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12
도전이나 모험이 아닌 자제와 평정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고 산은 가르쳤었다.
순간적인 결정과 순발력 넘치는 행동은
위험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임을 산에서 배웠었다.
5월 초, 화악리 윗 홍적 버스 종점에서 내리자 아침 10시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내리쬐는 태양열이 제법 따갑다.
연계 산행을 즐기는 마니아들에 의해 몽가북계라는 용어가 생겨났는데 한북정맥에서 우측으로 뻗은 화악 지맥의 몽덕산, 가덕산, 북배산과 계관산을 잇는 산행 구간의 머리글자이다. 거기 네 곳의 산을 찾아왔다가 지도상으로 연결된 걸 보고 삼악산까지 잇기로 한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연산면 화악 1리를 들머리로 하는 몽덕산에서 강원도 춘천시 강촌지역을 날머리로 하는 삼악산까지의 다섯 산을 넘는 꽤 긴 길이다.
화악리 버스 종점에서 도로의 보호난간이 끝나는 홍적 고개까지 걸어 올라간다. 춘천에서는 지암리 고개 또는 마장이 고개라 부르는데 여기가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 지역이다.
들머리 외진 마을 화악리
그 끄트머리 미끄러질 듯 기운 구릉
적막한 홍적 고개
솟대처럼 높기만 하여 더욱 외로운 나무 한 그루
붉은 꽃 활짝 피어났더라면
고독에 지치고 땀에 찌들어 겨운 시름
잠시나마 덜어냈으려나
쫓지도, 쫓기지도 않고 마냥 그 산들을 걷는다
홍적 고개에서 몽덕산을 오르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신록의 계절에 접어들었지만, 이곳은 아직 겨울 잔해들이 채 걷히지 않은 모습이다. 나뭇가지는 앙상하게 헐벗었고 땅바닥도 온기 뿜어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이날은 산행하는 이들이 없어 싸리밭길 능선을 호젓하게 걷는다. 사방으로 겹겹의 깊은 산들이 없다면 그냥 밋밋한 능선에서 지루한 걸음을 옮겼을 것이었다.
화악산과 매봉이 지붕을 드러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몽덕산 정상(해발 690m)에 닿는다. 쓰러진 정상석을 누군가 기둥으로 받쳐놓았다.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춘천시의 경계 선상에 있는 몽덕산인지라 지방자치단체 간의 눈치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당분간 기울인 채로 버텨야 할 듯싶다.
“내 문패 걱정은 하지 말고 쭉 편안한 길이니까 느긋하게 즐기시게.”
“네, 산에서 내려가면 담당자한테 바로잡도록 조치시키겠습니다.”
뒤돌아보니 고개를 치켜든 촛대봉이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고 그 뒤로 응봉도 자애롭게 미소를 짓고 있다.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는 하지만 산자락이 부드러운지라 느긋하게 거리를 줄여나갈 수 있다. 다만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나무가 능선 아래로 심겨 있어 조금 더 지나서는 더위깨나 먹을 것만 같다.
여전히 비슷한 등산로를 걸으며 오른쪽으로 명지산과 애기봉, 화악산을 보다가 납실 고개라는 갈림길에 이른다, 춘천시 서면 오월리 윗납실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한다. 간간이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귓전을 스치고 주변에 걷는 이 한 사람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먼 하늘이 청명해지고 있다. 여름 이후엔 키 큰 억새로 인해 걷기가 무척 불편할 듯도 느껴지지만 대체로 넓은 능선은 굴곡이 심하지 않아 겨울 산행에 적합할 것처럼 보인다.
몽덕산에서 외길을 편안하게 걷다가 가덕산에 다다른다.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가덕산(해발 858.1m)에 도착했으니 어지간한 산의 봉우리와 봉우리처럼 가까운 데 산이 이어지고 있다. 너른 억새 군락지대인 가덕산 정상에서 북배산과 계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고는 곧장 길을 향한다.
삿갓봉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춘천 서면 서상리로 넘어가는 퇴골 고개로 이어진다. 능선 아래로 노랗게 무리 지은 야생초가 평화로이 햇살을 즐기고 있다.
오늘 접하는 다섯 산 중 가장 높은 북배산北培山(해발 870m)에 도착해서 허기를 채운다. 이때가 홍적 고개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이 지나지 않은 12시 30분 경이다. 휴식을 취하며 둘러보니 지나온 가덕산과 화악산이 환히 드러난다. 춘천과 화천 쪽으로 용화산, 그 너머로 사명산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명지산에서 연인산, 또 축령산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경기도 가평군은 지형적으로 군의 대부분 지역이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점차 고도가 낮아진다. 그 산들을 끼고 가평천이 흘러 북한강으로 합류된다. 명산과 청정계곡이 즐비하여 발 닿는 곳마다 휴양지나 다름없어 자주 오게 되는 가평은 수도권의 넉넉한 힐링 공간이다.
고만고만한 오르내림 후 한 시 방향으로 능선을 틀자 계관산이 보인다. 그늘이 없는 능선의 연속이다. 이젠 더위를 느낄 시간이고 땀이 솟을 만큼 걸었다. 계관산까지는 보이는 것과 달리 꽤 긴 편이다. 낮은 하늘로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능선 아래엔 진달래, 억새랑 잡목들이 마구 섞여 질서는 없어 보여도 수더분하고 자유스럽다. 쫓길 것도, 쫓을 것도 없는 곳, 그래서 산은 산이다.
살아오면서 성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크게 인내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산을 알고부터, 특히 장거리 연계 산행에 몰입하면서부터 성실함이 절로 몸에 밴 듯하다. 일단 산에 들어서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는 달리 방안이 없다. 위로 솟구쳐 오르면서 인내심은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필요 불급한 것들을 내 것으로 하게 되었으니 이런 큰 가르침을 산이 아닌 어디에서 익힐 수 있었겠는가.
가평군 고달면 목동리 싸리재 마을로 내려가는 삼거리 고개인 싸리재를 지난다. 들짐승의 등줄기 같은 구릉 몇 개를 넘다 보니 닭 볏 형상으로 솟은 계관산鷄冠山 정상(해발 735.7m)에 이르자 몇몇 등산객들이 모여 있다. 싸리재 버스종점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명지산과 화악산이 커다랗게 뭉친 구름을 얹었고 의암호 너머로는 춘천 시내가 낮게 몸을 굽히고 있다.
몽가북계의 4 산 연계 산행에서는 보통 여기 계관산 정상에서 2.8km 아래의 싸리재 버스 종점으로 하산하게 된다. 홍적 고개에서 여기 계관산까지 11.2km이니 총 14km 거리의 4 산 종주 코스라 할 수 있다.
날카롭기가 수리 발톱 같은 삼악산인 데다 심하게 지쳤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능선 너머 다소 아득하게 보이는 삼악산과 싸리재 내리막을 놓고 잠시 망설인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는데.”
도전이나 모험이 아닌 자제와 평정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고 산은 가르쳤었다. 순간적인 결정과 순발력 넘치는 행동은 위험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임을 산에서 배웠었다.
삼악산까지 갔다가 내려가려면 지금까지 온 만큼 혹은 그보다 더 가야 한다. 거리보다 중요한 건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느냐는 거다. 충분히 검색했지만, 실제는 지도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여러 번 겪어봤다. 더구나 식수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아아, 그런데도 나는……”
걸음은 머리가 결정 내리기 전에 이미 그쪽으로 내디디고 있다. 이제부턴 더욱 지치고 고독한 수행이 될 것이다. 계관산 정상에서 900m 지점에 낡은 이정목이 세워졌는데 삼악산까지 8km라고 적혀있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꽤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삼악산 등선봉까지의 거리가 침울하고 목이 타게 한다. 7.3km 거리의 등선봉에 올랐다가 강촌마을로 내려갈 때까지 갈증을 견뎌내야 한다.
“나이 먹을수록 주머니에 돈 없으면 외로워지는 법이야.”
갑자기 왜 이런 말이 떠오르는 걸까. 없으면 더 궁해지나 보다. 인적 없는 산길에 익숙해 있기는 하지만 물이 없어서일까, 마을도 갈림길도 보이지 않는 외길이다 보니 은근히 걱정스러워지고 바짝 입이 타들어 간다.
그러나 산은 믿음을 준다. 언제나 내 편일 거라는 강한 믿음을 준다. 늘 그래 왔다. 지천에 깔린 바이올렛 야생화를 내려다보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석파령 꼭대기(해발 380m), 그런데 이정표에 삼악산으로의 방향 표시가 없다. 표시가 없으면 직진이 운행 상식이다. 내비게이션도 그렇지 않은가. 역시 석파령 전면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대는 이번에도 안전하게 해낼 걸세.”
좌우로 쭉쭉 뻗어 늘어선 낙엽송들이 푸릇푸릇 힘을 실어주는 느낌이다. 이정표나 리본은 진작부터 보이지 않아도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는 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바위들이 보이고 바위 구간이 나타난 걸 보니 삼악산 자락에 들어서긴 했나 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이 심해 입술이 말라버렸다. 물도 떨어진 상태에서 길을 연장한 게 후회가 되기도 하고 무모함에 자책하게도 된다.
“역시 과유불급이었나.”
바윗길을 타고 또 타길 거듭해서 수북한 돌무더기에 이르렀는데 삼악 3봉 중 한 곳인 청운봉이다. 주봉인 용화봉과 등선봉 그리고 여기 청운봉을 일컬어 삼악산이라 명명했다.
잡목 숲 사이로 등선봉과 570m의 삼악 좌봉이 잡힌다. 왼쪽으로 계관산이 8.7km, 오른쪽으로 등선봉이 1.2km인 이정표가 있다. 날카롭기가 수리 발톱 같은 삼악산인 데다 심하게 지쳐있다. 이정표의 수치가 오늘처럼 멀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북한강 줄기를 보면서도 저 물을 마시고 싶단 생각만 든다.
등선봉의 앉은뱅이 정상석(해발 632m)과 키를 맞춰 앉는다. 아니 정상석 옆으로 주저앉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신선이 되어 오른다는 등선봉 앞에서 셀프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낯빛까지 창백하니 신선은 고사하고 영락없는 노숙자다. 그래도 오늘 목표한 다섯 산의 최후 봉우리에 이르자 긴장이 누그러지며 뿌듯한 기분이 든다. 어둠이 몰려올 시간이기에 여기서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만날 땐 편한 맘, 웃는 얼굴로 해후하세나.”
등선봉의 인사말도 듣는 둥 마는 둥 등을 돌린다. 삼악 좌봉 쪽으로의 하산로, 그야말로 너덜길이다. 다시 고개 들어 저물어가는 한북정맥의 산들을 둘러본다.
“이처럼 시련을 주는 그대 산들이 있으므로 그래도 난, 무척 행복하다오.”
강촌에 하나둘 불빛이 켜지는 중이다. 마음이 급해진다는 걸 의식하며 끝까지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 다지지만, 허기까지 겹쳐서일까. 암릉 하산 길이 무척 어지럽다. 두어 번 왔던 곳인데 삼악 좌봉으로 건너는 길이 왠지 생소하다. 끝내 하산로를 찾으려 헤매다가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위험지역이란 표지판을 보고 안전한 길을 찾는다는 게 그만 위험지역으로 들어섰다.
“침착해야 해. 차분해져야 한다.”
그랬어도 미끄러워 헛디디기를 수차례, 거의 80도에 가까운 낙엽 경사로를 간신히 내려오고 보니 바위가 굴러 생긴 애추崖墜의 너덜지대다. 경직된 긴장 탓으로 온몸이 땀에 젖었다. 이미 어둠이 산을 휘덮었다.
“하나님! 도우소서.”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으며 도와달라고 중얼거린다. 헤드 랜턴도 없이 최대한 서행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다가 물소리를 들었다. 바위틈에 팔을 뻗어 들이민 물병에 물이 담기는 걸 보니 환청이 아니었다. 이 물이 식수로서 적합한 건지 아닌지는 전혀 상관없는 사안이다. 마치 지옥 같은 곳에서, 태어나 가장 맛있는 물을 먹어보았다.
“아아! 역시 하나님은, 산은 내 편이었어.”
불빛을 보고 내려오니 강촌검문소에서 1km 떨어진 국도변이다. 강변 국도 갓길을 걷는 것도 내리막 산길만큼이나 무섭다. 밤바람을 가르는 차들의 속도가 엄청나다.
평상시 느끼지 못했던 자신을 깨우치게 됐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내지르는 무모함, 자칫 무기력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의 극복 의지와 생존본능……. 내 안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는가 보다.
“어쨌든 이젠 살았어.”
강촌교 앞 건널목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는 동안 달리는 차들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리는 중에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이 든다.
‘강촌역에서는 산도 구름도 기차도 강물 속으로 떠난다.’
다리를 건너 강촌유원지에 들어서니 다신 오늘처럼 무모하게 까불지 않겠다는 반성뿐이다.
나 홀로 긴 여정
피로 몰려오고 입술 타들어 가며
나,
무얼 담아 내려왔는가.
수행은 원래 고독하다 했잖은가.
땀 흘려 숨 가쁘게 오르고
수직 비탈 미끄러지며
무얼 담아오려
거길 간 건 아니었잖은가.
길 잃고도
목 축여 해갈하고
내려와 허기진 배 채웠으니
그게 극한의 행복 아니겠는가.
때 /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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