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무학교 학습일지
2024년 4월 28일. 오늘은 일요일, 화창한 봄날입니다. 한낮의 기온은 28도를 오르내려 마치 여름 같습니다. 오늘 토종과일나무학교에서 실시한 창덕궁 나무 답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조금 일찍 도착하여 1시간 정도 창경궁을 둘러봤습니다. 7년 전에 와보고 오랜만에 다시 왔습니다. 입장료는 천 원입니다. 서양인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참으로 달라진 모습입니다. 궁궐 안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앞에서 멋진 한복을 입은 남녀 한쌍이 걷고 있습니다. 동궁에서 생활하는 왕세자와 세자비의 모습 같습니다. 잠시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한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양화당 쪽에서 전통 복장을 한 아가씨들 10여 명이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다가가 물었습니다.
"궁녀들이신가요, 아니면 공주님들이신가요?"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습니다.
"저희들은 자원봉사자들인데요?"
그러고 보니 임시로 관람객들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전통문화 체험장입니다. 한쪽에서 투전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복장은 무슨 복장인가요?"
"화원 복장이래요."
화원은 궁정에서 그림을 그리는 관리입니다. 파란 색깔의 상의 밑으로 하얀색 소매가 보입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머리칼이 떨어지면 안 되니 두건을 쓴 모양입니다. 이쁜 아가씨들에게 이왕이면 공주님 복장을 입히지... 하고 돌아서는데 여기저기 곳곳에 공주님들이 돌아다닙니다. 한복을 입고 입장하면 입장료가 공짜이니 여행객들이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고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머리가 노란색에 빼어난 미모의 서양 공주님도 있고, 영화배우 같은 서양 왕자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입니다. 앞으로 조금 있으며 K-드라마에 금발의 서양 출신 왕자님이나 푸른 눈의 대자대비, 궁녀들이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나무에 관심이 없어서 창경궁이나 창덕궁에 들어가도 건물들만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릅니다. 높이 자란 소나무며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뽕나무, 은행나무도 있고 부부처럼 서로의 몸을 감싸고 있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도 있습니다. 숲속 사이사이로 진달래가 피어있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사진도 찍습니다. 옥천교 근방에는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도 있다고 하는데 나무에 대해서 잘 모르고 누가 알려주지 않으니 어느 나무가 어느 나무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온실 쪽으로 가봤습니다. 옛날에는 식물원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바깥에 분재들이 많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안에까지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무슨 나무들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다음에 다시 와봐야겠습니다.
돌아오는데 모감주나무를 2그루 발견했습니다. 높이 솟은 소나무들 사이에서 햇빛을 받으려고 길 쪽으로 빼꼼히 가지를 뻗었습니다. 4m 정도 되는 높이지만 아직 어린 나무 같습니다. 줄기 굵기가 어른 팔 두께 정도됩니다. 작년에 농부학교 다닐 때 모감주나무에 대해서 알게 되어 관심이 생겼습니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나무이고 노란색으로 열리는 꽃과 열매가 특히 멋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묘목을 구해서 시골집 주위에 심었습니다. 한두 그루만 사서 심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파는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10그루나 사다가 여기저기 심었습니다. 금년 봄에 확인해 보니 5그루 정도가 살아서 이파리가 났습니다. 그 나무들이 커나가는 모습을 미리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통명전 쪽으로 올라가 함양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넘어갔습니다. 통명전은 왕비의 침실이 있던 건물입니다. 창덕궁 입장료는 3천 원입니다. 12시경에 선정각 부근에서 토종과일나무학교 장영란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과일나무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부근에는 매화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등이 있었습니다. 살구나무와 감나무는 이미 클 대로 커서 높이가 20m는 되어 보였습니다. 이 정도면 그 열매를 따기는 힘듭니다. 개인이 자기 집이나 과수원에서 이렇게 키울 수는 없습니다. 이들 나무는 그냥 놔두면 이렇게 커버린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와 같습니다. 개인 과수원에서는 이렇게 크지 않도록 잘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서 낙선재 앞으로 가서 그곳의 나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키 큰 소나무들과 철쭉, 진달래 사이사이에 매화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가 있습니다. 장영란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창덕궁에 자두나무는 있는데 아쉽게도 오얏나무는 없습니다. 저는 앵두나무에 관심이 있어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제 밭에 앵두나무 묘목을 여러 그루 심었는데 모두 죽었습니다. 이곳의 앵두나무를 보니 땅에서 여러 줄기가 올라와 마치 관목처럼 자랐습니다. 키는 2m가 못됩니다. 옆에 또 다른 앵두나무가 있는데 모양은 비슷합니다. 앵두나무는 그렇게 자라는 모양입니다. 그 점은 보리수와 비슷합니다.
주변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작약도 많습니다. 그 옆에는 모란도 있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으로 모란꽃을 보았습니다. 풍성한 꽃의 모습이 하얀 한복을 차려입은 후덕한 여성 같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길거리에서 노란 꽃을 보고 그 이름이 항상 궁금했던 황매화를 보았습니다. 그저 꽃이 좀 이쁜 잡초인 줄 알았는데 황매화라니 무시 못할 이름입니다. 죄송스럽게도 그동안 몰라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장미가 곧 피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장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튜립도 없습니다. 역시 조선의 왕궁입니다. 대신 꽃무릇이 한쪽에서 무더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수선화는 온실 안에 있다고 합니다.
1시에 창덕궁 후원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후원 입장은 별도로 5천원이 필요합니다. 후원은 옛날에 '비원'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이곳은 그렇게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니, 요즘은 비원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주1) 후원 투어는 100명이 넘는 관람자가 안내자를 따라가면서 설명을 듣는 방식이었습니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이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안내자는 정조 임금과 숙종 임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이며 후원 소개를 이어갔습니다.
정조 임금은 이 후원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이곳 후원을 좋아했고, 즉위한 뒤에는 학문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이곳에 설치하고, 숙종 때 처음 만든 애련정을 고쳐 짓고 부용정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동안 규장각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 유명한 규장각이 이렇게 경치좋은 곳에 있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정조는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좋아하고 활쏘기도 잘했는데 이 후원에 그런 정조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술도 못하고 활쏘기도 못한 정약용과 관련된 정조 임금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후원의 가장 깊은 곳, 즉 창경궁과 경계 지점에 있는 존덕정에도 들려 정조 임금이 쓴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현판도 보았습니다. 숙종 임금은 드라마에서 여성을 좋아한 임금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사실은 정치도 잘하고 업적도 많은 임금이라는 소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나무와 관련해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후원에 들어서면서 나무들이 많아지고 나무들 키도 많이 컸지만 일본의 숲과 비교하면 그렇게 울창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은, 조금은 가벼운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일본에서 명치신궁과 같은 곳을 가보면 입구부터 웅장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한 여름에도 으스스할 정도로 음침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어떤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명치신궁과 창경궁 후원을 비교하는 것은 좀 엉뚱하기도 하지만 일본의 숲은 대개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일본은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삼나무가 많은데 수령이 수천 년에 달하고 그 크기가 거대합니다. 편백나무도 많은데 키가 큰 경우 50m, 60m에 이르고 침엽수 교목이기 때문에 그 밑에 서면 하늘을 볼 수도 없고 햇빛의 따뜻한 온기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나무가 밀집해 있는 궁궐이나 사원은 으스스하고 어둡습니다. 참나무과의 활엽교목인 너도밤나무도 많습니다. 유럽에도 이 나무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이 나무는 그늘을 좋아하고 그래서 음수이며, 수백 년간 사는 나무이고 거목으로 자랍니다. 창경궁 후원에도 키 큰 소나무가 많고 키가 유독 큰 나무들도 적지 않지만 나무들 사이로 밝은 빛이 내려옵니다. 그래서 나무들이 많아도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이 때문에 후원에서 듣는 임금들의 이야기가 크게 무겁거나 근엄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창덕궁의 건물들과도 같습니다. 낙엽 활엽수가 만들어낸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원 곳곳에 있는 단풍나무를 보면 역시 이곳은 종교적인 엄숙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가을에 단풍들 때 또 와봐야겠습니다.
창덕궁 답사가 끝날 즈음에 회화나무와 향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곳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향나무는 과일나무와 함께 키우면 안된다고 합니다. 과일나무를 괴롭히는 온갖 벌레들이 그 향나무를 숙주 삼아 번식한다고 합니다. 제 텃밭 옆에도 향나무 같이 생긴 작은 나무가 있는데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창덕궁 안 곳곳에 벌써 벌레 피해를 입어,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보입니다.
창덕궁을 나오면서 연경당의 노쇠해 가는 돌배나무를 못내 잊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나무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창덕궁 옆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시민센터> 회의실에서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으면서도 나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직접 키운 토종 귤나무 열매를 나누어 먹고 그 안에 있는 씨앗을 나누어 갖는 나무 사랑꾼들,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한 하루였습니다.
주1) 김정봉, 「창덕궁 후원은 비원이 아니다 - 창덕궁 후원에서 엿보는 한국의 정원」, <오마이뉴스>, 200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