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의 생애와 사상
이탁오(李卓吾, 1527년∼1602년)는 명나라 말기에 복건성(福建省, 푸젠성)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晉江縣, 현재의 천주시泉州市 일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주시는 원나라 때 아랍, 인도 등지와 연결된 해외 무역의 거점이었지요. 이 때문에 그곳에는 회교(이슬람) 신도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탁오의 친척 중에는 이런 회교도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탁오 자신도 이슬람교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성격은 매우 도전적이며 전투적이었습니다. 기행을 좋아하고 반유교적인 발언을 자주 하여 당시 명나라 시대에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물론 보수적인 유학자들에게는 얄미운 존재였지요. 그는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을 존중하고 왕기(王畿)를 높이 존경하였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진실한 마음이라고 하는 동심설(童心說)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탁오는 1547년 21세 때 6살 어린 황씨의 딸 황의인과 결혼했습니다. 5년 뒤 26살 때 향시에 참가하여 합격하였는데, 30세 때 하남성(河南省, 허난성) 휘현(輝縣)의 현학(縣學)의 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34세 때에는 남경 국자감 교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이때 그는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고향에서는 왜구가 날뛰어서 밤낮으로 언덕에 올라가 성을 수비했습니다. 결국 3년 상을 마치고 그는 고향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온 가족 30여 명을 데리고 북경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즈음에 그는 양명학과 불교를 접했습니다. 당시 곧바로 자리가 나지 않아 10개월 정도 북경에서 서당을 열어 생계를 유지한 뒤 국자감 박사(國子監博士)의 직함을 받아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5년 정도 북경에 체재하였지요.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습니다. 조부상의 연락을 받은 날 둘째 아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인 공약곡은 이 소식을 듣고 “아아! 인생이 이토록 괴로운 것이란 말인가! 그 누가 벼슬살이는 즐겁다 했는가? 거사(이탁오)처럼 벼슬살이한다면 진실로 괴롭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공약곡이 조문을 가서 이탁오를 만나보니 그 모습이 평상시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1570년, 44세 때는 이탁오는 남경 형부주사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였습니다. 이즈음부터 그는 강학(講學)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왕용계(王龍溪), 나근계(羅近溪) 등 양명학파의 대가들과 교류하였습니다. 50세 때는 운남성 요안부의 지부(知府)로 발령을 받아 취임하였으며, 거기여 4년간 관직 생활을 하다, 54세가 되던 해에 관직을 은퇴하고 집필과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