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양명학 # 2.1
17세기 일본의 학파별 사상가 분류표
위와 같은 학파 분류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명의 학자들에 대한 학술적인 경향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잠정적이고도, 임시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방편으로 시도하는 분류입니다. 분류 기준은 일본 학계에서 논의되는 일반적인 평가, 그리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한정된 지식에 근거합니다. 개별 사상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실로 다양한 분파 학문이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위 표를 보면 에도시대 학문은 주자학파에서 시작되었는데, 후지와라 세이카가 가장 이르며 그 제자 하야시 라잔이 뒤를 따랐습니다. 세이카는 라잔의 스승입니다. 이 두 사람은 승려였는데 주자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세이카는 조선에서 포로로 붙잡혀온 강항(姜沆)으로부터 주자학을 배워 그것을 라잔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리고 라잔을 막부에 소개하여 쇼군 아래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막부는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통치 이념이 필요했으므로 주자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이카와 라잔의 주자학 선양 활동으로 17세기에 양명학파, 고학파(고의학파, 고문사학파), 그리고 국학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위 표에 보이는 학자 중에 학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학자들은 야마가 소코(고학파)와 이토 진사이(고의학파)입니다. 가장 영향력이 있던 학자는 하야시 라잔이었습니다. 라잔은 자기 스승인 세이카를 제외하고 다른 학자들보다 한 세대(30년) 정도 나이가 많지만 74세까지 오래 살았기 때문에 동시대를 살면서 이 시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잔이 깔아놓은 주자학적 환경 위에서 이들 학자들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목하여 볼 것은 주자학 도입 직후에 거의 동시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부정적인 반발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주자학파 내부를 보더라도 안사이는 주자학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켰습니다. 그는 퇴계의 영향을 받아 경(敬, 경건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종교화하였으며 일본 고유의 신도사상과 결합을 추진하였습니다.
고학파의 소코는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학자로 라잔에게 주자학을 배우다 독립하여 고학을 제창했습니다. 그는 주자학을 송나라의 학문이라 비판하고 송대 이전의 유학 즉 공자 시대의 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를 진사이가 이었습니다. 양명학파의 나카에 토쥬도 처음에는 주자학에 심취하였으나 곧바로 양명학으로 관심을 돌려서 깊이 있는 연구를 시도했습니다.
왜 이 시기 일본 학계는 주자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차분하게 연구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까요? 왜 조선의 학자들처럼 주자학에 침잠하여 그 가능성을 탐색하지 않았을까요?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던 점, (그렇기 때문에 주자학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 불교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던 점, (불교 비판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주자학에 반감이 생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인층이 거의 전무했던 점(에도시대 초기 일본 사회의 지식수준이 매우 낮았음) 등을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자학이 전제하고 있었던 세계관이 일본인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하고 이질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주자학이 보는 세계는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리(理, 원리)의 세계와 눈에 보이는 기(氣)의 세계가 있습니다. 리의 세계는 태극, 음양, 오행으로 이루어진 질서가 있고, 기의 세계는 이러한 리의 질서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발현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대개 일본인들은 이러한 복잡한 이론을 ‘리쿠쯔(理屈)’라고 칭하며 싫어합니다. ‘리쿠쯔’라는 단어는 원래 사물의 이치, 혹은 도리, 또는 이론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핑계, 구실, 또는 억지 이론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본은 독자적인 세계관이 고대부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712년 나라시대에 완성된 『고사기』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시작되어 하늘과 땅이 생긴 이후에 하늘에는 여러 신들이 태어났고 그중에 남녀 두 신이 지상에 내려와 일본의 섬들을 낳습니다. 그 뒤에 온갖 사물들과 바다, 달, 태양 등이 그것을 주관하는 신들과 함께 태어나는데, 이 가운데 태양신은 하늘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으로 지금 살아 있는 천황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계 속에 살고 있었던 일본사람들에게 주자학에서 말하는 세계는 너무도 이상했습니다. 구체적이지 않았고, 생명력이 없으며, 신적인 존재가 만들어내는 경건함도 깊이도 없었습니다.
참고로 에도시대 유학자들이 왜 반주자학적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분석을 소개합니다.
중국학자 오진(吳震)은 1)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일본 사회와 백성들에게 도움 되지 않았으며, 2) 불교와 신도가 중시되었던 일본의 문화적 배경이 있었으며, 3) 일본 스타일의 화의관념, 즉 민족주의 의식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주1) 한편 일본의 와타나베 히로시는 이토 진사이의 경우, 주자학이 자신을 둘러싼 기존의 질서나 일상생활 양상에 대해 침투해 오는 듯이 보았기 때문에 반발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주자학이 고상하고 원대한 것에 편향되고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주2) 이외에도 '일본인들은 형이상학적 실재에 관심이 없고', (平石直昭) '유교가 일본인들의 전통문화에 부합되지 않았으며 실제 생활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津田左右吉)이라고 본 학자도 있었습니다.(주3)
결국 주자학은 일본인들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일본 고유의 세계관을 자극하여 국학파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단계는 아니었지만 게이츄는 일본 고대의 서적인 『만엽집』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시가(와카) 모음집입니다. 게이추는 국학파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고학파의 소코와 진사이는 주자학을 송나라 학문이라 비판하고 고대 유학을 연구하면서 주자학적 세계관을 외면할 수 있었습니다. 주자학에서 보여주는 세계관은 북송의 학자 장재, 주돈이 등의 학설을 바탕으로 남송의 주희가 구축한 것입니다. 양명학파는 주자학의 이기론적 세계관을 긍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한 사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양지(良知)란 무엇인가 하는 마음의 문제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역시 그런 세계관과의 충돌을 피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일본 양명학은 모색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학자들은 라잔처럼 막부나 영주들로부터 녹봉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안사이와 진사이는 교토 중심지에 학당을 열었고, 소코도 에도에서 이러저러한 학당에 다니면서 학술을 배운 뒤에 나중에는 자신도 학당을 열고 제자들을 받았습니다. 토쥬도 27살 때 소속 번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학당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양명학은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주로 유명한 주자학자들이나 고학파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입니다.
특히 라잔이 막부 관료로서 주자학의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주자학에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양명학자 토쥬도 초기에는 라잔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에 관심을 가졌다가 나중에 양명학으로 전향하면서 라잔을 비판하고 자립하였습니다. 아쉽게도 그는 40세의 나이로, 라잔이나 안사이보다 일찍 사망하여 학술적으로 더 깊이 있는 성과는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로 반잔을 키웠으며 일본 양명학의 사상적인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 시기에 주자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와타나베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17세기 말엽까지 주자학은 일본 사회에 널리 침투되어 수용,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양적으로도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질적으로도 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주4) 하지만 주자학은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일본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에도의 지식인들이 중국 고대의 학술과 사상에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고 일본 고유의 사상을 연구하는 열정을 갖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요컨대 주자학의 전래로 일본은 다양한 학술 사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17세기 조선으로 시야를 돌려보자면, 전화에 휩싸여 사회 기반이 무너진 조선사회는 양명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개혁의 이념으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명학은 임진왜란 전부터,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등 유학자들 사이에서 이단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조선의 지식인들이 볼 때, 양명학은 이미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중국에서도 비판을 받는 구시대 사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사회 정치적 기반은 아직 건재하므로 이러한 이질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양명학 사상이 과연 그 안에 조선 사회를 개혁시킬 수 있는 어떤 사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불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것은 더욱 강력한 주자학적 질서의 추구, 즉 예학의 정립이었습니다. 조선 예학의 태두라고 불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 추구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불교에 압도되어 유교식 장례나 의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학이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주5) 조선의 사상계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약간 달라진 것이 있다면 리를 강조하는 퇴계의 주자학보다는 기를 강조하는 율곡 이이의 주자학이 좀 더 주목을 받는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왜 이렇게 주자학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일본의 주자학 수용을 살펴보면서 가지게 된 의문입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우리는 주자학에 집착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맨 첫 번째 이유는 주자학에 귀가 막히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600여 년간 주자학에 빠져 살았습니다. 중국 사람들보다 더 진심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주자학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요? 궁금합니다.
주1) 오진, 『일본유학, 동아시아유학의 관점에서 보다』, 예문서원, 2022, 316-324쪽.
주2) 와타나베 히로시, 박홍규 역,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예문서원, 2007, 256-257쪽.
주3) 위와 같음.
주4) 와타나베 히로시,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24쪽, 39쪽. 와타나베는 이 시기 하야시 라잔의 막부에서의 역할도 매우 축소해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44-45쪽.)
주5) 와타나베 히로시,『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202, 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