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에 걸쳐 남도의
야무진 일곱 산을 섭렵하다

만덕산-석문산-덕룡산-주작산-두륜산-대둔산-달마산

by 장순영

어린이날이 낀 5월 초의 사흘 연휴를 전라남도, 그것도 땅끝 기맥에서 보내기로 마음먹고도 막상 몸이 움직이기까지 망설임이 적지 않았다.

오래전 두륜산은 다녀온 바 있었지만, 그 양옆으로 이어지는 주작산과 달마산이 눈에 밟혔었다. 기왕에 남도의 용아장성으로 불리는 만덕산에서 석문산과 덕룡산을 거쳐 주작산을 찍고 다시 두륜산과 대둔산, 달마산을 잇는 7 산 종주에 꽂히고 만 것이다. 모처럼 봄기운 물씬 풍기는 바다도 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나태함에 무뎌지려는 심신 상태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서였다.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 떠나도 좋겠지만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마음 가는 대로 떠나도 좋은 시절이다. 그런 5월의 금요일 저녁에 고속버스에 올라 또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남도 답사 일 번지라고도 일컫는 전남 강진에 내려 찜질방에서 눈을 붙이고 동이 틀 무렵 예약한 택시를 타고 옥련사로 향한다. 기사는 옥련사가 비구니들만 있는 사찰이라고 말을 붙이더니 예전과 달리 만덕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이 늘었다는 말도 곁들인다. 도로를 사이에 둔 만덕산과 석문산을 새로 생긴 구름다리가 이어 주면서부터일 것이다. 그 구름다리로 인해 몇 개의 산을 더 연계하는 등산객들도 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 산의 들머리 옥련사에서 첫 산 만덕산으로


강진읍 덕남리 기룡마을 뒤 만덕산을 오르는 길에 옥련사라는 절이 있다. 여기가 만덕산의 들머리이자 완주를 하게 된다면 모두 일곱 산의 시점이 되는 곳이다.

옥련사 담장을 끼고 벚꽃 화사한 길을 지나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옥녀봉이라고도 하는 필봉(해발 204.8m)을 올라설 즈음 천관산 위쪽으로 해가 떠오르면서 환하게 날을 밝힌다. 임천 저수지 뒤로 영암의 월출산도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게 펼쳐진 광활한 농토의 강진읍과 강진만 간척지가 보이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산자락은 아마도 부용산일 듯싶다. 깃대봉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철쭉 따라 걷다가 봉우리가 잘려버린 듯한 직벽이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구시골창봉이라고 적혀있는데 광물을 채굴하고 복원시키지 않은 채 내버려 둬서 심한 거부감이 인다.

오르내림의 고도가 심한 봉우리들을 몇 차례 오르내리다가 전망 좋은 암릉에서 숨을 돌린다. 향로봉과 천왕봉의 마루금이 드러난 월출산을 마주하자 수락산에서 도봉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자운봉을 중심으로 한 도봉산 정상 일대에서 좌우 주봉 능선과 포대능선으로 양팔 벌린 모습과 흡사하다.


“봉우리들이 어찌 저리 한양 도봉 같은고.”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던 중 월출산을 보고 읊은 한 수 시구의 마지막 소절처럼 서로 닮았다. 영암 월출산에서 방향을 틀어 화학산과 천관산을 살필 수 있고 완도 오봉산까지 눈에 잡히니 폐광산으로 인한 불쾌감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반가운 지기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옮겨 듬북쟁이봉(해발 301m)이라는 곳을 통과하고 다시 통샘거리봉(해발 337m)이라는 종이 문패가 걸린 나무기둥을 지나간다.


“이름들이 참 클래식하면서 까칠하군.”


작은 산인 줄 알았는데 바위도 많은 데다 바위 구간도 길고 거칠다. 소소하게 일던 바람이 멎으면서 햇살이 창창해진다. 월출산이 조금씩 멀어지고 대신 무등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우도를 둘러싼 바닷물결이 은빛으로 반사되며 아직 기상하지 않은 주변 섬들을 일제히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정상인 깃대봉(해발 408.6m)에 오른다. 정상석 옆에는 청렴봉이라고 적힌 작은 돌비석을 박아 눕혔는데 2020년 전남 공무원교육원 설립을 기념하면서 다산의 얼이 숨 쉬는 청렴 정신을 가다듬는다고 적혀있다.

아래로 이 지역의 천년고찰 백련사가 강진만을 굽어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밀집하여 이른 초봄이면 절 주변을 붉고도 붉게 물들인다.

고려 무인 집권기와 대 몽고 항쟁 때 백련 결사 운동을 이끌어 민중에 기반을 두는 실천적 불교개혁에 앞장섰던 유서 깊은 명찰이 백련사라고 한다.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백련사에 들어와 8년 동안 기거하면서 불사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인근 만덕리에 정약용이 유배되어 머물던 다산초당이 있다. 강진으로 유배당해 마땅한 거처가 없던 다산에게 초당을 흔쾌히 내어준 건 해남 윤 씨 집안이다.

유배 시절 다산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주지 스님과 차를 마시곤 했다는데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저술한 책들을 화두로 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곳에서의 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완성했다니 말이다. 귀인은 귀인이 알아보는 이치일까. 다산도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훌륭한 분이지만 고산 윤선도의 집안 또한 속을 훈훈하게 하는 멋진 가문이 아닐 수 없다.

지독하게 고독했을 유배 중에 알아주는 이가 있어 살 곳을 내어주고 차 한 잔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서정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 김영랑의 생가도 멀지 않은 강진읍 탑동에 있어 이 고장의 역사, 문화적 자취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부터 가야 할 석문산, 덕룡산과 주작산 그리고 두륜산까지 쭉 도열해 있는 걸 보고 그들을 사열하러 걸음을 옮긴다. 바람재 방향으로 오솔길 따라 느긋하게 걸어 마당봉을 넘어서며 많은 기암을 눈여겨보게 된다.

암릉 구간의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송송 솟는 땀을 닦으며 내려다보는 남해의 은물결이 자연스레 숨을 고르게 해 준다. 도로를 가로지른 구름다리가 석문산으로 연결된 게 보이고 거대한 죽순처럼 솟은 바위들이 우직하고도 경이롭다. 강진의 소금강이라고 칭할 만하다.

넓은 공터 사거리 바람재에서 모처럼 완만한 평지를 걷다가 다시 바위 사이를 비집고 건너뛰어 석문정과 구름다리를 진행 방향으로 잡는다. 만덕산을 내려서면 남도 명품 길인 바스락길 구간이다. 이중 강진 바스락길은 백련사에서 해남 대흥사에 이르는 37.4km의 구간으로 전남을 대표하는 걷기 길이라고 한다.

육산과 골산이 마구 섞이고 크고 작은 바위 봉우리들이 날을 세운 만덕산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게 지나왔다. 폭 1.5m의 다리 양 끝에 하트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사랑과 만남이 이어지는 의미를 주어 ‘사랑 + 구름다리’로 칭한다. 다리 가운데 투명하게 판을 만들어 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현수교이다.

구름다리 너머로 석문산 암릉이 우람하다


구름다리 건너고 돌문 통로를 지나 용아장성으로


만덕산에서 볼 때 우람한 근육질의 석문산은 111m 길이의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역시 가파른 바윗길로 이어진다. 만덕산 중턱의 용문사를 쳐다보고 석문산 기암들 사이에서 숨은 그림처럼 탕건바위라는 걸 찾았는데 설명 팻말에 쓰인 것처럼 세종대왕이 익선관을 쓴 인자한 모습이다.

꽃이 물들어 덩달아 청량하게 물들고 싶었던 신록이 엊그제 지나니 석문산에도 더욱 기세 높여 짙푸름을 발산하는 녹음으로 발 닿는 곳마다 색감이 두드러졌다.

새들과 꽃봉오리의 재잘거림이 잦아들어 묵직한 고요가 담담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지만 푸름을 뚫고 솟은 암봉은 계절과 관계없이 그 표정에 변함이 없다. 어둠이라야 별이 더욱 반짝이는 것처럼, 구름을 그려 넣어 달빛의 오묘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석문산 수림들은 바위산의 근육을 보기 좋을 만큼 적당히 드러냈다.

전망대인 석문정 바로 앞의 매바위는 팻말에 쓰인 것처럼 매가 비상하듯 하늘을 향하고 있는 형상이다. 날카로운 주둥이는 금방이라도 먹이를 낚아챌 것 같다.

석문정 앞의 매바위를 지나게 된다


석문공원에서 1km를 걸어 올라와 소석문으로 가는 길에 이정표가 세워진 곳이 석문산 정상(해발 282m)인데 정상석은 없다. 덕룡산 아래로 석문 저수지가 보이고 너른 강진만이 시원하게 트였다. 맑은 도암천 사이로 협곡을 이루고 있는 석문산石門山은 해남의 남창과 완도에서 강진에 이르는 돌문 통로를 의미하는 명칭이라 한다. 정상에서 소석문으로 내려가 다시 올려다보는 석문산도 창백하고 뾰족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형태다.

세 번째 덕룡산으로 향한다. 개울 위에 세워진 작은 다리를 건너 정자를 지난다. 이곳이 석문산에서의 날머리이자 덕룡산으로 오르는 들머리이다.

처음부터 밧줄 길게 늘어진 암벽을 타고 올라야 한다. 연이어 줄을 잇는 암봉의 거친 산세를 설악산 용아장성에 비견하는 덕룡산이다. 첫 봉우리 역시 아홉 개 용의 이빨 중 첫 어금니처럼 날카롭지만, 시계는 사통팔달 훤하게 트여 시원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제암산, 사자산에서 오른쪽으로 천관산까지 이어진 마루금이 오전보다 훨씬 선명하다. 멀리 많은 섬이 떠 있는 다도해가 바다인지 안개 위인지 몽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발밑으로 돌을 던지면 바로 풍덩 소리를 낼 것처럼 석문 저수지가 가깝고 그 우측으로 조금 전 지나온 석문산과 만덕산이 이어져 있다.

나아갈수록 봉우리들은 한 치도 곁눈질을 허용하지 않게끔 바짝 날을 세우고 있다. 잠시 멈춰 서면 뭍에서 가우도를 잇는 출렁다리를 볼 수 있고, 고개 들면 우뚝 눈길 잡는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데 이제부터 올라서야 할 동봉과 서봉이다.

만덕 광업이라는 곳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에서 300m 암릉 구간을 올라 동봉(해발 420m)에 이르렀다. 들머리 소석문에서 3km를 걸어온 지점이다.


“집에서 편안하게 쉴 걸 그랬나.”


이쯤 이르자 그런 생각이 든다.


“사서 고생은 젊어서나 하는 건데.”


힘이 부치면서 생기는 갈등을 지우려고 팔다리를 흔들고 몸을 비틀어 스트레칭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어쩌겠나. 칼을 뽑았으니 휘둘러야지.”


여기서 서봉으로 넘어가는 길은 더욱 호되다. 만덕산이 점점 멀어지고 두륜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밧줄을 잡기도 하고 간혹 바위를 붙들다시피 오르내리며 서봉(해발 432.9m)에 도착해서 돌아보는 풍광은 가히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덕룡산 바위능선이 야무지고 까칠하다


서봉에서 밧줄 붙들고 내려서서 거듭 이어지는 암릉, 외계인 닮은 바위에 이어 독수리바위를 지난다. 돌아보면 보이는 곳마다 수석전시장이다. 힘이 부칠 즈음 걷게 되는 초원길은 가파름이 없어 모처럼 아늑하게 마음이 풀어진다. 유격훈련을 마친 후의 달콤한 휴식처럼 유순한 흙길을 걷는 게 감사하기까지 하다.

정상석은 주작산 덕룡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상 덕룡봉(해발 475m)에서 완도 상황봉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고른다. 저곳 상황봉뿐 아니라 심봉 등 오봉산의 각 봉우리에서 이곳 덕룡산을 보았었고 내일 이어가야 할 대둔산과 두륜산도 가늠했었다. 돌아보니 힘이 부친만큼 아침부터 걸어온 길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용의 이빨에서 빠져나와 봉황의 날개로


한 손에는 날카로운 창을 쥐어 힘을 과시하는 무사를 보는 듯하고 다른 손에는 아이를 보듬어 안고 수유를 하는 어머니처럼 강온 양면성을 지녔다. 작천소령 고갯마루에서 주작산으로 오르며 다리가 무거워지지만, 주작산의 그런 양면성이 더욱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덕룡산을 용에 견주고 주작산을 봉황에 견주었다. 봉황이 활짝 나래를 펼쳐 날아가는 기세의 주작산에 막상 들어와서 보니 그 능선도 우아하기가 그만이다.

430m 봉 분기점을 지나고 흔들바위 삼거리를 거쳐 정상(해발 428m)에 올라선다. 바로 봉황의 정수리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작천소령에서 덕룡산으로 이어지는 왼쪽 날개를 막 지나왔고 해남 오소재로 이어지는 오른쪽 날개를 안전하게 내려서야 오늘 산행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정상에서 다시 작천소령 쪽 편안한 육산을 되돌아가 주작산 삼거리에서 오소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암릉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암릉을 좌우로 두고 잘 다듬어진 오솔길이라 괜찮다가 또 바위틈으로 몸 비틀며 빠져나가야 한다.

아름다움과 압박감이 공존하는 주작산 바위능선이다


극도의 아름다움에는 독이 묻어있을 수도 있다. 아름다움과 조여드는 압박감이 공존한 주작산에서 그런 말이 떠오르고 만다. 긴 시간의 산행이라 힘에 부치긴 하지만 창 든 무사가 뿜어내는 역발산기개세의 무한 에너지에 내내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고도 400m급의 산이라고는 절대 느껴지지 않는 탄탄한 카리스마에 이미 압도당한 지 오래였다.

내일 만나게 될 두륜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마도 내일은 저기서 지금 서 있는 이곳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세 개의 비상탈출로 삼거리를 지날 때까지 암릉의 이어짐을 보게 된다. 그리고 또 한참을 걸어 나무계단을 내려서고 지방도로까지 닿으면서 남도에서의 첫날을 고되게 마친다.


다시 뒤돌아보면

아득했던 그 산들

가파른 등성이마다

거친 호흡, 굵은 땀방울

없어져도 그만일

짧은 흔적이겠지만

가슴 깊은 곳에

줍고 쓸어 담아

고이 여미고

가지런히 포개 놓게 된다.

눈에 가득 드리운 연초록 나뭇잎들

마음 가득 채운 무수한 낙엽길

내려와 다시 그 산 올려다보면

비록 어둠에 가렸어도

흔적마다 온통 그리움이다.


저만치 가다 또 한 번 온 길 되돌아보면

달빛 흐릿한 어둠마저

감동으로 일렁이는

가슴속 쿵쿵거림은

금세라도 눈물 되어

내 두 뺨 적실 것만 같다.

해남 땅끝마을의 일몰.jpg 땅끝마을의 일몰을 눈에 담게 된다



어둡고 거친 두륜산에서 남도의 여명을 밝히다


주작산 마루금의 실루엣을 가물가물 눈에 담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도 날카로운 바윗길을 걷다가 다시 밧줄을 잡고 암벽을 기어오르다 눈을 뜬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오소재의 원룸형 민박집을 나선다.

잠 설치기 딱 좋은 낯선 곳에서의 유숙이지만 새벽 산행의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는 괜찮은 편이다. 산악회 버스 한 대에서 내린 30여 명의 등산객이 두륜산 들머리로 들어선다. 자연스레 그들의 행렬에 섞이게 된다.

1979년 전라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두륜산頭輪山은 동쪽 사면의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비교적 완만한 산세를 이룬다.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산마루 지대는 대개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가 안부鞍部라 불리는데 두륜산의 연봉은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어 둥근 머리 산이라는 의미로 두륜산의 이름이 연유하였다.


깜깜한 어둠 속 산길이라 헤드 랜턴과 앞뒤 일행의 행보 때문에 수동적으로 걸음을 떼게 된다. 계곡 길 오심재를 지나 능허대라고도 일컫는 노승봉(해발 685m)에 다다를 때까지도 어둠은 쉬이 걷어지지 않고 흐릿하게 서기만 어릴 뿐이다. 두륜산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이곳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게 매우 안타깝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여 남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리상 여건이 두륜산의 특화된 장점인데 말이다.

여기서 가련봉 오름길도 상당히 어려운 구간이라 조망을 놓치는 안타까움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두륜산 최고봉인 가련봉(해발 703m)도 인증사진을 찍는 일 외에는 달리 머물 이유가 없어 막간의 쉼도 없이 지나친다.

75. 뒤돌아보니 가련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배웅해준다.jpg 뒤돌아보니 가련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배웅해준다


바윗길을 조심스레 내디디며 넓은 헬기장이 있는 만일재에 내려설 즈음 날이 밝아진다. 삼거리에서 쇠줄을 잡고 철 계단을 밟아 오르면서 바위와 바위가 이어진 희귀한 모습을 보게 된다. 코끼리바위라고도 하고 구름다리라고도 부르는 기암이다.

두륜봉(해발 630m)에 올랐을 땐 습한 안개가 자욱하게 사방 시야를 막았다가 트이길 반복한다. 조금 지나 묵직한 잿빛 구름을 뚫고 솟는 해 아래로 땅끝마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또 지나온 노승봉과 가련봉, 가야 할 도솔봉도 그 지붕이 보인다.


가련봉 넘고 두륜봉 지나 도솔봉 오르는 고갯길

운무 가득하다가 하늘이 바다 되어 물결 일고

연초록 녹음 우거져 솔향 가득하니

두륜산 바윗길 홀로 걸어도 혼자가 아닐세


76. 두륜봉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다.jpg 두륜봉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띠밭재(해림령)로 가는 길의 깎아지른 암벽 아래로 길게 밧줄이 늘어져 있다. 오늘 산행 중 가장 긴장해야 할 구간일 듯싶다. 여기서 잠시 정체되긴 하지만 통과하는 이들 모두 안정감 있게 내려선다. 띠밭재와 대둔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완만해 보인다. 뒤돌아본 두륜봉은 오늘 첫 방문객들을 떠나보내고 세수를 했나 보다. 정갈하다.

연화봉과 혈망봉도 막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대둔산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완만한데 이슬 젖은 산죽이 키까지 커서 행로를 방해한다.

땅끝 기맥 508m라고 팻말이 걸린 508m 봉에서 30여 분 가까이 걸어 중계소가 있는 도솔봉(해발 671.5m)에 닿는다. 정상부에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어서 정상석은 저만치 비켜 세워져 있다. 시설물은 종종 가야 할 길도 돌아가게 한다. 여기서도 중계소 울타리를 끼고 한참 우회해서야 암릉과 산죽 길을 걷는다.

저만치 달마산이 눈에 들어온다. 308m 봉을 넘어 꽤나 날카로운 암벽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자칫 긴장을 풀었다가는 발을 헛디딜 수 있다. 바위가 미끄러워 스틱도 어긋나기 일쑤다.

오늘은 달마봉으로 바로 넘어서기 때문에 두륜산의 명찰 대흥사를 그냥 지나치게 된다. 신라 진흥왕이 어머니 소지 부인을 위하여 창건했다는 대흥사는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외에도 무수한 보물들과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6·25 한국전쟁 때 재난을 당하지 않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 비해 큰 전쟁이 잦았던 곳에서 전쟁의 화마를 피해 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건 필시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하겠다.

대흥사 입구에 맑고 넘치는 계류와 동백나무, 왕벚나무, 그리고 후박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룬 장춘동 계곡의 수려한 경관이 아른거려 내려다보노라면 거기서 은은한 차향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 후기의 선승이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의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의 다선 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데 그는 여기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차 문화의 중흥에 이바지하여 지금까지 한국 차의 성지로 주목받게끔 하였다. 거기서 배달된 한 잔의 차를 산 중턱에서 음미하고 일어선다.

고개 위로 도솔봉 가는 길도 거친 암벽 구간이다. 전망 좋은 큼직한 바위에 올라서자 바다 건너 완도가 보인다. 역시 남서해의 너른 물길을 멀리 따라갈 수 있어 마음이 평온해진다. 왼편 아래로 동해 저수지와 그 둑 밑으로 농토와 민가가 있다. 매일 달마산의 새벽 정기를 마시며 하루를 열 것이다. 주민들 대다수가 건강하게 장수할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만큼 해 되거나 거리낄 것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떡봉(해발 422m)을 지나서도 계속되는 암릉 군이지만 길은 아까 날 등을 타고 온 길보다 덜 까다롭다. 직벽 구간을 우회하여 고도 편차 심한 봉우리 하나를 지나면서 허기가 지고 갈증도 생긴다.

13번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한다. 빽빽한 소나무 숲과 채 지지 않은 철쭉, 파릇한 농토와 에메랄드빛 바다들이 마냥 평온하기만 하다. 다시 하숙골재라는 곳으로 내려서는데 아마도 여기까지가 지도상 대둔산이라 표기된 곳이기도 하고 또 여기부터 달마산에 해당하는 것 같다.



갖출 걸 다 갖추고, 보여줄 걸 다 보여주는 산


다채로운 형상의 바위와 암벽들을 깃발처럼 치켜세우고 길게 펼쳐져 달마산達摩山은 삼면이 모두 바다와 닿아있다. 고려 때 중국 사신이 해남으로 와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산이 달마대사가 다녀갔다는 그 산인가?”

“그렇소.”


주민들의 대답을 들은 사신은 산을 향해 예를 갖추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그 이름만 듣고 아득히 경배만 해왔는데 그대들은 여기에서 생장했으니 참으로 부럽도다.”


여기가 바로 달마 화상이 상주한 곳이라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림으로 그려간 것이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는 자신의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로부터 모함을 받아 죽게 되어 웅이산에 매장된다. 숨을 거둔 지 3년이 되던 해 달마는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을 꿰어 매고 서천(지금의 인도)으로 가고자 파미르 고원을 넘고 있었다.


“대사님!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때마침 서역에 다녀오던 위나라 사신이 달마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그에게 물었다.


“서천으로 가는 길이네.”


사신이 도착하고 보니 달마는 이미 3년 전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달마대사의 묘를 파보아라.”


위나라 왕의 지시를 받고 무덤을 팠는데 짚신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었다. 흔히 달마대사라고 일컫는 보리달마 Bodhidharma 의 전설이다. 그는 남인도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선禪의 씨앗을 뿌려 선종의 개조開祖로 여기는 부처의 28대 계승자이다. 보리달마는 부처의 심적 가르침에 돌아가는 방법으로 선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선종이라고 하였다.

하숙골재를 지나 달마봉 능선으로 가는 초록 숲길로 들어서자 이제까지 걸어왔을 때와는 또 다른 산행 분위기를 창출한다. 바위산에서 육산으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고도가 높아지면서 다시 암릉 지대이다.

힘이 떨어지지만, 달마산의 명물인 금샘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신비의 샘은 바위틈에 꼭꼭 숨어있었다. 석영의 주성분인 석질의 영향으로 금빛을 낸다고 한다. 물맛도 좋고 약효도 있다고 하는데 플라스틱 바가지가 지저분해 보는 거로 만족한다.

큰 금샘을 지나 대밭 삼거리에서 다시 작은 금샘을 통과해 달마산 정상으로 오르는 안부가 넓은 들판처럼 아늑하게 맞아준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극단의 양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부지런히 오른 전위봉 뒤로 정상인 불선봉이 고깔 모양으로 높이 치솟아있다.


“무사 기질이 강한 가문이군요.”

“그렇다네. 잘 살피며 걷다 보면 무사의 강인함도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걸세.”


돌탑이 쌓인 달마산 정상 불선봉(해발 489m)까지 암릉의 야무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달마산의 가문 자랑을 새겨보니 남도의 금강산이란 표현에 수긍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정상이 무척이나 반갑고 초면이지만 오래된 만남처럼 친근감이 든다.

이곳의 봉수대는 완도 오봉산의 숙승봉과 해남 좌일산에서 횃불을 이어받아 불선봉의 명칭 유래가 되었고, 가뭄 때면 산 아래 주민들이 올라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줄지어 늘어선 뾰족 기암들 너머로 완도와 청산도를 볼 수 있으며 푸른 바다에 둥둥 뜬 작은 섬들, 다도해를 눈에 담게 된다. 갖춰야 할 건 다 갖추었고, 덩달아 보여줄 것도 모두 보여주는 달마산이다.

산 중턱 가파른 바윗길과 울창한 숲길에 평평하게 등산로를 닦은 달마 고도를 내려서고 다시 완만한 내리막을 걸어 육지의 가장 남쪽 사찰인 미황사美黃寺에 닿는다. 사찰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달마산의 연릉이 마지막까지 멋진 비주얼을 선사한다. 그런 달마산을 바라보며 달마대사가 이곳까지 오긴 했겠냐는 의구심이 든다.

77. 내려와 올려다보니 달마산이 미황사를 포근히 감싼 풍광이다.jpg 올려다보니 달마산이 미황사를 포근히 감싼 풍광이다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명명한 미황사에 남겨진 기록들은 달마대사가 땅끝 해남까지 왔다고 주장한다. 이곳 사람들은 달마가 이곳 땅끝에 머물고 있다고 믿는다. 미황사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있으신 곳이라고 소개한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노력하되 수행과 노력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그의 선법 가르침은 뚜렷하나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대개 설화적이다.

달마는 선정 도중에 잠들어버린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냈다. 그런데 그 눈꺼풀이 땅에 떨어지자 자라기 시작하더니 최초의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선사들이 선정 중에 깨어 있기 위해 차 마시는 걸 일상화시키게끔 하였다.

바위의 누런 이끼, 금빛 나는 금샘, 달마전 낙조를 미황사의 3 황으로 꼽는다는데 저녁 무렵 서해 낙조와 어우러지면 달마산도, 미황사도 더욱 황금빛을 발할 듯하다. 그처럼 찬연한 황금빛 중에 달마대사가 거기 있다는 걸 믿기로 한다.

남도에서도 가장 남쪽 끄트머리라 할 수 있는 강진에서 해남까지 일곱 산을 무사히 마치게 되어 다행이다. 여느 때의 연계 산행을 마친 후처럼 뿌듯한 감회보다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드는 건 그만큼 버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도에 비해 암팡진 남도의 산들이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때 / 봄

곳 / 옥련사 - 필봉 - 통샘거리봉 - 만덕산 깃대봉 - 바람재 - 마당봉 - 구름다리 - 석문산 - 소석문 - 동봉 - 서봉 - 덕룡산 - 작천소령 - 주작산 – 작천소령 삼거리 - 427m 봉 -362m 봉오소재 - 노승봉 - 가련봉 - 만일재 - 두륜봉 - 띠밭재 - 도솔봉 - 대둔산 - 닭골재 - 달마산 불선봉 - 귀래봉 - 하숙골재 -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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