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한참이나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왔는데도 사내는 자기가 표시해놓은 자리만 살피면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칼을 떨어뜨린 뱃전에 표시한 뒤 뒤늦게 다른 곳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흔히 뒷북친다는 말을 하는데 초나라 사내야말로 풍악놀이가 모두 끝난 뒤에 뒷북을 치는 격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찰금察今’ 편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배는 시대 흐름을 상징하고 물에 빠진 칼은 법과 제도를 비유한 것으로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예전의 법을 고수하려는 초나라를 비판한 일화이다. 세상 돌아가는 현실에 어둡다거나 융통성이 없어 낡은 구습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빗대 표현한다.
여람呂覽이라고도 하는 여씨춘추는 기원전 239년 진나라 재상인 여불위가 주도하여 만든 책으로 제자백가 중 잡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趙나라 출신의 거상이었던 여불위는 진晉나라 장양왕 때 승상에 재직했다. 장양왕이 죽은 후 태자 정政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으로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국시대 말엽, 여불위는 재상을 지내면서 3000여 명의 학자들을 모아 후대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여씨춘추를 편찬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