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자와 반잔 - 양명학 실천자의 고달픔

일본양명학 #4 구마자와 반잔

by 임태홍

오미의 성인을 만나다


구마자와 반잔(熊沢蕃山, 1619~1691)은 교토 출신으로 나중에 미토번의 무사인 외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신분을 상속받아 그 자신도 무사계급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덕분에 16살 때부터 오카야마번(岡山藩)의 하급 관리가 되어 일했습니다. 오카야마는 지금의 고베시와 히로시마 사이에 있는 곳으로 반잔의 스승 나카에 토쥬(中江藤樹)가 살던 오미(近江, 지금의 시가현)에서 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입니다.


19살쯤 되었을 때 반잔은 일하던 곳을 떠나 동쪽을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며칠에 걸쳐 고베와 교토를 지나 비파호의 서쪽 산 아래 있는 오미까지 가서 그곳에서 하루를 묶게 되었습니다. 얇은 칸막이로 되어 있는 시골 여관의 옆방에서 사무라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반잔이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 사무라이가 교토에 출장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큰돈을 바꿔 말에 싣고 다시 돌아오는 길입니다. 평소라면 돈을 품속에 넣은 채로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평소 습관과는 달리 빌린 말의 안장에 돈을 담은 자루를 묶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한 뒤 그것을 깜빡 잊고 마부와 함께 말을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부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설령 그 마부를 찾더라도 그 돈을 이미 다 써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군에게 용서 받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번주의 측근 가신과 자신의 친족들에게 편지를 쓴 뒤에 자결을 결심했습니다. 사무라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명예로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할복자살입니다. 한밤중에 한창 고통스러운 고뇌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숙소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자가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돈을 가지고 가버린 그 마부입니다. 그는 사무라이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습니다.


"사무라이님, 말 안장에다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집으로 돌아가서야 눈에 띄어 돌려드리려고 곧장 달려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사무라이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조금 있다 정신을 차린 사무라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대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이 돈의 1/4을 주고 싶다. 정말 내 생명의 부모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러나 마부는 자신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마부가 계속 거절을 해서 할 수 없이 사무라이는 짚신 값이라고 겨우 몇 푼만 건네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궁금해서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욕심이 없고 정직하고 성실한가? 부디 그 이유를 들려주면 고맙겠다. 요즘 같은 이런 세상에 당신처럼 정직한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마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사는 오가와(小川) 마을에 나카에 토쥬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 배웁니다. 스승님은 이익을 올리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정직하게 올바른 길, 인간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사무라이들이 옆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몰래 듣고 있던 반잔은 그자리에서 무릅을 탁 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찾고 있던 성인이시다. 내일 바로 찾아뵙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다음날 토쥬를 직접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우치무라 간조가 지은 『대표적 일본인』(조양욱역, 기파랑, 2011, 172-175쪽)에 나오는 에피소트입니다. 반잔이 토쥬에게 입문한 때는 그 나이 23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반잔은 토쥬에게서 『효경』과 『대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후 3년간 글을 보지 않고 심법(心法)을 단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반잔은 번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경험하면서 현실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정치, 경제 등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안했습니다.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신도와 유교 합일론을 주장하고 불교를 배척했습니다.



태허 - 천하 만물은 하나다


반잔도 스승 토쥬처럼 『효경』에 관심이 많았으며 효도를 중시하였습니다.(주1) 또 그도 역시 태허(太虛)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북송의 철학자 장재가 제시한 태허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천지만물은 모두 태허에서 생성된다. 이는 세상 모든 존재는 모두 연속되어 하나로 맺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통치자의 신분, 직분을 받은 자는 인민생활을 풍족하게 해야 함을 명심하고 의지할 곳 없는 거지 같은 사람을 먼저 구제해야 한다. 나라에 한 사람이라도 춥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대화서명(大和西銘)』)(주3)


경세가(經世家)로서 그는 태허를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천지 만물 모든 것이 태허에서 나왔으므로 천지만물은 하나로 맺어져 있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자신의 동포 형제, 즉 가족 모두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잘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이 말한 '만물일체의 인(仁)'인데, 그는 또 이렇게 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만물일체라 함은 천지만물이 모두 태허라는 하나의 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자(仁者)는 이유 없이 불필요하게 풀, 나무를 베거나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 초목이 강한 햇볕에 시드는 것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역으로 비 온 뒤 생기를 찾아 번성하면 보고 기쁜 기분이 되는 것도 만물이 모두 일체로 맺어져 있다는 증거이다.(중략) 내 마음은 곧 태허다. 천지만물의 이 세계도 내 마음속에 있다.”(『집의화서』)


그는 사람의 마음은 소리도 냄새도 형체도 색깔도 없으며, 만물은 무에서 생긴다고 보고, 그것이 허무(虛無, 태허의 무)라고 하였습니다. 즉 태허의 무심한 상태를 허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허무는 불가와 도가에서 말하는 허무와는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불가와 도가의 허무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주2) 마음도 들어 있지 않은 무(無)의 상태 그것이 태허라는 것입니다.


반잔의 스승 토쥬는 양명학을 자기 수양의 공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반잔은 실질적이고 현실 개혁적이며, 사회·정치·경제 분야에 적용하는 쪽으로 활용했습니다.(주4) 뿐만 아니라 토쥬의 태허개념이 윤리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었던 것에 반하여 반잔은 태허를 경세적 실천 사상과 밀접한 관련지어 해석했습니다. 태허 사상은 그가 제시한 경세사상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주5) 반잔의 이러한 태허를 말할 때 스승과 달리 상제신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반잔이 설명하는 태허는 상제신과의 관련성이 불분명합니다. 스승 토쥬에게서 보이는 ‘인격신적인 황상제에 대한 종교적 신앙의 강렬함’(주6)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다. 예의가 갖춰지지 않은 옛날에도 신명(神明, 신이나 귀신)의 덕과 권위가 엄격하였다.'라고 설명하고 '나의 정신은 천신과 동일하다. 인의예지는 천신의 덕이다'라고 인간의 정신(마음)을 신과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집의화서』권2) 양명학에서 태허는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마음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역시 신으로 해석가능한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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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구마자와 반잔도 효경에 대한 주석서 『孝經小解』가 있다.

주2) 구마자와 반잔, 「집의화서」, 『일본철학사상 자료집』, 269쪽.

주3) 오하시켄지, 「나카에 토쥬(中江藤樹)와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의 실학 - 일본에서의 修己治人의 원형」, 『한국실학연구』18, 2009, 743쪽에서 재인용.

주4) 한예원, 「態澤蕃山의 성의설 ∼ 中江藤樹와 비교하여」, 『양명학』7, 2002년, 197, 202, 206, 215쪽 참조. John A. Tucker, 「구마자와 반잔」, 『일본철학사상 자료집』, 268쪽.

주5) 오하시켄지, 「나카에 토쥬와 구마자와 반잔의 실학」, 742쪽.

주6) 최재목, 『동아시아의 양명학』, 172쪽. 友枝龍太郞의 설명 재인용.



실천주의 개혁가


반잔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고급관료의 입장에서 양명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경향이 강합니다. 이 점은 토쥬가 향사(鄕士, 농사를 지으며 사는 하급 사무라이) 층에 기반을 두고 행동한 것과는 다르나,(주7) 실천을 중시하였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이는 바로 양명학에서 추구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의 정신은 나카에 도주로부터 구마자와 반잔, 그리고 그 이후 일본의 양명학자들 사이에 면면이 이어진 공통적 특징입니다.(주8)


반잔은 젊어서 오카야마번에 발탁되어 봉록 3천 석의 정무담당 책임자가 된 뒤, 고위 관료의 입장에서 사회 제도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주9) 그는 『대학혹문(大學惑問)』에서 “요순시절에도 상벌의 제도가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일본의 옛날에 직위에 따라 혹은 직책에 따라 지급되는 밭이 있었던 것과 같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어떤 직위를 맡기면, 그 직위에 따라 봉록을 받는다. 이것은 상(賞)과 비슷하지만 상은 아니다. 하늘이 부여한 직위를 함께하고, 하늘이 주는 봉록을 함께하는 것이다.” (주10)


그의 문장 중에는 이렇게 제도를 언급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반잔은 나아가 자기가 소속한 번의 정치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무사의 귀농과 참근교대(勤交代) 완화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무사의 토착화에 관심을 두고 토착화한 무사는 백성으로부터 쌀을 징수하여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주11)


이러한 그의 사상, 혹은 개혁 정신은 양명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엄격히 말하면 그런 내용이 양명학 자체에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학의 가르침 혹은 주자학의 경세론적 가르침에 속합니다. 주자학의 이상주의적 민본주의에 입각한(주12) 양명학의 실천정신이 반잔으로 하여금 그런 관심을 유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양명학의 영향은 과감한 실천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실천이 없는 공허한 학문태도를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무사가 무예에 통달하였다는 것은 사람을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공을 세우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예를 익히지 못한 자도 무공을 세울 수 있다. 또 병법을 익힌 자가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지는 경우도 있다.”(주13)


무사라 할지라도 무공을 세우지 못하고, 병법을 익혔어도 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는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면서 실천이 없이 학문만을 행하는 풍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잔의 실천적이고도 관료적인 정신은 그의 출신 성분이 무사이고 관리였다는 사실에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반잔은 떠돌이 무사였던 아버지 노지리 토베카즈토시(野尻藤兵衛一利, 1590-1680)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8살 때(1626년),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인 오와리번(尾張藩)의 무사였던 외할아버지 구마자와 모리히사(熊沢守久)의 집으로 가 살다가, 나중에 외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구마자와(熊沢)라는 성과 무사의 직위를 물려받았습니다. 1634년 16세 때는 먼 친척의 추천을 받아 비젠지방(備前国) 오카야마번의 이케다 미츠마사(池田光政) 번주에게 발탁되어 관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맡은 직책은 번주 미츠마사의 비서 겸 호위무사였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시마바라(島原, 지금의 나가사키 부근)에서 기독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신도 반란 진압에 앞장서겠다고 번에 신청했습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번을 이탈하여 오미지방(近江国)에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귀향해 버렸습니다.


그 후 1641년 22세 때 혼자서 주자의 『사서집주』를 배우고, 다음 해 23세(1642년) 때 약 8개월 간 토쥬 밑에서 『효경』, 『대학』, 『중용』 등을 배웠습니다. 토쥬는 이때 『효경』에 대해서 매우 심취한 시기였고 원숙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잔은 그 밑에서 알찬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반잔이 토쥬 밑에서 더 오래 공부하지 못했던 것은 집안이 가난하여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잔은 그 후로 수년간 독학을 하고, 26세(1645년)때 다시 추천을 받아 오카야마 번으로 복직하였습니다. 그가 배운 양명학이 복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번주 미츠마사도 양명학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탈번(脫藩)한 경력이 있었음에도, 토쥬에게 양명학을 배운 반잔을 다시 맞아들인 것입니다. 미츠마사는 나중에 반잔을 더욱 신임하고 양명학으로 나라의 근본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습니다.(주20)


반잔은 이렇게 해서 32세 때(1650년)에는 관리들 중에서도 고급관리인 번두(番頭)가 되어 3천 석이나 되는 많은 봉록은 받았습니다.(주14) 36세 때(1654년)에는 오카야마 지역에서 큰 홍수가 나고 흉작으로 대기근 발생하였을 때 미츠마사를 도와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치산, 치수 등 토목사업에 수완을 발휘하고 각종 개혁에 힘썼으나 이 때문에 보수적인 관료들과 대립하기도 하였습니다.


반잔이 토쥬에게 유교 교육을 받은 것은 1642년입니다. 토쥬는 1640년에 이미 『성리회통』을 읽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옹문답(翁問答)』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1641년에 『효경계몽(孝経啓蒙)』을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토쥬의 학식이 최고조로 올라있을 때, 반잔은 토주에게 수준 높은 주자학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토쥬는 1641년에 양명학의 『왕용계어록』을 읽고 4년 뒤 1645년에 『왕양명전집』을 읽었습니다. 말하자면 반잔은 자기 스승이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효경』등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반잔은 오카야마 번에 재취직한 1646년 경에 스승 토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거기에서 토쥬는 자신이 왕양명 책을 읽고 양지(良知)의 의미를 알게 되어 기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주15) 이에 반잔은 자신도 3년간 심법을 단련하고 노력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 기간은 반잔 스스로 양명학을 배우고, 양명학 정신으로 새롭게 자신을 가다듬은 시기입니다. 그래서 태허에 대한 생각이 스승과 달랐던 것입니다.


한편 토쥬가 반잔을 가르치기 직전(1641년)에 읽은 『왕용계어록』의 왕용계(王龍溪, 본명은 왕기王畿, 1498 ~ 1583)는 양명좌파로 분류되는 양명학자입니다. 용계는 절강성(浙江省) 산음(山陰, 현재의 소흥시) 출신의 유학자로 마음은 원래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무선무악(無善無惡)설을 주장했습니다. 마음의 본체인 성(性)은 원래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과는 대치되는 입니다. 마음의 현재 상태를 그대로 긍정하는 현성파(現成派)는 사람의 마음을 그 자체로 철저히 긍정합니다. 자기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 자체가 선이고 그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양지(良知)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주16)


왕용계는 마음에 착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는 것은 의지(意)의 움직임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학문은 '깨달음으로 얻는 것(悟得)'이라고 보고 양지(良知)는 배우지 않고도 고민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이 나중에 사람의 욕망(人欲)을 긍정하는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왕간(王艮), 왕벽(王檗),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 이탁오 등이 이런 양명좌파 사상가들입니다. 토쥬가 처음 읽고, 반잔이 처음 들은 양명학은 이들의 양명학이었습니다. 양명학 중에서도 불교와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 강경파 양명학입니다.(주17)


반잔은 39세(1657년)로 은퇴했습니다. 복직한 뒤 12년 만입니다. 토쥬 선생은 이미 10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은퇴한 뒤에도 반잔은 강력한 실천의지를 가지고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습니다. 1658년에는 교토에서 학당을 열고 학생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는데 많은 무사들과 의사, 상인들이 몰려들어 명성이 높아지자 막부에서 감시가 심해졌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주변의 시기와 견제를 받아 교토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당시 그는 교토 궁정의 고위 관료들과도 모임을 가졌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그를 의심하고 질투를 하였습니다. 이후 반잔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667년에는 야마토 지역(大和国)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교토 부근으로 돌아와 몸을 숨겼으나, 1669년(51세)에 막부의 명령에 따라 현재의 고베시 부근(太山寺)으로 유폐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 그는 저술 작업에 전념하여 일본어로 『집의화서(集義和書)』(1672년), 『집의외서(集義外書)』(1679년)등을 집필했습니다. 『집의화서』에서는 막부의 쇼군이 천하의 지배자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지배자는 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천황의 신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막부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1687년(69세)에는 막부가 그의 저서 『대학혹문(大学或問)』에 막부를 비판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하여 유배지에서 칩거 근신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그는 1691년 73세로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주18)



고달픈 만년의 삶


그가 주위로부터 어떤 따돌림을 받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 학자 오하시 겐지는 반잔이 하야시 라잔 등 주자학자나 승려 및 주변 적대자에게 배격당했다고 소개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주위의 반감과 막부의 기피 등으로 좌절하여 39살에 사임, 은퇴했다. 유학적 이상주의(인정·민본주의)가 막부의 혐의를 받아 그 감시 하에 각지를 떠돌며 저술활동에 전념한 뒤 가난 속에 죽었다.”(주19)


반잔은 하야시 라잔 외에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 1611-1673)에게도 비판을 받았습니다. 마사유키는 아이즈번(会津藩)의 영주(다이묘)로 주자학을 통치에 활용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잔이 양명학에 관심을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사유키는 에도 막부의 핵심 참모이자 실세 영주였습니다. 그는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애인과 밀회를 즐기다 낳은 아들로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 1604~1651, 재위 1623~1651)의 이복동생입니다. 마사유키는 1611년에 출생한 뒤에 쇼군이었던 아버지에게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 오시즈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 세력이 미약한 3만 석 규모의 다카노번(高遠藩) 영주의 양자가 되었다가 그 직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뒤 3대 쇼군 이에미쓰의 주목을 받고 고속 출세를 하여 23만 석 규모의 아이즈번 번주가 되었습니다. 쇼군 이에미쓰는 동생 마사유키를 각별히 총애하였고, 마사유키 또한 막부에 각별히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런 충성은 아이즈번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져 나중에 아이즈번은 명치유신 당시 막부가 무너질 때 최후까지 저항했습니다. 막부를 자신의 집안처럼 생각하고 충성을 다한 마사유키였기 때문에 반잔을 경계하는 마음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하야시 라잔은 에도시대에 학술계의 쇼군이라 불린 사람입니다. 주자학을 배운 그의 제자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각 지역의 영주들 밑에서 번의 사무를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막강한 인맥 외에도 막부의 권위를 등에 짊어지고 막부의 학술과 교육 분야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라잔에 대해서 반잔의 스승 토쥬는 24살 정도 되었을 때 아버지뻘 되는 라잔이 실력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라잔이 아직 불교 승려의 티를 벗지 못했다고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토쥬는 시골에 사는 하급 사무라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쥬는 라잔의 관심 밖이었으나 토쥬는 정성을 들여 라잔을 비판했습니다. 그런 양명학자의 제자가 반잔이었으니 반잔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반잔은 자기 스승 토쥬보다도 사무라이 급이 높아 무게감도 있고 양명학자로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라잔은 반잔을 더욱 경계하였을 것입니다. 라잔은 토주의 심학(心學, 양명학)이 당시 금지된 기독교의 변형이라고 의심하고 당시 일어났던 떠돌이 무사들의 습격사건 배후로 지목하기도 하였습니다.(주20)


라잔은 양명학을 호의적으로 보았던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와는 달리 양명학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조선의 학술계 동향을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수시로 전해 듣던 라잔은 양명학이 조선 학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잔은 중국 학술계 사정도 밝았기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원로 학자들이 양명학 대해서 비판한 것도 익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반잔을 철저히 견제한 것입니다.


반잔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 막부의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특히 참근교대(参勤交代)와 병농분리제도, 그리고 세습 제도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쓰거나 사람들을 통해서 건의를 자주 했습니다. 참근교대는 막부가 영주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 지방의 영주들이 주기적으로 막부가 있는 에도에 나와 근무를 하도록 강제하는 제도입니다. 막부로서는 지방 권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권위를 확고하게 만드는 제도인데 반잔은 여기에 대해서 비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또 자신이 일했던 오카야마 번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으로 자신이 모셨던 번주 미츠마사와도 사이가 틀어지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막부 관료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그에 대한 경계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양명학적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러한 반잔의 삶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전통시대에 딸이 시집갈 때 부모가 들려주던 말로, 시집살이를 하면서 보아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하라는 것입니다. 일본에도 '보지않고(見ざる) 듣지않고 (聞かざる) 말하지 않는다(言わざる)'는 원숭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일본 사회는 기본적으로 무사들이 존중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억압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양명학에서 추구하는 과감하고도 즉각적인 행동이 사실은 사회 발전을 유도하지만 거기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부조리함을 보고 참지 못하고 즉각 즉각 행동에 나서게 되면 매우 힘듭니다. 본인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행동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당사자에게 자칫하면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명학의 ‘양지를 실천하라(致良知)’와 ‘지식과 행동을 일치시켜라(知行合一)’는 사상은 자칫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근대 일본사회에서는 양명학을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일본 양명학자들이 일의 성패를 따지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동기의 순수함을 내세우고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적진을 습격하고 할복자살한 아코의 사무라이 47인의 행동을 양명학적인 것으로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종교적 신앙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양명학적인 가르침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양명학의 지행합일 개념은 순교자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도 명치유신 직후에 일본에서 양명학이 크게 선양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주7) 모리모토 준이치로, 『일본사상사』, 328, 333쪽 참조.

주8) 송휘칠, 「양명학의 일본적 수용전개에 관하여」, 55쪽. 최재목,「일본 양명학의 전개 ∼ 中江藤樹에서 大塩中齋까지」, 243쪽.

주9) 오하시켄지, 「나카에 토쥬와 구마자와 반잔의 실학」, 736쪽.

주10) 態澤蕃山, 『大學惑問』, 『態澤蕃山』, 日本思想大系30, 岩波書店, 1971, 450쪽. 『大學惑問』에는 세금제도, 미곡제도, 교육과 종교정책, 병농분리, 관직 세습제도 등 다양한 정치제도를 언급하고 있다.(송휘칠, 「양명학의 일본적 수용전개에 관하여」, 45쪽 참조.)

주11) 모리모토 준이치로(守本順一郞), 김석근외역, 『일본사상사』, 이론과 실천, 1988, 330쪽.

주12) 오하시켄지, 「나카에 토쥬(中江藤樹)와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의 실학」, 737쪽.

주13) 態澤蕃山, 「集義和書」, (모리모토 준이치로,『일본사상사』, 329쪽에서 재인용.)

주14) 「態澤蕃山年譜」, 『態澤蕃山『(日本思想大系30, 岩波書店, 1971); 모리모토 준이치로, 『일본사상사』, 327∼328쪽 참조.

주15) 오가와 하루히사, 「일본실학의 형성과 발전」, 『일본사상』8, 2005, 2001, 7쪽.

주16) 정지욱, 「왕용계의 양지현성론 : 歸寂ㆍ修證派와의 비교를 통하여」, 『양명학』6, 173쪽.

주17) 선병삼, 『양명학의 새로운 발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7, 14쪽.

주18) John A. Tucker, 「구마자와 반잔」, 『일본철학사상 자료집』, 268쪽.

주19) 오하시켄지, 「나카에 토쥬와 구마자와 반잔의 실학」, 737쪽.

주20) 한예원, 「態澤蕃山의 성의설 ∼ 中江藤樹와 비교하여」,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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