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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제2 고봉 명지산에서
용추구곡의 주봉 연인산으로

경기도의 산 1

by 장순영

올라와 둘러보면 명지산은 겨우 한 번의 산행으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워낙 넓고 깊은 산인지라 가는 길만 가서는

명지산의 실체에 접근조차 못 한다.



화악산에 이은 경기 두 번째 고산, 명지산明智山.

가평 익근리 방면의 들머리를 지나면 일주문을 통과해 바로 승천사昇天寺가 있다. 명지산을 오른다는 건 승천이나 매한가지이다.

승천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환하게 미소 짓는 들꽃들, 뙤약볕 버거운지 무릎 밑으로 느릿하게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 청정 옥수 명지계곡의 낙수청음落水淸音에 귀 기울이며 유유자적 오르다 보니…… 과연 하늘을 오르는 기분이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그 끝이 닿지 않는 명지폭포


귀목마을에서 귀목 고개를 거쳐 오를 때와 달리 걸음을 붙잡는 멋진 폭포를 접하게 된다. 등산로에서 나무계단을 딛고 내려서자 숨은 비경이 입을 벌리게 한다. 명지폭포의 웅장한 굉음에 일시적으로 사고가 멈춘 느낌을 받는다.

명지폭포의 물줄기와 청록담이 속까지 청량하게 해준다


7.8m 높이에서 내리꽂는 폭포수가 하얗게 거품을 일으킨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옥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그 끝이 닿지 않는다니 청록빛깔 수면에 눈길만 담가도 더위가 가신다.

속까지 비칠 듯한 청담淸潭에서 어찌 잡념이 생길 수 있겠으며 잠시라도 허욕이 머물 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을 욕구의 찌꺼기를 씻어내고자 머리끝에서 거꾸로 목까지 담근다. 폭포수가 흐르는 계곡 찬물에 머리를 담갔다가 꺼내자 단전에 쌓인 녹이 말끔하게 벗겨지는 기분이다.

속을 정화하고 급경사 나무계단을 60여m 올라서면 다시 숲길이다. 걸음을 내딛을수록 경기도 내에서 손꼽는 심산유곡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뜨거운 뙤약볕을 우거진 수림이 가려주어 산림욕을 하게 되고 물 흐름 이어지니 한여름 홀로 산행이지만 큰 위안이다.

계곡 상류 지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화채바위 쪽으로 통나무계단을 오르자 돌길, 바윗길과 계단이 반복되면서 점점 고도가 높아진다. 이마에서 솟은 땀이 뺨을 흘러 턱까지 주르륵 흘러내린다. 며느리밥풀꽃, 곰취가 흔하게 눈에 띄고 경사면에는 간간이 단풍취도 보인다. 한여름의 묵직한 체중을 덜어주는 가붓한 모습들이다.

1079m봉에서 숨 돌리며 둘러보는 주변 경관은 온통 짙푸른 정글이다. 전면에 화악산이 마주하여 버티고 서서 1인자임을 과시한다. 그걸 인정하듯 길게 이어진 한북정맥 고봉들이 화악산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익근리 들머리에 들어섰을 때처럼 정상인 명지1봉(해발 1267m)에 올라섰어도 인기척 하나 없다. 정상석만 덩그러니 빈자리를 내어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근처 화악산이랑 연인산엔 잘도 오더니만 나한텐 어렵게 발걸음 하는군.”

“이른 새벽부터 네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왔습니다. 너그러이 용서 바랍니다.”

“사람들은 1인자만 기억한다지. 내 벼슬이 도립공원에도 끼지 못하는 군립공원에 불과하고 경기도 넘버 투에 머무니 허투루 보였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노여움 푸시길.”


불볕더위에 그대로 방치된 펑퍼짐한 산정이 왠지 쓸쓸하다고 느낌 받았나 보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 때보다 뿌듯했는데 첫 만남에 회초리를 맞는다.

어릴 적 먹지 않고 아껴두었던 초콜릿을 어느 날 꺼내먹으려고 서랍을 열었는데 속에서 녹아버렸다. 명지산이 그랬다. 시간 넉넉하고 좋은 날에 충분히 즐기려다가 때를 놓쳐 늦어진 곳이다. 많이 물렁물렁해진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으며 백운산, 광덕산, 국망봉 등 두툼한 마루금을 둘러본다.

가평군 북면과 조종면에 걸쳐 광활하게 몸집 일으킨 명지산을 중심으로 인근 포천시 일동면 일원은 희귀곤충과 식물이 다양하게 분포되어있어 1993년 조종천 상류·명지산·청계산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바 있다.

거대한 산악지대에는 무어든 튼실하게 자생할 것만 같다. 화악산이나 용문산처럼 군사시설도 없고, 너저분하게 송신탑이 늘어서 있지도 않아 수백 년 전의 생태계를 그대로 옮겨놓아도 껄끄러움 없이 보존될 것만 같다. 인간이 생태계를 깨뜨리고 불편함을 겪자 뒤늦게 그 균형을 맞추려 인위적으로 개체 수를 조절하고 있지 않던가.


“보다시피 자연은 그 상태 그대로일 때 최상의 질서이자 완벽한 시스템일세.”

“맞습니다. 사람의 결핍을 채워주고 왜소함을 가려주는 것은 오로지 자연뿐입니다. 여기서 새삼 느끼게 되는군요.”


그랬다. 세상사의 불안과 부정과 모순과 분열이 없는 곳은 오직 자연뿐이다. 산을 사랑하게 될 즈음 산의 신음을 듣게 되었다. 산이 아파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산은 여하한 동식물의 존재감과 하찮게 여겨왔던 풀뿌리조차 귀하다는 사실, 생명 존중의 철학을 익히게 해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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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20117_132319283_26 (2).jpg 들꽃은 뜰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그 자리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게 자연이다


“1봉 어르신, 청정자연에서 오래도록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드리고 돌아서는데 “내 괜한 노망 부렸나 보네. 맘 푸시고 안산 하시게나. 저쪽으로 가거든 내 아우들한테 안부 좀 전해주시고.” 하며 환히 웃어 배웅한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가평의 8경 중 명지 단풍이 제4경이라 하니 아마도 올해나 내년 가을쯤엔 다시 방문하게 될 것 같다.


고산장로 경기 제2 고봉

예 오려 얼마나 별렀던가

고행 벗 삼은 나 홀로 산행

태양에 젖고 초록에 젖어

산등성이 굽이쳐 흐르는

최고봉 올랐더니

오랜 시간 기다렸단 듯

옛 벗처럼 반겨주누나


명지 2봉(해발 1260.2m)까지 1.2km, 형님 안부 전해주러 잰걸음에 달려간다. 여기도 진초록 활엽수들이 에워쌌을 뿐 쓸쓸함이 묻어난다. 막 건너온 1봉이 손을 흔든다.


“마주 보이는 곳에 계셨군요. 형님이 안부 전해달랍디다.”

“잘 계시던가?”

“살짝 노망기가…… 있으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혈압은 정상입니다만.”


형님한테 맞은 회초리를 동생한테 분풀이하고 3봉으로 방향을 튼다.


“우리 막내 만나거든 제발 우리 형제에 대한 언급은 말아주시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제가 입이 가벼워서요.”


여기저기 흩어져 거주하는 삼형제한테 우환만 만든다고 생각했는지 2봉이 오지랖을 자제시킨다. 좁은 능선길이지만 수림 사이로 주변의 산군들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어 좋다.


“예전에 봤을 땐 못 느꼈는데 참 심술궂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용문산 가섭봉이 한마디 거든다.


“다음에 가거들랑 제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지요.”


명지 3봉(해발 1199m)에는 정상석도 없이 덩그러니 이정목만 세워져 있다. 1봉과 2봉에 비해 가시권이 넓어 조망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다.


“혹시 우리 형님들 만나고 오는 길인가?”

“네, 큰형님은 잘 계십니다.”

“둘째 형님은?”

“글쎄요. 혈압은 괜찮아 보이시는데 더위 잡수셔서 그런지 총기를 잃으신 것도 같고…….”


다음에 다시 명지산에 오면 무사 할는지 모르겠다. 명지산은 이들 세 형제. 1봉, 2봉, 3봉을 중심으로 사향봉, 백둔봉, 귀목봉으로 갈라지고 다시 지금부터 가게 될 연인산까지 뻗어 육중한 산세에 산 아래로 계곡마다 유리알처럼 맑은 옥류를 흘러내린다.


“세 분 모두 강건하세요. 반가움에 응석 좀 부려봤습니다. 곧 가까운 벗들과 함께 다시 오겠습니다.”


올라와 둘러보면 명지산은 겨우 한 번의 산행으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워낙 넓고 깊은 산인지라 가는 길만 가서는 명지산의 실체에 접근조차 못 한다. 어쩌겠는가, 오가는 길 불편하지만, 다시 날 잡아 길 다시 골라 계절 바꿔가며 찾아올 수밖에.



국내 최대의 잣나무군락지, 연인산으로


“여긴 마치 연하천에 온 기분이 드는군.”


산나리, 앵초 등 들꽃 만발한 오솔 숲길을 커다란 정원 산책하듯 내려서며 걷다가 들풀 빽빽한 방화선 풀숲 지대를 빠져나오면 명지산과 연인산의 갈림길이자 백둔리 마을로 하산하는 삼거리 아재비고개에 이른다.

여기서 지리산 연하천을 연상한 건 꼭 이 길이 거기와 비슷해서는 아닐 것이다. 긴 길을 지나와 한고비 멈춰 쉬는 구간이라 그렇겠지만 산길을 걷다 보면 종종 어딘가를 떠올리며 마치 그 길에 있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연인산 정상까지 3.3km. 갈증도 씻고 잠깐 휴식도 취하다가 일어선다.

완만한 육산이라 다시 오르는 데도 큰 힘을 소모하지 않게 한다. 한 시간 남짓 걸어 연인산戀人山 정상(해발 1068m)에 도착하니 커다란 정상석에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경기도 도립공원 연인산은 길수라는 청년과 소정이라는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설화로 전하며 그 명칭을 브랜드화하였는데 오래도록 화전민들의 애환을 간직한 채 가시덤불로 덮여있던 이름 없는 산이었다. 그런 연인산이 낡은 저고리를 벗고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1999년 3월 가평군 지명위원회에서 공모를 통해 연인산이라고 명명했고 2017년 국가지명위원회에서 공식지명으로 확정하여 어엿한 이름을 갖게 되면서 연인산은 일약 경기 북부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거듭났다.

전국 잣 산출량의 30% 이상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잣나무군락지가 이곳에 있다. 잣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기관지천식과 폐결핵 치료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아토피 힐링캠프까지 운영되니 이래저래 연인산은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에 비유해도 될법하다.

연인산은 동으로 장수봉, 서로 우정봉, 남으로 매봉과 칼봉이 이곳에서 발원한 용추계곡을 감싸고 있는 천혜의 자연공원이자 휴양객들이 북적이는 여름철 명소이다.

흰 구름 아래로 막 지나온 산, 연인산의 모산이라 할 수 있는 명지산이 귀목봉과 함께 멀지 않고 남으로 운악산, 서쪽으로 청계산 줄기가 우람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어 가평 일대는 어느 산에 올라서서 둘러보건 첩첩이 깊은 산, 깊은 골이다.

주변 조망을 즐기다가 우정능선을 택해 걷는다. 세 번째 연인산행을 오늘처럼 한여름에 택한 건 수도권의 대표적 청정계곡인 용추구곡으로의 하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여름 산행의 끝에는 물이 있어야 제격이다. 산에서 내려와 풍부하고 맑은 물을 접했을 때의 개운함을 길게 말해 무엇하랴.

등산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좁은 소로 숲길에 멈춰 서서 비켜주기를 거듭하게 된다. 헬기장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연인산을 저만치 떨어뜨리고 다시 진행하여 우정봉(해발 910m)에 닿는다. 정상에서 2.3km 지나온 거리이다.

계속 부드러운 숲길이 이어진다. 왼쪽으로 소나무 숲, 오른쪽으로는 참나무 숲이다. 침엽수와 활엽수림 지대를 양옆으로 끼고 걸어 우정고개에 내려선다. 전패고개라고 불렸던 곳인데 모조리 패한다는 의미를 풍겨 우정고개로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여러 갈림길 중 매봉으로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른 데다 사람들도, 들꽃도 없이 한적하기는 한데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가려진 수림 사이로 얼핏 보이는 깃대봉과 약수봉이 한잔의 이온 음료처럼 상큼함을 느끼게 해준다.

매봉(해발 929m)은 조망이 가려진 밀폐구역이라 바로 회목고개로 내려선다. 올라온 만큼 급경사의 내리막이다. 해발 700m 지점의 회목고개에서 다시 고도를 올려 막바지 에너지를 모두 쏟아낸다.

매봉으로 올라가며 수풀 사이로 깃대봉과 약수봉을 본다


해발 899.8m 칼봉산이라고 정상석이 있지만, 이제는 연인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인 칼봉이다. 칼봉도 좁은 터에 잡목 우거져 그다지 매력을 주지 못한다. 아니 매력을 느끼기엔 많이 지친 듯싶다. 겨울에 왔을 때도 땀깨나 흘렸던 곳이니 힘이 떨어질 법도 하다. 남은 식수로 갈증을 씻고 바로 하산한다.

이정표의 경반분교, 물안골이라 적힌 방향으로 길을 잡아 정글처럼 인적 없고 더욱 좁아진 등로를 내려서서 용추계곡 상류에 이르렀다. 물을 대하자마자 티셔츠까지 벗어 계곡물에 머리부터 깊이 담그자 소진된 기운이 되돌아오는 것 같다.

가평 8경 중 제1경인 용추계곡은 연인산 칼봉으로부터 내려앉아 그럴듯한 침식을 이루며 끊임없이 맑은 계류를 흘려내린다.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아홉 구비 그림 같은 경치를 수놓았다는 유래를 간직한 용추구곡. 5m 높이의 용추폭포 와룡추(제1곡)부터 소바위 부근 무송암(제2곡), 중산마을 앞 너른 개울 탁영뢰(제3곡), 너럭바위 지대 고슬탄(제4곡), 일사대(제5곡), 추월담(제6곡), 청풍협(제7곡), 귀유연(제8곡), 농원계(제9곡)의 절경을 일컫는다.

옛날 옥황상제를 모시던 거북이가 용추계곡의 경치에 반해 내려와 놀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그대로 굳어 버렸다는 바위 옆에서 하얀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깊은 소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렸는데 이곳이 8곡인 상류의 귀유연이다.

귀유연도 깊이를 가늠키 어려울 장도로 물이 짙다


“옥황상제를 모시느니 여기서 바위가 되어 물과 어우러지는 게 더 행복하다네.”


제 맘에 안 들면 무소불위의 힘을 마구 남용하는 옥황상제 옆에서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그래서 선녀들도 지상에 내려왔다가 귀천하지 않고 나무꾼들과 사는 거 아니겠나.”

“아무렴, 누군들 덕이 부족한 이 옆에 붙어있으려고 하겠는가.”


바위가 된 거북이와 옥황상제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다가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충분히 땀을 식히고 다시 콘크리트 길을 걸어 승안리 검봉산 펜션단지에 도착하면서 길고도 무더운 산행에 막을 내리게 된다.

이미 어둠이 가라앉아 계곡 입구부터는 불빛이 환하다. 먼저 떠서 빛을 발하는 몇 점 작은 별들이 수고했다면서 반짝거린다.



때 / 여름

곳 / 익근리 탐방안내소 - 승천사 - 명지폭포 - 갈림길 - 화채봉 - 명지1봉 - 명지2봉 - 명지3봉 - 아재비고개 - 연인산 - 우정능선 - 우정봉 - 매봉 - 회목고개 - 칼봉 - 용추계곡 - 용추계곡 주차장





https://www.youtube.com/watch?v=tQ7Zx1T-1rs&t=4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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