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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의 일렁임인가,
궁예의 울음인가, 명성산의 울림

경기도의 산 2

by 장순영

나라 잃은 궁예의 한을 달래주려는 양 눈물처럼 샘솟았다는

궁예약수는 극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어

천년수千年水라 칭하고 있다.

천 년간 눈물을 흘렸으니 동공은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붉게 그을린 단풍이 제 살 식히려 수면까지 길게 가지 늘어뜨린 산정호수의 정취는 달라진 게 없는데 다시 와 헤아리니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물안개 자욱했던 아침 호수, 호숫가 산책로를 걸으며 둘러보면 세월 흘렀어도 풋풋한 기억으로 되새겨지는 곳이다.


“아니 이렇게나 변했단 말인가?”


수면을 붉게 물들인 단풍나무가 멈춰 세우더니 물결에 일렁이며 인사를 건넨다.


“강산 두 번 지나 다시 만났으니 안 그렇겠나. 난 그렇다 치고 어쩜 그댄 더 젊어지는가? 가지도 튼실하고 더 붉어진 혈색이 보기 좋군.”


“허허! 난 자네와 달리 무디지 않은가 말일세. 무디니까 물가에 빗겨 섰어도 도대체 주름 하나 생기지 않더군.”

“하긴 사람 늙는 것만큼 빠르게 변하겠는가.”

image100.png 산행 전에 소양호를 둘러본다


무디고 경직된 듯하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울렁거리게 하고 극도의 초연 중에도 찾는 이를 휘감아 상념 젖게 하는 곳이다. 비탈진 물가에 곧추서지 못하고도 제 삶을 싱그럽게 성장시키는 처신을 우리네 사람들은 굴곡진 세상에서 그렇게 해낼 수 있을까. 골몰하게 거듭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다.

관개용 저수지로 조성한 인공호수이지만 세월 흘러 다시 찾았어도 엊그제 왔던 것처럼 정겹고 푸근하고 올곧은 곳이다. 시선에 박히는 주변마다 끈끈이 이어져 알알이 각인되는 산정호수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시게. 명색이 도읍 두 곳을 잇는 큰 산일세.”



더는 붓질 할 부분이 없는 완벽한 수채화


울음산이라고도 하는 명성산, 품에 안기듯 하늘거리는 억새 물결 능선을 물기 머금은 단풍의 배웅을 받으며 오르기 시작한다.

경기도 포천시 산정호수를 끼고 올라 정상에 닿으면 거긴 강원도 철원에 속한다. 양쪽으로 식당들이 늘어선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먹거리가 다양하다. 이 길을 통해 명성산 억새밭으로 향한다.

아직 이르다 싶었는데 계곡 초입부터 단풍이 물들고 있다. 초록을 바탕으로 주황과 빨강, 간간이 노랑을 덧칠하여 더는 붓질할 부분이 없는 완벽한 수채화다.


“가을이 온통 붉기만 하다면야…… 홍록이 어우러지니 단풍이 더 돋보이는 거지.”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로 맑은 계류 흐르고 초록과 다홍이 어우러져 이만한 가을 하모니가 또 있을까 싶다.


‘궁예의 울음이 폭포 되어 내리네.’


바위와 스킨십하며 찬찬히 물을 흘리는 등룡폭포 표시 팻말의 글이다. 눈물을 잔뜩 흘려 담을 이룬 걸 보니 신라의 왕자 태생인 궁예가 애처롭기 짝이 없다. 패자의 처절한 곡소리는 산행 중에도 계속 울려 퍼진다.

계곡이 끝나고 돌길을 지나 다다른 억새군락은 화전민 터였던 곳이다. 울음 터라고 적힌 팻말이 나무 둥지에 걸려있다. 1950년대까지 밭을 일구다가 화전민들이 떠나자 억새군락이 조성되었다고도 하고, 한국전쟁 중에 울창한 숲이 타버리면서 자연적으로 억새가 자라났다고도 한다.

마침 구름을 벗어난 태양이 환하게 비추자 억새밭은 은물결로 넘실댄다. 영남알프스 신불산이나 재약산의 억새평원처럼 광활하지는 않아도 고루고루 잘 다듬어 눈길 붙드는 억새 정원이다.

민둥산 풍광 (2).jpg 능선에서 보는 억새밭과 그 너머의 풍광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못 이겨 통곡하자 억새도 따라 울었다는 울음산은 마의태자 못지않게 궁예의 참담함이 곳곳에 서려있다. 후 고구려를 세워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승승장구 세력을 확장했다가 왕건에게 패해 도망쳤다는 패주골, 왕건 군사의 추적을 살피던 망무봉 등이 그곳이다.

이 산에 은거했다가 왕건과의 최후 격전에서 대패하여 온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명성산鳴聲山으로 불린다.


“그땐 안과도 없었을 텐데.”


궁예의 한은 조금 더 지나 약수터에도 생생하게 서려 있다. 궁예도 울고 궁예의 백성들도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을 게다. 나라 잃은 궁예의 한을 달래주려는 양 눈물처럼 샘솟았다는 궁예약수는 극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어 천년수千年水라 칭하고 있다. 천 년간 눈물을 흘렸으니 동공은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눈물 젖은 역사의 이어짐이라고나 할까. 명성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시선 머물면 산과 들이 맥맥히 이어지지만, 그 가운데쯤 평야 지대에서 남과 북으로 그 방향을 확연히 가르고 있다. 바로 국토를 둘로 쪼갠 분계선이다.

팔각정에 올라서도 펼쳐진 억새밭 너머로 서글픈 역사의 흔적들이 자꾸 들춰진다. 전쟁 전 38선 이북의 땅이었던 이곳에서 가을 억새의 흔들림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1년 후에 받는 편지’


팔각정 아래 명성산 표지석 옆에 빨간 우체통 하나가 세워져 있다. 1년간 발전적으로 변화된 삶을 모색하고 1년 후 다시금 반성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우체통의 의미를 해석하고도 1년 후에 생길 것만 같은 후회감이 두려워 차마 편지를 넣지 못한다.

우체통을 바라만 보다가 길게 펼쳐진 능선으로 높은 하늘과 엷은 구름을 얹고 걷는데 이만큼 세월 흐르기 전에 왔어야 할 곳이란 생각이 든다. 들를 곳 다 들르고 멀리 되돌아오느라 약속을 어긴 것 같은 기분이다.

고도를 높이며 또 다른 억새군락을 지나게 되는데 아직 은빛 치장 못 한 억새들은 휑해 보이는 게 아니라 뜨끈한 온천욕 후 갈아입을 설빔을 연상시킨다.

능란한 조경사의 손으로 숱한 세월 매만진 듯한 노송들은 세월 흐름이 연로年老의 과정이 아니라 연륜의 상징임을 보여준다. 젊음 충만했던 청년 머리는 눈꽃처럼 희끗희끗해졌지만 비탈길 비스듬히 기대서서도 튼실하기 그지없는 소나무 잔솔들은 여전히 푸름을 더한다. 자연 그대로인 곳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린 나무와 다듬어 심은 나무는 뿜어내는 생기도 다르고 향도 다르다. 인위적으로 가공한 품위가 자연 그대로의 멋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다.



승자는 신화를 만들되 패자는 우울한 야사를 지어낼 뿐


이 길, 삼각봉 가는 바윗길은 천손 만객 영접했어도 예의 윤기 번지르르한 웃음을 띄우고 있다. 주야를 내달려 일그러진 고달픔이 앙금처럼 고인 영혼인 걸 알아차려서일까. 나직이 속삭여 충고해준다.


“공수래 아니었던가. 번민을 지녔다는 건 이미 꽃 한 송이라도 피웠다는 증거 아니겠나?”


풍족하지 않은 건 흘러 넘 칠 일이 없음이요.


“공수거 아니겠는가. 무겁게 무얼 지니고 싶은 겐가?”


미련 남아있다는 건 지금도 저 아래 폭포수처럼 다 흘려보낼 수 있음이요, 평생 일군 텃밭에 비록 잡초만 허허롭더라도 다시 불 바람이 밀알 될 씨 뿌려줄 터이니 가라지 뽑다 보면 다시 수확할 일도 생기지 않겠는가.


“고맙구려. 티끌처럼 부유하는 일개 범부의 옷자락 붙들어가며 용기 돋워주니 말이요. 내 오래도록 기억하며 살아가는 지침으로 삼겠소이다.”


인위적으로 콘티 짜고 정성 들여 디스플레이 한들 시간 지나면 색 바래고 먼지 쌓이는 게 예사 건만 여기 명성산 능선은 그만한 풍우와 폭설 후에도 전혀 달라짐이 없다.

삼각봉 위로 명성산 정상과 궁예봉이 보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삼각봉 정상(해발 906m)도 우람하게 세워진 정상석 외엔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정상석 뒷면에 조선 시대 문인이자 명필인 봉래 양사언의 태산가泰山歌가 한자어로 새겨져 있다.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컫는 양사언은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청문회에서 이미 부정축재의 빌미를 제공해 임명된 자리마저 그저 지붕에 올라간 닭 바라보듯 침이나 삼켜야 하는 요즘의 실태와 견주게 되니 태산가가 한 번 더 읊조려진다. 상식을 벗어난 윤리, 몰염치한 양심, 거짓과 속임수…… 지켜야 할 것보다 버려야 할 것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 아니던가.

삼각봉에서 명성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포천과 철원의 경계 표지판이 있다. 경기도에서 강원도 철원으로 넘어서게 된다. 20년 전 삼각봉까지 왔다가 지금 제3코스라고 일컫는 산안고개로 바로 내려갔었다. 지금도 비탈 심하고 거칠었던 그때의 내리막길이 어렴풋 떠오른다.


“그땐 여기가 명성산 정상인 줄 알았었지요.”

“오늘은 제대로 들렀다가 조심해서 내려가시게.”


노파심 난 옛 인연, 푸근한 우정 베풀며 떠나는 이 등 보듬어준다.


“혹여 지녀 부담스럽거들랑 저 호수에 마저 뛰어놓고 가시게나.”


자신을 가둬놓은 원圓을 지우고 원怨도 없애고 원願없이 살라한다. 세상 속박에 갇히지 말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존재하라 한다.


“고맙습니다. 바람 불면 나부끼다 흩어지고 노을 지면 시들해질 내 등짐 그대 덕에 충분히 내려놓고 갑니다.”


흐르면 막지 말라 하고, 막힐 것 같으면 뚫어 자연의 유연함을 경직시키지 말라고 덧붙여 일러주니 감사하다. 저 아래 팔고八苦의 심연, 미로의 공간, 무량無量하게 헤매며 나약하기 그지없는 무력無力과 방황의 혼돈 속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가르침이다.

해발 923m 명성산 정상은 삼각봉만큼 확 트인 조망권이 있지는 않다. 그래도 하늘 공간 틈새로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흐릿하게 대성산까지 담을 수 있다. 그 뒤로 북한지역은 뿌연 장막을 치고 있다.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와 산안고개 방향으로 하산한다. 뒤돌아 올려다보면 삼각봉이 보이고 반대편으로 궁예봉도 보인다. 비교적 편안한 하산로는 계곡 합수점까지 이어지면서 단풍 곱게 물들이며 아래로 뻗어가는 중이다.

산안고개 안부에서 600m 비켜선 궁예봉으로 틀어 올라간다. 바위에 길게 늘어진 밧줄이 편한 길이 아니란 걸 대변한다. 궁예인들 편한 길을 택해 도망쳤겠는가. 궁예의 입장이 되어 바윗길을 오르니 측은지심이 생긴다.

궁예봉(해발 823m)에 세워진 정상 표지목이 썰렁했는지 왕수 산악회라는 곳에서 아담한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봉우리 아래로 층층 쌓은 듯한 바위가 보이는데 궁예의 침전이라고들 부른다.


“잠자리인들 편할 리 없었겠지.”


쫓기고 또 쫓기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삭은 땀 흘리며 깼을 층층 바위를 안쓰럽게 바라보고는 등을 돌린다. 되돌아온 산안고개 안부 갈림길에서 내리막 계곡은 더욱 사납고 미끄럽다. 몇 차례 마른 계곡을 건너다가 명성산 정상 직전의 산안고개에서 내려오는 하산로와 만난다. 이후 하산 내리막은 완만한 편이다.

양봉장을 지나 펜션 지역을 통과하여 산정호수 상류에 이른다. 호수 둘레길을 걷노라니 가을을 담은 수면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주변 상가에 하나씩 둘씩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산정호수의 진득한 낭만이 피어날 가을 저녁 무렵에도 궁예의 울음은 그치지 않고 있다. 천년 신라를 부정하고 부처를 자처하며 동아시아 이상 국가를 염원했던 궁예는 우리 역사상 단 한 명의 왕으로 끝난 유일한 왕조 국가, 태봉의 왕이었다. 승자는 신화를 만들되 패자는 우울한 야사를 지어낼 뿐이다.



때 / 초가을

곳 / 산정호수 관광단지 - 등산로가 든 - 비선폭포 - 등룡폭포 - 억새군락 - 천년 약수 - 팔각정 - 삼각봉 - 명성산 - 산안고개 안부 - 궁예봉 - 산안고개 안부 - 산정호수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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