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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비산에서 통방산까지
어유소중삼통 6산 종주

경기도의 산 17

by 장순영

언제나처럼 고된 길 딛고 올라 산정에 오르면

삶의 희로애락은 색 바랜 한지에 불과하다.

한지에 그려진 세상의 그림들이야말로 자연에 비할 때

턱없이 하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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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산을 잇는 연계 산행, 그 산들의 시점부터 종점을 연결하는 종주 산행은 체력 면에서나 안전성 측면에서 다소 위험을 수반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도 적지 않다.

목표한 산행을 무사히 마쳤을 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복받쳐 오르는 희열과 포만감이 그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며 극복을 요하는 역경에 처했을 때의 대처 자세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을 간다는 게 꼭 무얼 얻고자 가는 거였던가. 산과 산이 이웃해 있고 그 산들을 잇는 능선이 있으므로 연계 산행의 종주 코스를 찾아 길을 나서게 된다.

버스 하차지점인 가일리 삼거리에서 유명산 휴양림 입구를 오른쪽으로 두고 어비 산장을 찾아 2.5km를 거슬러 오르면 그 맞은편이 어비산 들머리이다.



“길이 있다는 건 갈 수 있다는 거겠지?”


신록이 한껏 푸름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지금, 한강기맥을 거치는 여섯 산을 잇고자 그 첫 산인 어비산 입구에 닿았다. 이제부터 하늘을 올라 구름과 벗하며 녹음 우거진 긴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산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이른바 ‘어유소중삼통’은 마니아들이라면 흔히들 연계하는 어비산, 유명산, 소구니산, 중미산의 4 산 산행에 삼태봉과 통방산을 연결한 거라 할 수 있다. 검색하다 보니 중미산에서 절터 고개라는 곳을 통과해 통방산까지 길이 이어지는 지도를 보게 되었다.


“길이 있다는 건 갈 수 있다는 거겠지?”

“거기에 대한 산행 후기가 하나도 없다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요.”

“우리가 최초가 되겠지.”

“이미 형한테 판단이 섰으니까 난 따라만 가는 거지 뭐.”


불안감이 없지 않은 표정이지만 계원이가 동조한다. 등로를 놓쳐 엉뚱한 길을 헤매거나 시간상 시행착오로 여러 차례 고생했으면서도 가는 곳이 어디든 믿고 따라나서는 후배가 고맙다. 계원이와 함께 이 여섯 산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도록 겸허히 기도 올리고 그 들머리로 들어선다.

가평군과 양평군에 걸쳐 있는 어비산魚飛山은 그 계곡에 물고기가 날아다닐 정도로 많다고 해서 지어진 명칭이다. 어비산 서쪽으로 흐르는 1 급수의 옥계가 어비계곡이고 그 동쪽에 흐르는 계곡이 유명산에 접한 입구지 계곡(유명 계곡)이다.

아침부터 안개구름이 뿌옇게 깔려 주변 산세가 흐릿했으나 건너편 유명산 자락만큼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소나무 사이로 산과 산을 가르는 도로, 선어치 고개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 소구니산, 오른쪽으로 중미산이 보인다. 몇 시간 후면 만나게 될 곳들이다.

44. 어비산에서 가게 될 선어치고개와 중미산, 삼태봉을 바라본다.jpg 어비산에서 가게 될 선어치고개와 중미산, 삼태봉을 바라본다


어비산은 부드러운 육산이지만 비교적 가파른 편이어서 처음부터 호흡을 제대로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육질의 소나무 숲과 신갈나무 군락이 좌우로 늘어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거기 더해 쾌적하기 이를 데 없는 음이온을 내뿜으니 그야말로 산림욕이 따로 없다.


“한적하군.”

“한적하면서도 고즈넉하네요.”


그렇다. 한적하되 고즈넉하다. 주말이 아닌 평일을 잡은 건 여섯 개나 되는 산에서 부대끼지 않고 산행하고 싶어서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2.3km를 올라 첫 산 어비산(해발 829m)에 도착했다.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반 이상 목표 지점에 도달한 셈이다.


“비릿한 민물고기 냄새가 나는 거 같지 않아?”

“……글쎄요.”


어비산은 위치상 북한강과 남한강 사이에 있어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지면 일대가 잠기게 되는데, 그때 계곡 속 물고기들이 유명산보다 조금 낮은 어비산을 넘어 본류인 한강으로 돌아갔다는 설화가 있다. 이 또한 산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일 것이다.

길게 지체할 여유가 없다. 길고 먼 길이기에 흔적만 남기고 두 번째 기착지 유명산으로 향한다. 겨우 5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부지런히 내려서자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어비산과 유명산의 경계인 입구지 계곡 합수점에 이른다. 이 계곡은 아래로 더욱 수량이 많아지면서 박쥐소, 용소, 마당소 등 맑고 시원한 옥수로 연결된다.


“물은 오래 머물면 사람을 게으르게 하니까.”

“부지런히 산으로 가야겠지요?”


세수만 하고 바로 일어선다. 가파르게 내려왔으니 다시 그만큼 올라야겠지. 정상까지 1.3km의 깔딱 고개는 어비산과 달리 바위 투성이 너덜지대의 연속이다. 사람이든 꽃이든 아름다우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진초록을 더욱 멋진 빛깔로 승화시키는 흰색과 노란 들꽃 무리를 보고 허리를 굽힌다.


“이 자리에 피어줘서 고맙구나.”


몸을 낮춰 이 계절 잠깐이겠지만 곱게 피어 제 색을 내는 야생화에 감사를 표한다. 작은 새 한 마리가 구성지게 휘파람을 불어 나뭇가지에 날아 앉는다. 유명산 터줏대감이 응원가를 불러주며 오늘 행보를 성원해주어 더욱 힘이 솟는다. 정상 일대에서는 붉은 철쭉이 무리 지어 미소 짓는다.

유명산 정상(해발 862m)에 올라 희미하나마 어비산 너머로 우뚝 솟은 용문산 백운봉을 바라본다. 흐린 날 탓에 화악산과 명지산은 어슴푸레 실루엣만 보인다.

인근 지역에 많은 말들을 사육하여 마유산이라고 불렸었다. 1973년 한 산악단체에서 국토 자오선 종주를 하던 중 주변 사람들한테 이 산의 이름을 물어보았는데 마침 아는 사람이 없어 이들은 산 이름이 없다고 여겨 일행 중 홍일점이었던 진유명 씨의 이름을 따서 유명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종주기가 당시 스포츠신문에 게재되면서 유명산으로 굳어 버렸다. 웃자고 던진 조크가 산 이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진유명 씨는 지금도 산행을 즐길까.”

“유명산만큼은 자주 찾지 않을까요.”



시집가는 신부의 농을 지고 넘던 고개


소구니산으로 향하는 내리막길도 내내 철쭉밭이다. 유명산의 철쭉은 연분홍 꽃 색깔이 유난히 곱고 꽃잎도 무척 매끈하다. 유명산 정상에서 철쭉을 감상하며 340m를 내려와 농다치고개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등산로는 그 길이 넓거나 좁음보다는 험하거나 평탄함을 의식하는 게 보통이다. 한 사람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폭이면 그다지 좁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런 길에 농을 지고 걷는다면? 시집가는 신부의 농을 지고 고개를 넘으면 아무리 조심한들 여기저기 부딪쳐 농이 다쳤다고 하여 농다치고개라 한다니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많은 혼사가 이뤄졌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배낭을 메고도 힘든데 농을 메고 이 길을?”

“용달차가 없었나 보지.”


좁지만 평탄한 숲길에서 약간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면 바로 소구니산 정상(해발 800m)이다. 여섯 산의 각 구간 중 유명산에서 소구니산까지가 가장 짧은 구간이다.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의 경계이자 유명산과 중미산을 연결하는 능선 한가운데 솟아 있다.

유명산 쪽으로 눈을 돌려 고랭지 채소밭과 백운봉을 눈에 담고, 떨어진 철쭉 꽃잎 살포시 지르밟으며 선어치 고개로 내려간다. 양옆으로 우거진 숲을 끼고 내려가는 길이 무척 비탈지고 길다. 소구니산과 중미산 사이의 안부, 가평과 양평을 이으면서 운전자들과 등산객들에게 국수, 음료 등의 간식을 제공하는 쉼터 역할도 하는데 여기가 선어치 고개이다.

지금은 37번 국도에 유명로라는 명칭을 지닌 4차선의 넓은 도로지만 예전엔 고갯길의 너비가 세 치寸 내지 네 치寸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좁아 서너 치(三四寸 : 9~12cm) 고개라 불렸다고도 하고, 고개가 하도 높아 서너 치만 더 오르면 하늘과 닿는다거나 신선들이 사는 고개라는 의미의 선어치仙於峙라는 여러 설이 있는 곳이다.

선어치 고개의 이름 유래가 어떠하든 이 고개는 6·25 한국전쟁 때 남한강으로 진출하려는 중공군을 제압하여 용문산을 사수하는 등 중공군의 이후 전략을 무력화시켜 빛나는 전과를 올린 유서 깊은 고개라는 사실이다.


“국수 한 그릇씩 먹고 갈까?”

“그러죠. 중미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고개 포장마차에서 국수 한 그릇씩을 뚝딱 비우고 가파른 중미산을 오르는데 바로 땀이 흐른다. 분홍 철쭉 밑에서 숨을 고르다 바윗길을 끼고 다시 오른다. 오르며 뒤돌아보니 저만치 유명산이 손 흔들어 끝까지 긴장의 끈을 풀지 말라고 일러준다.

45. 중미산 정상에 이르자 몸이 나른해진다.jpg 중미산 정상에 이르자 몸이 나른해진다


철탑 아래로 선어치 고개가 꽤 낮아진 걸 보면 정상이 멀지 않았다. 중미산 바위지대 정상(해발 834m)에 올라서서도 사방이 뿌옇다. 아래 유명산 자연휴양림의 연두색 푸름을 시기하는지 연무가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가야 할 삼태봉과 통방산도 더욱 멀어 보인다. 삼태봉까지 4.7km. 거기서 또 통방산으로. 부지런히 걸어야 어둡기 전에 하산할 수 있다. 그것도 길을 제대로 찾아 하산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가는 길은 잎사귀 푸른 활엽수와 쭉쭉 뻗은 침엽수들이 땀을 식혀주어 피로가 덜하다. 삼태봉까지 2.9km라는 이정표를 보고 그 방향을 잡았는데 절터 고개를 지나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 사방 두리번거려보지만, 방향감각을 잃고 말았다.

산에서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고 시간까지 허비하는 것을 알바라고 표현하는데 노동 대비 가성비가 낮은 아르바이트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종종 알바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세상사 대다수의 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일의 참된 의미나 가치를 모르고 추진하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꼴이 되고 만다.

국민이 참으로 원하는 바를 모르고 입안된 정책은 국민을 비극으로 몰아가기 십상이다. 국민을 국가의 주인이 아닌 다스리는 존재로 여겼기에 수립된 정책이 국민의 이상대로 갈 리 만무하다.


“널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방향을 잡았던 건 아닌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요.”


한 시간을 헤매다가 간신히 삼태봉으로 오르는 명달리 쪽에서의 들머리를 찾았다. 보통 가파른 게 아니다. 길 찾다가 시간에 쫓기다 보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군말 없이 따라오는 계원이한테 면목이 서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한바탕 봄 꿈같은 추억으로 남겠지요.”

“그래, 지금은 힘들겠지만.”


겨우 그런 말들로 현 상황을 위안하며 높은 고도를 치고 오른다.



여섯 개 산을 하나로 엮고 그 엮은 걸 풀어낸 게 감사하다


쉬면서 둘러보니 지나친 이들 없고 앞서간 이들 없어 보이는 곳마다 수북한 숲길이고 아련한 고갯길이다. 가늘고 긴 고목들 늘어선 군락을 지나면서 노을 물들기 시작하더니 삼태봉 꼭대기가 보인다. 정상(해발 682.5m)에 올라서자 제일 먼저 중미산이 아득하게 잡힌다.

언제나처럼 고된 길 딛고 올라 산정에 오르면 삶의 희로애락은 색 바랜 한지에 불과하다. 한지에 그려진 세상의 그림들이야말로 자연에 비할 때 턱없이 하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46. 삼태봉 정상에 이르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다.jpg 삼태봉 정상에 이르러 물들기 시작하는 노을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지친 발걸음 조심스레 내디딜 무렵 해거름 주홍 노을

속에 담아 돌아오면 너무 그리워

다시 오게끔 하는 그 찬연한 풍광

소매 잡아끌려 몸 맡기면

초록 수림 우거지고

늙은 고목 기침 뱉는 곳

그 무어로도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유혹

우린 그예

그 산

그 깊은 품에 푸근히 안겨있다.


마지막 통방산이 실제 거리와 비교하면 너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남은 에너지를 두 다리에 싣고 단전에 기를 모은다. 오로지 저기 뾰족 봉우리 통방산까지 가야만 서울 가는 교통편이 있는 천안리로 내려갈 수 있으므로 달리 샛길로 탈출할 수도 없다. 통방산 뒤로 보이는 화야산, 곡달산의 흐린 마루금 밑으로 작아진 해가 떨어지려 한다.


“해야! 잠시만 추락을 늦춰다오. 초행길 어둠에 덮이면 아직 남은 길 가시밭길 될까 두렵구나.”


통방산 1km, 이때쯤이면 이정표의 숫자가 쉬이 줄어들지 않는다.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해낸다. 고진감래, 여섯 산과 만남, 아직 하산 길이 남았지만, 목표를 이뤘을 때의 성취감이 짠하게 몰려온다.

통방산 정상(해발 649.8m)에서 계원이와 굳은 악수를 하고 바로 움직인다. 날머리까지 1.9km. 이때가 7시 40분이니 어둠을 뚫고 지나야 그 끝에 도달할 것이다.

한참을 내려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바람이라도 불면 꺼져버릴 것 같은 몇 점 작은 별들이 점멸한다. 헤드 랜턴을 켜고 그리 험하지 않은 하산로를 지나 마을에 도착해서도 바쁘다. 37번 국도변으로 나가 막차를 탈 수 있어야 한다.


“산에서 내려와서도 뛰어야 하다니.”


참으로 간발의 차이로 서울 가는 마지막 시외버스가 손 흔들며 뛰어오는 우릴 보고 서준다.


“감사합니다.”


모든 게 감사하다. 연출하듯 여섯 개 산을 하나로 엮고 그 엮은 걸 풀어낸 게 감사하고, 초행의 긴 여정인데도 믿고 따라와 준 후배한테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브레이크 잡아 우릴 태워준 기사님이 감사하다.



때 / 초여름

곳 / 가일리 삼거리 - 어비 산장 - 어비산 - 입구지 계곡 합수점 - 유명산 - 농다치고개 - 소구니산 - 선어치 고개 - 중미산 - 절터 고개 - 나가터골 삼태봉 등산로 입구 - 삼태봉 - 통방산 - 천안리 - 가마소 유원지 - 뽕나무마을 – 37번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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