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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계곡 유혹 뿌리치고
백운산에서 광덕산까지

경기도의 산 18

by 장순영

하늘 지척 백운산 꼭대기 오르거든 우리 무얼 하겠는가.

그저 산새 울음소리 듣고 맑은 산바람 마시며

함께 걸어온 아랫길 되뇌면서, 그간의 시름 잊으면서

우리 우정 깊어 가면 그만 아니겠는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접해 있는 백운산은 광덕산, 국망봉, 박달봉 등이 주위를 감싸 안은 산군의 중앙에 위치한다. 산세도 그리 험하지 않은 데다 수목이 많고, 넓은 계곡에 수십 리를 흐르는 물이 맑아 여름이면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봄에는 산나물이 특유의 향취를 풍기고 연분홍 철쭉이 온산을 뒤덮는다. 지리산이나 소백산의 새빨간 빛과는 달리 은은하고도 신비로운 색채를 그해 봄, 이 산에서 보았었다.

이번엔 건조하고 무더운 한여름, 이른 아침 친구 태영, 외사촌 연준과 후배 기준이가 모두 먼 곳에서 집을 나서 한 사람도 약속 시각에 어긋남 없이 모여 포천으로 출발한다.



닦아내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다


백운계곡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쨍쨍 내리쬐는 더위를 피하고자 빠르게 산행 준비를 마친다. 여름엔 산이, 그리고 숲이 훨씬 시원하니 말이다. 전세버스 두 대에서 내려 우르르 산행하는 산악회 멤버들을 젖히고 가느라 처음부터 속도를 낸다. 흥룡사를 지나고 백운 1교와 2교를 건너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오르면서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게 되자 물가에 머물고픈 생각이 몰려든다.


“생각대로 행동하라.”


지금의 경우랑 걸맞지 않은 말이 떠오르면서 그걸 합리화시키고픈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이성을 찾는다. 생기 돋는 녹색 수풀 지나 골을 트는 실바람에 숨 돌리는데 발걸음 내딛음과 함께 더위는 다시 기승이다. 흐를 듯 말 듯 암반을 적시는 물길에서도 출렁이는 물살을 보려 하니 오늘 산행은 수행과는 동떨어졌나 보다.

물의 유혹을 뿌리치고 계곡 상류에서 숲으로 들어가 고도를 높인다. 산에 와서 계곡에 눌러앉아 나태한 안락에 도취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한 무더기 삶의 무게 담긴 봇짐 덜어놓고 왔다네.

우거진 수림 적시는 물소리에 아까워 남긴 짐마저

모두 풀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네.

풀잎처럼 가붓이 걸으며 이 산,

생의 한가운데인 양 옷깃 세우고

바람 한 점 없어 걸음 내딛지 못할 때라도

고요한 산사 풍경,

영혼의 맑은 소리

노상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오르면서는 거의 조망이 없다가 수림 사이로 간간이 틈이 생기면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진초록 정글이다. 정글 사이로 가야 할 박달봉과 광덕산 자락이 열기를 뿜어낸다. 더 올라 도마치봉 줄기와 멀리 화악산도 눈에 담는다.

물소리는 끊겼어도 계곡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니 걸음이 가벼워진다.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마루금도 길게 자락을 펼치고 있다. 첫 봉우리 흥룡봉(해발 649m)에 도착하여 다들 흘린 땀부터 닦는다. 닦아내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다.


“길이 멀어 길게 쉴 수가 없다네. 바로 출발하세나.”

47. 향적봉 오르는 길의 암봉이 두툼한 나무숲을 이루고 있다.jpg 향적봉 오르는 길의 암봉이 두툼한 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밧줄 구간을 길게 지나면서 공간이 트이자 산 아래로 백운계곡 식당가가 내려다보인다. 흥룡봉에서 1.6km, 들머리 흥룡사에서 3.7km를 지나 향적봉(해발 774m)에 닿았다. 역시 땀을 훔치는 게 일이다. 섭씨 35도를 웃도는 예보가 있었음에도 군말 없이 긴 산행에 동참한 일행들이 우러러 보인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오늘 같은 날은 물장구치고 놀아야 하는 거 아냐?”

“뒷북치고 있군.”

“물 건너갔어요.”


가야 할 봉우리들을 헤아리다가 태영이가 농담으로 던진 말에 그렇게들 대꾸하지만 다들 예정대로 완주하고자 하는 오기 같은 게 엿보인다. 그렇게 했었다. 이들과 뭉쳤을 때는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이건, 뙤약볕 복더위였건 예정했던 산행을 중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하늘 지척 백운산 꼭대기 오르거든 우리 무얼 하겠는가. 그저 산새 울음소리 듣고 맑은 산바람 마시며 함께 걸어온 아랫길 되뇌면서, 그간의 시름 잊으면서 우리 우정 깊어 가면 그만 아니겠는가.


“또 다음 봉우리로 가자. 거기서 점심 먹자.”


헬기장인 도마치봉(해발 925.1m)까지 약 1.2km를 걸어와서 그늘을 찾아 배낭을 푼다.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칠 때 이곳 산길이 험난해서 말에서 내려 끌고 갔다 하여 도마치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적혀있다.


“궁예나 말이나 도망치면서 치를 떨었겠지.”


태영이가 도마치봉의 유래에 그럴듯하게 살을 덧붙인다.

48. 도마치봉을 오르면서 본 지능선에 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jpg 도마치봉을 오르면서 본 지능선에 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식사를 마치고 미지근하게 더워진 커피까지 마시자 여유로움이 생긴다. 백운산 정상을 향하다가 국망봉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포천시 이동면에서 올려다보면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모양으로 국망봉國望峰이 우뚝 솟아 있는 걸 보게 된다. 국망봉(해발 1,168.1m)은 포천 일대의 무수한 산 중 제일 높은 산이다.

국망봉도 궁예와 관련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 폭정이 심해지자 부인 강 씨가 충언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강 씨를 강씨봉 아랫마을로 쫓아냈다. 그 후 왕건에 패한 궁예가 잘못을 뉘우치고 강 씨를 찾았지만, 부인 강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회한과 자책에 빠진 궁예가 국망봉에 올라 도성 철원을 바라보며 비탄에 빠져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또 궁예와 왕건이 싸울 때 궁예의 부인 강 씨가 이곳으로 피난을 와 토굴을 파고 살면서 태봉국의 수도 철원을 바라보며 남편의 승리를 기원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궁예는 이 산 곳곳에 실속 없는 전설만 남겨놓았어.”

“불운하고도 아집이 강한 인물이었어.”


나름대로 궁예를 평하며 완만한 능선을 지난다. 삼각봉을 거쳐 1km 남짓한 거리를 더 지나 열기가 절정일 즈음 넓은 헬기장인 백운산 정상(해발 903.1m)에 도착했다.


“저기가 조금 후에 서게 될 광덕산 천문대야.”


광덕산 정상 일대를 가리키며 말하자 기준이가 반문한다.


“조금 후요?”


산은 보이는 거리감보다 실상 걸으면 더 가깝다. 산과 산 사이 공간이 주는 느낌은 실제 거리보다 훨씬 멀리 느껴진다. 광덕산에서 이어지는 한북정맥이 이곳 백운산을 찍고 남쪽으로 계속 마루금을 이어간다.

한북정맥은 산경표에 정한 1 대간 1 정간 13 정맥 중 하나로, 한강 북쪽에 있는 분수령이라 그렇게 부르며 한강과 임진강 수계를 가름한다. 한북정맥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어 남한 쪽은 강원도 화천군과 철원군의 경계 선상에 있는 수피령(해발 740m)부터 이어진다. 대성산, 수피령,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강씨봉, 청계산, 운악산, 죽엽산, 도봉산, 노고산, 현달산, 고봉산, 장명산 등이 남한의 한북정맥에 소재한 주요 산들이다.

백운산에서 충분히 땀을 배출하고 그만큼의 수분을 보충한 다음 3.2km 떨어진 광덕고개로 내려간다.


“다들 힘들지? 캬라멜 하나씩 먹어. 졸음이 올 때는 캬라멜이 최고야.”


거의 녹다시피 한 캬라멜을 하나씩 받아 입에 넣는다. 광덕고개로 내려가는 길도 몇 번의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광덕고개에서 올라오는 몇 명의 등산객들도 땀에 젖어있다.


“부럽습니다. 벌써 내려가시네요.”


올라가는 등산객 한 분이 길을 비켜주며 그렇게 말하는데 진짜로 부러워하는 표정이다. 헬기장을 지나고 762m 봉에서 돌아보니 넘어온 봉우리가 꽤 높다.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은 참호를 지나자 광덕고개로 이어지는 372번 지방도로와 그 위로 길게 늘어선 광덕산 능선이 보인다.

광덕산에서 뻗어 나와 그 오른쪽으로 움푹 들어간 회목현에서 다시 회목봉으로 연결되는 마루금을 보노라니 그해 겨울 발이 푹푹 빠지는 설산을 홀로 걸었을 때가 떠오른다. 상가 뒤편의 좁은 철 계단을 내려서서 광덕고개에 이르러 식수를 보충한다.



캬라멜고개 지나 광덕산으로


백운산에서의 산행 종점이자 광덕산의 기점이 될 광덕고개는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로 캬라멜고개로도 불린다. 한국동란 때 미군 병사들이 줄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기자 지휘관들이 이곳을 지날 때 캬라멜을 나눠주어 졸음을 막았다 하여 그 후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38선 북방 10km 지점에 있어 자연경관과 식생이 잘 보존되고 때 묻지 않은 풍광을 지닌 광덕산廣德山은 한탄강과 북한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지만 620m 고도의 광덕고개에서 출발하므로 그만큼 힘의 소모가 반감된다.

반달곰 조형물의 오른쪽 도로를 따라 200여 m를 걸어 왼쪽의 조경철 천문대 방향으로 꺾는다.


“아폴로 박사?”

“맞아. 천문학자.”

“정치도 하셨었지?”


2000년대 초반 새천년민주당에서 중앙위원을 역임하긴 했지만, 그는 천문 기상학자로서, 그를 아는 이들에게 하늘의 무수한 별이나 우주를 떠올리며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광덕산 가든 앞 이정표에 정상까지 2.44km라고 표시되어 있다. 도계 주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된다. 광덕산은 특히 겨울 설경이 아름답다. 작년 겨울, 정상을 이룬 규암석 바위지대가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암초에 비유하는 상해봉에서 추위도 잊고 홀로 설경에 심취했었다. 다시 오마고 스스로 다짐했었는데 지금 이들과 함께 오게 된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시렸던 그 겨울의 추억을 떠올리며 걷는데 포장도로는 운암교 앞에서 가파른 흙길로 바뀐다. 잣나무 숲을 지나자 급격하게 고도가 높아지고 수림 사이로 회목봉을 훔쳐보며 땀을 쏟아낸다. 네 사람의 간격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여기서 잠시 쉬자.”


마주 보이는 화악산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저쪽 능선이 우리가 막 지나온 백운산 봉우리들이지.”


백운산에서 삼각봉과 도마치봉을 짚어보고 흐릿한 명지산과 운악산을 살피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골프공처럼 보이던 기상청 레이더 기지가 축구공만큼 커졌다. 정상이 멀지 않았다.


“이제 더 올라갈 데는 없어.”


메마른 숲길 오르막을 치고 올라 정상석(해발 1046m) 앞에 모여 서로를 격려한다. 백운산, 국망봉, 상해봉이 손에 잡힐 듯 지척 간이다. 첩첩이 늘어선 봉우리들의 육중함이 겨울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망은 천문대 쪽이 훨씬 나으니 그리 가보자.”


기상청 레이더 기지와 조경철 천문대로 가자 많은 산객들이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다. 암초처럼 툭 삐쳐 솟은 상해봉과 회목봉 뒤로 복주산이 폭염에 찌들어 지쳐 보인다. 멀리 각흘산과 명성산을 가늠하다가 산 아래 승진훈련장에서 시선을 거둔다.


“모두 호국 용사에 대한 묵념!”


6.25 전투현장 알림판을 읽던 태영이가 묵념을 외치자 다들 안내판에 눈길을 돌린다. 이곳은 1951년 4월 20일부터 6일간 국군 6사단과 중공군 4개 사단 간의 치열하고도 치열했던 사창리 전투가 일어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호국 용사 60여 위의 유해를 발굴했다고 한다. 잠깐의 묵념을 마치고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다시 왔다가 차를 세워놓은 백운계곡 주차장 쪽으로 하산한다. 6.34km의 거리다.

내리막길의 첫 봉우리 973m 봉을 넘고 큰골 갈림길을 거쳐 완만한 숲길을 또 지난다. 광산골 갈림길인 826m 봉에서는 각흘산 들머리이기도 한 자등현으로 내려설 수 있다.

4km 남짓 남은 백운계곡 주차장으로 향해 내려가다 박달봉(해발 810m)에서 작은 발달봉을 거쳐 주변 봉우리들을 눈에 담으면 날머리를 좁혀간다. 급하게 기울어진 바윗길을 거쳤다가 완만한 수림 오솔길을 지나면서 들리는 차량 소음이 반갑다.


“대장이 잘 인도해줘서 수월했어.”

“모두 수고했어. 유능한 사병들을 부하로 둔 장교는 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


식당이 있는 도로에 내려서서 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도착하여 하이파이브하면서 서로의 수고로움을 거듭 격려하고는 곧바로 계곡 물가로 이동한다.


땀에 흥건히 젖은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풍덩, 물로 몸을 던지는 소리가 너무나도 흥겹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너무나 시원하다.



때 / 여름

곳 / 백운계곡 주차장 - 흥룡사 - 흥룡봉 - 도마치봉 - 삼각봉 - 백운산 - 광덕고개 - 광덕산 - 조경철

천문대 - 박달봉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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