 야생화들이 무궁무진 만발해있다. 들꽃 내음 맡고 새소리, 실바람 속삭임을 들으며 쉽지 않게 찾아온 곰배령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오던 길로 걸음을 되돌리게 된다. 급하게 경사진 길도 있고 바위 너덜길도 있으며 수량 풍부한 물소리까지 산행의 묘미를 살짝 첨가한다.
하루 300명으로 제한하여 입산시킨다는데 입산 때도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탐방객만 보았고 새로 조성한 내리막길에는 한적할 정도로 탐방객이 줄었다. 법석거리지 않은 곰배령에서 훌쩍 넘어서고픈 점봉산은 더욱 애틋하다. 천국을 연상케 하는 조신한 하늘 꽃밭, 거기서 다시 두 분 부모님을 뵙고 이승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때 / 여름
곳 /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 강선마을 - 곰배령 정상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