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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의 보고, 축령산에서
절고개 지나 서리산으로

경기도의 산 13

by 장순영

속임수와 모함으로 조작된 거짓은

영속성이 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한 반복에 의해서라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경기도 가평은 산과 계곡, 호수뿐 아니라 지역 자체가 하나의 자연생태공원이라 할 만큼 나무와 꽃들로 아름다움을 가꾼 곳이다.

그런 가평의 대표적 명소 중 한 곳인 ‘아침고요 수목원’은 수만 종의 수목을 보유하고 한국적 정서를 담은 최적의 정원으로 꼽는다. 사계절 내내 낮이든 밤이든 아름다움을 찾는 이들로 북적인다.

2009년 10월 일반에 개방되어 오감 생태문화 테마파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화원’ 역시 자연생태공원으로는 특이하게 다른 것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화두를 주제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브라질의 커피나무, 이스라엘의 감람나무에 하동 녹차나무, 고흥의 유자나무 등 이색적인 수목들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으며, 인공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자연을 담은 ‘꽃무지 풀무지’는 꾸밈없이 수수한 숲의 모습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가평군과 남양주시 수동면에 접한 축령산祝靈山은 화악산과 명지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한강을 코앞에 두고 멈춘다.

고려 말 이성계는 이곳에 사냥을 왔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돌아간다.


“그만 돌아가자. 바람이 심해 화살이 자꾸 빗나가는구나.”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산신제를 지내면 백발백중 맞출 것입니다.”


몰이꾼의 말을 들은 이성계가 산신제를 지낸 후 멧돼지를 잡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이때부터 고사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축령백림의 피톤치드를 흠뻑 흡입하며


산행은 축령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친구 병소와 동수가 동행했다.


“일찍 왔네.”

“가까운데 사는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려야지.”


남양주에 사는 동수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축령산 정상까지 2.74km, 왼쪽으로 서리산 정상까지 2.64km의 표시가 되어있다. 3년 전에 올랐을 때와 반대로 이번에는 축령산으로 올랐다가 서리산을 거쳐 내려오기로 한다.

울창한 잣나무 숲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각종 새 이름으로 문패를 단 숲 속의 집 열세 동이 있고, 1동 18실의 산림휴양관이 있으며 삼림욕장, 휴게소, 체육시설과 야영장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휴양림이다. 하늘을 찌를 듯 곧고 높이 뻗은 잣나무 숲 길에 접어들자 송진 내음이 진하다. 아늑하고 포근한 숲에 풍기는 잣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걷는다.


“여길 축령백림이라고 부르지.”

“축령백림?”

“가평 8경 중 7경에 속하는 잣나무 숲을 이르는 명칭이야.”


인근에 살아 일대를 잘 아는 동수가 설명을 덧붙인다. 해방 전후 심은 잣나무 묘목들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름드리 잣나무 숲으로 변해 삼림욕장과 자연휴양림으로 편안한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그 말을 들으니 몸이 편안해지는데.”


머리보다 몸이 먼저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덕분에 아무리 걸어도 피로감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다. 잣나무의 피톤치드는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효과가 있어 각종 감염질환이나 아토피 질환은 물론 면역력을 좋게 해 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명의가 따로 없군.”


이맘때쯤의 가을 잣나무가 가장 늠름하다고 한다. 봄과 여름을 견뎌내고 그 푸름이 절정에 달하면서 실한 잣송이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꽃이 피고도 꼬박 한해를 넘겨 다음 해 가을이 되어야 잣을 수확할 수 있다니 서두른다고 해서 잣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암벽 약수터에 졸졸 흐르는 약수를 보고 바윗길과 너덜 길을 번갈아 지난다. 그리고 잣나무 향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바위에 낮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게 된다. 예로부터 축령산은 골이 깊고 산세가 험해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독수리가 많았다고 한다.

이 바위를 멀리서 바라보면 독수리의 두상을 닮았다고 하여 수리바위라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 얼마 전까지 이 바위틈에 독수리 한 쌍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한다.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조선 시대 홍 씨 성을 가진 판서가 늦도록 후세를 잇지 못해 애를 태우던 중 이 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지성으로 기도한 결과 아들을 낳아 자손 대대로 가문이 번창했다는 전설이 깃든 홍구세굴이 있다. 축령산의 신령스러움을 부각하는 또 하나의 전설이다.



정녕 모나서 정 맞은 남이바위인가


밧줄이 설치된 바윗길을 올라 수동면 일대를 내려다보고 고목 군락을 지나 남이바위에 이르게 된다. 조선 세조 때의 명장이었던 남이장군이 한성의 동북방 요충지인 이곳에 자주 올라 지형지물을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하여 남이바위라고 부른다.


백두산의 바위 돌은 칼을 갈아 모두 없애 버리고白頭山石 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려버리리라.豆滿江水 飮馬無

남아 이십 대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하면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요.後世誰稱 大丈夫


속이려 사력을 다하는 자에게 어찌 속지 않을 수 있으랴. 남이장군은 북방 정벌 때 지은 이 북정가北征歌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태종의 외손자로 태어나 지혜와 용맹을 갖춘 건장한 청년 남이는 무관으로 급제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공신으로 승승장구하며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죄에 몰리고 만다.

역모죄의 단초는 북정가의 셋째 행, 남아 이십 미평국의 ‘平’ 자를 얻을 ‘得’ 자로 바꾸어 ‘남아 20세에 이르러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고함으로써 역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속임수와 모함으로 조작된 거짓은 영속성이 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한 반복에 의해서라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유자광은 뛰어난 기개와 용력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 차례나 일등공신에 책록 된 인물이다.

조선 7대 왕 세조부터 11대 중종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사림으로부터 남이의 옥사를 고변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희대의 간신으로 규정되어 비참한 최후를 당했고 조선왕조 내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당대의 두 천재가 힘을 합쳤으면 조선이 달라졌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그게 어려운 거지. 두 개의 태양이 같이 비추면 세상이 어두워지거든.”


남이장군의 한이 가득 담겼을지도 모를 남이바위가 불현듯 모난 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남이는 모나서 정 맞은 돌에 비유할 수 없는 인물이다. 열등감과 시샘에 의한 억울한 희생자이다.

35. 헬기장을 지나면서 축령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jpg 헬기장을 지나면서 축령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사면이 직벽 낭떠러지인 남이바위를 지나고 헬기장을 또 지나니 바로 축령산 정상(해발 886,2m)의 돌탑과 태극기를 보게 된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로 주금산, 천마산, 용문산, 운악산과 경기도에서 으뜸 버금가는 화악산과 명지산을 조망한다. 또 저 아래로 잔잔한 청평호를 내려다보고 서리산으로 향한다. 능선 오른쪽 아래로도 잣나무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세상이 여기 잣나무 숲만 같아도 좋겠건만.”

“왜? 아토피에 좋아서?”

“올려다봐. 다 같이 쭉쭉 뻗었잖아.”

“제 살길만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 어느 한 놈이 더 굵고 더 높아지려면 옆의 다른 나무를 쓰러뜨려야 했겠지.”


동수의 견해로 인해 빠져나와서도 잣나무 숲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무릉도원과 지옥은 같은 곳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거기가 어디든 욕심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살면 무릉도원이고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탐욕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는 순간 이미 그곳은 지옥이 되고 만다. 탐욕의 끝은 잣나무 숲과는 전혀 다른 암울한 터널로 남을 것이다.

36. 축령산에서 이곳 절고개를 넘어 서리산으로 간다.jpg 축령산에서 이곳 절고개를 넘어 서리산으로 간다


절고개 가까이 풍성하게 자란 억새들이 소소히 부는 산바람에도 요란스레 몸을 흔들어댄다. 절고개를 지나면 한결 편한 길이 이어지면서 헬기장을 지나 휴양림 주차장으로 하산할 수 있는 억새밭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축령산을 뒤돌아보고 짧은 바윗길과 완만한 오르막 언덕을 넘어 서리산(해발 832m)에 닿는다.

바위가 많은 축령산에 비해 육산인 서리산은 느낌도 여성적인 면이 짙어 보인다. 여기서도 조망은 여전히 시원하게 뚫려있다. 서리가 내려도 쉽게 녹지 않아 늘 서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서리산은 축령산과 함께 자연휴양림을 분지처럼 쓸어안고 있다.

5월 철쭉 철이 되면 정상에서 화채봉까지 700여 m에 달하는 한반도 지형과 흡사한 철쭉동산이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가지만 앙상한 철쭉 터널을 지나 전망대에서 한숨 돌리며 가평 일대를 내려다본다.

화채봉은 휴양림과 연결되지 않아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힘차게 뻗은 잣나무 숲길을 통과하여 내려서면 중간에 너덜지대가 있긴 하지만 내리막 걸음에 큰 불편함은 없다. 서리산 간이 목교를 지나 평지를 걸어 휴양림 제1 주차장까지 닿으면서 산행을 마치게 된다.

서리산 내리막길에서의 조망.jpg 서리산 내리막길의 풍치



때 / 초가을

곳 / 축령산 자연휴양림 - 잣나무 숲 - 수리바위 - 남이바위 - 축령산 - 절고개 - 서리산 - 화채봉 삼거리 - 간이 목교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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