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양명학 #2.3
19세기 일본의 학파별 사상가 분류표
19세기 동아시아는 총체적인 위기 속에 몰락으로 가는 세기였습니다. 일본도 발전을 거듭하던 에도 사회 내부에서 다양한 갈등이 분출되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으며, 서양 세력의 일본 진출은 그러한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에도시대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정권을 잡고 있던 에도 막부는 내부적인 불만과 외부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존립 기반이 약해졌습니다.
서양 제국들이 일본을 넘보는 상황에서 막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사회가 불안해지니 학술계에는 목소리 큰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미토학파와 국학파 그리고 양명학파입니다. 주자학파가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내세울만한 인물들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에도시대 중엽에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고학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헌에 침잠하며 조용한 사색을 추구했던 학자들을 혼란한 사회는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유교 도덕은 민간에 더 멀리 퍼졌으며 젊은이들은 막부의 관료가 되기 위해서 유학을 가르치는 각종 학당를 찾았습니다.(주1)
이 시기 국학파는 이전 시기의 치열한, 실증주의적 문헌연구를 외면하고 종교적 국수주의로 나아갔습니다. 특히 히라타 아쓰타네는 실증주의를 중시했던 국학을 신비주의적 신도학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는 신과 이 세계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사후 세계와 영혼의 구제를 학문의 중심 문제로 삼았습니다. 노리나가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고사기』는 그 안에 천황의 존재를 태양신과 연결시키고 신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아쓰타네 노선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경>과 같은 중국의 고문헌에는 볼 수 없는 천황숭배 사상이 전면에 나타나 막말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쫓아냄) 운동의 지주가 되었습니다.
아이자와 야스시, 후지타 토고가 활약한 미토학파(水戸学派)는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미토시(이바라키현)에 기반을 둔 학파입니다. 이들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점을 두어 『대일본사』를 편찬한 바 있습니다. 미토현은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쇼군 가문이 직접 통치를 했습니다. 이들도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막부 편에 서서 천황의 권위를 바탕으로 막부 중심의 정치 개혁을 시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황이 일본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상가들은 양명학자들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학자는 전기의 오시오 츄사이와 후기의 요시다 쇼인입니다. 사토 잇사이는 원래 주자학자였으나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사쿠마 쇼잔은 그의 제자였으며, 요시다 쇼인은 이 쇼잔의 제자입니다.
츄사이는 혼란한 시기에 일본 양명학의 위세를 크게 떨친 인물입니다. 오사카에서 하급 관리 일을 하던 그는 관리들의 부패를 목격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결하였습니다. 이 반란은 에도막부의 권위를 기초부터 흔들었습니다. 쇼인은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 사회의 개혁을 추진하다 막부에 의해서 처형당했습니다. 나중에 일본의 명치유신을 이끌어냈던 많은 지사들이 쇼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츄사이와 쇼인의 공통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기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인 추진력 그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독창적인, 어떤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진 사회에 자신의 생명을 내던짐으로써 전면적인 개혁을 추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양명학파 지식인들은 어떤 개혁을 목표로 한 것이었을까요? 양명학은 원래 주자학과 함께, 혹은 주자학을 전제로 존재한 사상체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양명학 자체 안에는 독자적인 세계관이나 정치적 내용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사상적인 이념은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국학파와 미토학파 학자들이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존왕양이, 즉 천황이 일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외국의 문물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미토학파는 천황이 정치의 전면으로 나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적 측면에서 준비했고, 국학파는 그 당위성을 종교적 측면에서 준비했습니다. 주자학이 촉발하고 양명학이 추동한 에도시대 약 260년간의 역사는 천황이 등장함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천황은 일본 근세 학술사상사의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주1) 가쓰라지마 노부히로, 「‘근세제국’의 해체와 19세기 전반기의 사상동향」, 『일본근대학연구』39,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