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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기개가 묻어나는
양주의 골산, 불곡산

경기도의 산 11

by 장순영

낫자루든, 밤나무든 주야가 바뀐다고 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치부를 위한 욕심의 발로가 아니라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생계형 도둑질이라도

합리화시킬 명분이 세워질 수는 없다.



불국산이라고 불리는 불곡산은 옛날에 회양목이 많아 겨울이 되면 빨갛게 물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멀리 경기 북부에서 뻗어 내려온 한북정맥이 도봉산으로 이어가며 자운봉과 만장봉 등의 우람한 암봉을 빚기 위해 먼저 화강암으로 그 솜씨를 보인 것처럼 불곡산 또한 골산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춰 아기자기하면서도 야무진 산세를 이루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양주의 진산으로 표기하였는데 크거나 높지 않지만, 조망이 뛰어나고 동양화를 연상시킬 만큼 풍광이 섬세하다. 능선에 올라서면 양주, 의정부, 동두천 등 인근 지역이 내려다보이고 도봉산에서 북한산을 잇는 유유한 산자락은 보며 걷는 산행의 맛을 한층 북돋아 준다.



상봉, 상투봉, 임꺽정봉으로 이어지는 야무진 골산


백화사 입구를 들머리로 잡아 5분여 오르면 오른쪽으로 임꺽정 생가터 가는 길이 보인다. 양주지역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증자료를 수집해 임꺽정의 생가터를 찾아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벽초 홍명희의 소설에 의하면 이 부근 어딘가가 백정들이 모여 살던 천민촌으로 임꺽정은 여기서 태어나 아마 불곡산 꼭대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며 힘을 길렀을 테고 이 지역 청석골을 아지트로 삼아 우두머리 노릇을 했을 것이다.

신라 효공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백화사는 적막하기만 한데 320년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높이 솟아 대웅전을 지키는 게 눈에 띈다.

백화사에서 400m의 가파른 너덜 고개를 오르면 십자고개이다. 양주시청을 들머리로 잡게 되면 2.4km를 지나온 지점이다. 이제부터 크고 작은 바위들과 가파르게 내리 뻗은 단애들을 보게 되고, 거기 뿌리를 박고 몸 낮춰 수평으로 뻗친 소나무들을 보게 된다.


“절벽 위에 그렇게 누워 가지 뻗으면 힘들고 어지럽지 않으신가?”

“현기증 나도록 어지럽다네. 그런데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쉽지 않구먼.”


수평으로 누워서도 제 가지들만큼은 위로 뻗게끔 있는 힘을 다하는 엄청난 생명력을 지켜보니 기둥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어 진다.


“잘 버티실 거로 믿네. 다른 산에서도 많이 보아왔네만 소나무들은 인내심이 보통 강한 게 아니더구먼.”

“갈 길이나 가게. 어이구, 어깻죽지야.”


얼른 능선을 따라 벗어나자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그런데 이곳 불곡산은 유별스럽게 소나무들이 수난 겪는 걸 자주 보게 된다. 골짜기에도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들이 쓸려 내려갈 듯한 바위들을 받치고 있다. 골바람까지 일어 혹여 절벽 작은 송림이 우르르 추락할까 불안하다.

29. 암봉과 비탈단애의 소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조화를 이룬다.jpg 암봉과 비탈 단애의 소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조화를 이룬다


“무조건 버티게. 버티는 게 이기는 걸세.”


결국,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말만 건성으로 내뱉고 돌아선다. 엷은 구름이라도 찌를 양 꼿꼿이 뻗은 각진 바위들은 강인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두루 이룬 비탈 단애는 푸근하고 부드럽다. 오밀조밀 모인 모양새가 잘 단합된 부락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려니 지나치는 이에게 불곡산은 넌지시 훈수를 둔다.


“부드러움이야말로 최고가 강함이요, 겸손이 어우러진 결속이야말로 최고의 단합이라네.”


사람들의 조직에서는 당연시되기 어려운 충고인지라 고개 갸우뚱거리고 지나치게 된다. 펭귄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펭귄바위를 지나고 불곡산 제1봉인 상봉(해발 470.7m)에 선다. 산북리 쪽에서 보면 투구 모양과 흡사해 투구봉이라고도 불린다.

듬성듬성 개발 중인 양주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조 수도 한성부와 가까워 지역적으로 그 중요도가 높았고, 그 파급으로 역사상 애환도 많았던 지역이다. 6·25 한국전쟁의 과정에서도 양주지역은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그 주변으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는 등 많은 변화가 생겼다. 현재 25, 26, 28, 65, 72사단의 다섯 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것은 이때부터의 변화과정이다.

그런데 양주의 변화 중 가장 급변한 건 양주지역이 본가인 현재의 양주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출가시킨 일이다. 우선 1963년 의정부시가 분리되어 독립했고, 지금의 노원구와 도봉구에 해당하는 양주 남쪽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이어 1980년 남양주군이 분리되고, 1981년에는 동두천시가 분리되어 나가게 된다.

출가한 모든 지역이 현재의 양주시보다 더 부유한 자치단체로서 잘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식들을 내보낸 부모가 초가삼간에 사는 우리네 정서와 닮았다. 그래도 본가는 역시 양주시임은 분명하다.

양주시에서 눈을 거둬 가파른 단애 넘어 솟아오른 임꺽정봉 그리고 도봉산 자락을 두루 살피고 잠깐 만에 두 번째 봉우리 상투봉(해발 431.8m)으로 건너뛴다.

2월 초순의 오후 임꺽정봉으로 가는 길은 서늘하고 뿌옇던 아침나절과 달리 새순이라도 돋을 듯 따뜻하고 화창하다. 햇빛 덜 드는 음지는 간간이 눈이 녹지 않았어도 겨울은 이미 진행을 다 하고 새 계절로 넘어가는 중이다. 바위산답게 생쥐바위, 물개바위, 코끼리바위 등 형상에 맞춰 이름 지은 바위들도 곧잘 나타난다.

실제 임꺽정봉 오름길은 맞은편에서 험상궂게 보이는 것보다 수월하게 오를 수 있도록 길을 잘 다듬어 놓았다. 밧줄로 경계선을 세워 위험요소도 줄였다. 오름길에 보이는 악어바위는 그 명칭에 걸맞게 바위 군락이 두툼하여 볼륨 있는 가죽처럼 보인다.

30. 악어 한마리가 바위를 기어오르는 듯하다.jpg 악어 한 마리가 바위를 기어오르는 듯하다


임꺽정봉(해발 449.5m)에 올라서도 시야가 환하다. 여기서 임꺽정이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중간에 움푹 팬 홈이 보인다. 움막을 세울 때 거기에 지지대를 넣었다고 한다.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 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명종실록에 농민의 저항에 대해 그렇게 기록하였다.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도적 떼가 자연 발생적으로 출몰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은 지배계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농민들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된다.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백성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도적으로 꼽는다. 로빈훗이나 괴도 뤼팽처럼 대리만족을 주는 의적으로 각인되어 있어서일까. 그들을 도적으로 단순 폄하하기엔 거부감이 일고 서운함도 생긴다.

낫자루든, 밤나무든 주야가 바뀐다고 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치부를 위한 욕심의 발로가 아니라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생계형 도둑질이라도 합리화시킬 명분이 세워질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곳 불곡산에 오면 임꺽정한테 동지애를 느끼는 게 사실이다.

어쨌거나 임꺽정은 조선왕조실록에까지 그 이름을 올린 실존 인물로 명종 때 황해도를 중심으로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까지 거점을 넓힌 전국구 패거리의 우두머리이다. 조정에서는 집단을 형성하여 도적질을 일삼는 그를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가 토포사 남치근에 의해 체포되기까지 무려 3년여의 세월이 걸렸다.

임꺽정은 두루 지역을 넓혀 도적질 해서인지 파주 감악산에도 임꺽정봉이 있고 철원에도 제 이름으로 된 바위가 있다. 적어도 경기 북부지역에서만큼은 명함 값을 하는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임꺽정봉에서 하산을 위해 계단을 내려서고 바로 아래 군사시설이 있는 안부에서 다시 올려다보면 봉우리와 봉우리 암벽에 설치된 계단이 제법 멋진 경관을 자아낸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오솔 숲길을 지나고 묘소도 지나면서 자그마한 아파트 단지가 내려다보이는데 거기가 하산 완료 지점인 양주시 대교 아파트이다.



때 / 늦겨울

곳 / 양주시청 - 백화사 - 십자고개 - 상봉 - 상투봉 - 임꺽정봉 - 양주 대교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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