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양명학 #2.2
18세기 일본의 학파별 사상가 분류표
18세기 일본 사회는 막번 체제가 안정되면서 문화적으로도 번창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에도시대 최고 호황기였던 겐로쿠 호황기(1688~1707) 뒤에도 막부는 다양한 개혁정치를 시도하면서 18세기는 내내 사회적인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에도시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고문사학파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또 한 사람은 국학파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입니다.
조선시대 최고 학자로 다산 정약용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산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오규 소라이입니다. 그런데 다산도 소라이의 글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소라이의 제자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고문사학파)가 쓴 글(『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을 배우고 섭취하여 자신의 저술(『논어고금주』)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소라이는 다산에게도 영향을 미친 일류 학자입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의 평가에 한정하자면, 최고의 학자는 단연 국학파의 모토오리 노리나가입니다.
노리나가는 소라이학으로부터 문헌학적 연구 방법을 배우고, 대신 연구 대상은 중국의 고전이 아니라 일본의 고전을 선택했습니다. 노리나가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일본 국내에 머무는 것은 그의 학문적인 성취가 매우 일본적이며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연구 과정은 문헌에 입각한 실증주의적이지만 연구 결과는 거기에 종교적 신념이 가미되어 국수주의적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일본 바깥 사회에서 보편성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입니다.
노리나가는 『고사기』연구와 해석에 30여 년을 바쳐서 『고사기전(古事記伝)』을 집필했습니다. 그의 연구가 있기 전에 『고사기』는 거의 연구가 없었으며 위서라는 의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밀한 해석과 수준 높은 주석을 통해서 『고사기』의 위상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고사기』는 일본의 고대정신을 담고 있는 굴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이 시기 전반의 학계의 주류는 주자학을 변형시킨 고학파였습니다. 특히 고학파 중 고문사학파(소라이학파)로 젊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고문사학이란 중국 고대의 문장, 특히 육경(六経)의 문장이나 단어를 분석해서 거기에 담긴 사상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소라이는 공자 이전의 육경, 즉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 등을 근거로 공자의 사상을 규명하고 선왕의 정치사상을 배워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소라이학이 18세기 학술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고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토 토가이는 고의학파인 이토 진사이의 아들입니다. 고의학파는 송나라 주자의 학설을 거부하고 직접 고대의 학술, 즉 공자나 맹자의 학문을 탐구하여 사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18세기말, 즉 1790년에 막부는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이라는 학문 통제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주자학을 막부의 정식적인 공인 학문으로 인정하고 성당학문소(聖堂学問所)를 관립 쇼헤이자카(昌平坂) 학문소로 개편한 뒤, 이곳에서 양명학과 고학의 강의를 금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사실상 극성하던 소라이학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주자학파가 미약하나마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힘을 얻게 된 학파는 오히려 국학파였습니다. 국학파는 소라이학파의 치밀한 학문 방법론을 수용하여 중국 고전 대신 일본 고전을 연구하였습니다. 노리나가가 『고사기』연구로 그런 연구를 집대성했습니다.
양명학계는 싯사이가 나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왜 양명학이 이 시기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요? 당시로서는 양명학이 그렇게 매력적인 사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싯사이는 『전습록』에 표주를 달아 보급에 힘썼습니다. 이 시기는 에도 사회가 한창 번영을 구가할 때였기 때문에 좀 더 화려하고, 중국 고전(육경)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배울 것이 많은 소라이학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상황을 보면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사구시의 학문, 즉 실학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실학은 주자학과 크게 대립하지 않으면서 주자학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습니다. 양명학도 이런 실학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양명학을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