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산 26
세계 유일의 정전 중인 국가라 해도 군부대가
명산 명소에 위치하여 접근을 막는다는 게
늘 탐탁지 않았었다.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전통 고수 방식이다.
나팔수가 나팔을 불면서 앞서가자 고을 백성들이 길을 비켜주며 머리를 조아린다. 하급 지위의 나팔수가 원님 덕에 덩달아 백성들로부터 절을 받게 된다. 이번 대암산행은 철저히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격으로 득을 본 셈이다.
“오늘은 내가 널 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몫까지 예약 탐방 허가를 받아낸 입대 동기이자 그때부터 친구인 승호에게 원님 대접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용이 승천하는 우레를 들으며
사전 약속된 집결지에 24명의 탐방객이 모였다. 해발고도 700m 정도에 있는 탐방안내소에서 숲 해설가에게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 탐방 길에 나선다.
1973년 용늪을 포함해 대암산과 인근 대우산이 천연기념물 246호로 지정된 바 있다. 1997년에는 자연 자원과 서식지의 보전 및 현명한 이용에 관한 최초의 국제협약인 람사르Ramsar 협약 습지로 최초 등록되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경남 창녕군의 우포늪이 등록된다.
가을 정취 저무는 낙엽 밟으며 강원도 전방의 산길에 들어서니 오래전 강원도 고성의 최전방에서 군 생활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땐 정말 산이라면 지긋지긋했었는데.”
둘 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자빠지고 굴러야 하는 장소, 그땐 유격이나 동계훈련 같은 게 산과 동일시되는 개념이었다. 시켜서 수동적으로 가게 되면 노동에 머물고, 좋아서 능동적이면 운동이 되고 힐링이 되는 곳이 산인 듯하다.
탐방로 오른쪽 암반을 타고 보기만 해도 시린 계류가 물소리 우렁차게 내며 흐른다.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듬성듬성 놓인 계곡을 가로질러 10여 m 남짓한 출렁다리를 건넌 후 삼거리에서 2.6km 거리 표식의 큰 용늪 방향으로 오른다. 왼쪽은 큰 용늪을 지나 대암산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울긋불긋 낙엽 수북한 바닥과 헐벗기 시작하는 나목들, 그 위로 파란 물감을 뿌려놓은 하늘뿐이다. 물소리도 그쳤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마저 고요해 탐방객들의 낙엽 밟는 소리만 들리는 중에 용이 승천하는 우레를 듣게 된다. 용늪에 살던 물고기가 그 소리에 놀라 여기까지 도망쳐왔다는 곳, 10리에서 1리 모자란 9리의 거리이다.
어주구리魚走九里의 어원이 적힌 팻말을 보며 그제야 동행하는 탐방객들이 소리 내어 웃는다. 널찍하고 완만한 육산에 날씨까지 좋아 트레킹 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일행들의 행렬이 마치 소풍 나온 학생들 같다. 한 줄로 쭉 늘어서서 걷는 것도 오랜만이다.
옹기종기 단체로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조금 더 오르자 능선 너머 대암산 정상이 보인다. 큰 용늪 가기 얼마 못 미쳐서 양구 팔랑리에서 오르는 길과 만나게 된다. 해발 1280m의 고지대에 용늪이라 적힌 자연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긴 나무 의자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의자에 앉아 해설사의 명료하고 능숙한 설명을 듣는다.
용늪 상류에 위치한 군부대의 연병장과 작전도로, 헬기장 등에서 용늪으로 토사가 쓸려와 육상식물이 침투하는 등 용늪의 육지화가 가속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군부대를 용늪과 수계를 달리하는 지역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탐방로가 구불구불 길게 놓인 용늪 안이 이채롭다. 한라산 백록담 외에 제주도에 분포하는 단성 화산인 오름과 흡사하다. 안에 들어서서 보면 늦가을 용늪 지대는 철 지난 억새 군락지와 많이 닮았다. 승천하던 용이 쉬어가던 용늪이라더니 용이 꼬리 담그고 쉬기에 딱 좋은 습지도 보인다. 해설사는 이곳이 연중 170일 이상 안개가 끼고 강우량도 많은 곳이란다.
“오늘처럼 청명한 날을 택한 여러분들은 행운을 잡은 겁니다.”
그러면서 엄지를 치켜세운다. 수강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한다. 연중 5개월가량이 영하의 기온이라니 습하고 한랭한 기후 때문에 지표면의 암석들 사이로 수분이 스며들어 얼었다가 녹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결국 습지로 형성된 것이다.
습지식물이 낮은 온도에서 분해되지 않고 계속 퇴적되어 만들어진 이탄층泥炭層은 해마다 0.5~1mm 정도의 소량이 쌓이는데 용늪은 그 깊이가 최대 1.5m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약 4000~5000년 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멸종위기 1급에 해당하는 산양을 비롯해 조류,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 수많은 동물과 산사초, 뚝사초 등 수많은 희귀 식물이 자생한다고 한다. 상식을 넘어서는 경이로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용늪 출구에 이르자 양구 도솔산이 친근한 정감으로 다가온다. 용늪을 나와 대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세 줄 가로로 친 철조망에 지뢰가 묻혀 있다는 표지가 줄줄이 걸려있다.
작은 돌 위에 큰 바위가 올려져 있어 명명된 장사바위를 지나자 화채 그릇 모양의 해안리 마을 펀치볼이 보인다. 그 왼쪽 봉우리에 세운 을지전망대와 군사분계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그 뒤로 북한지역도 그리 멀지 않다.
정상 일대는 거친 바위 지형이다. 뾰족하고 협소한 바위 구간을 넘어 정상에 닿는다. 1312m라고 적힌 정상석이 바위에 용접한 듯 세워져 있다. 지역적으로 강원도 북단의 양구군과 인제군에 접한 대암산大巖山인지라 한국전쟁 때도 격전지로 치열했던 곳이다.
향로봉에서 대청봉과 중청으로 마루금이 또렷하게 그어져 있다. 그 뒤로 금강산까지 첩첩 산군을 눈에 담는다. 대암산에 올라 이북까지 사방 고루고루 강원 영동의 산맥들을 파노라마로 잡는다는 게 직접 경험하면서도 실감 나지 않는다.
정상에서 내려가며 저만치 거리를 두고 보는 작은 용늪은 이제 수풀 지대가 되고 말았다.
“이제 군대가 산을 점령해서는 안 된다고 봐.”
“동감이야.”
승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세계 유일의 정전 중인 국가라 해도 군부대가 명산 명소에 위치하여 접근을 막는다는 게 늘 탐탁지 않았었다.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전통 고수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만세삼창할까?”
“그런 건 원님이 나서는 게 아니라 나팔수가 하는 거야.”
“통일 대한민국 만세! 만만세!!”
아니나 다를까, 대암산 용늪 트레킹의 뒤끝도 최전방의 다른 산에서처럼 분단된 허리로 말미암아 아린 통증을 느끼게 한다.
때 / 늦가을
곳 / 서흥리 생태탐방안내소 - 출렁다리 - 삼거리 갈림길 - 큰 용늪 - 용늪 관리소 - 대암산 정상 - 삼거리 갈림길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