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양명학 #2 에도시대 학술계 동향과 양명학파
일본의 에도시대(1603∼1868)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근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은 고대, 중세 다음에 근세를 집어넣어서 에도시대를 지칭하고 그 뒤에 근대와 현대를 두었습니다. 학자마다 약간 차이는 있으나 일본역사는 고대(아스카, 나라, 헤이안 시대), 중세(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 그리고 근세(에도시대), 근대(명치유신 이후 1945년의 패전까지)로 구분합니다. 고대와 중세는 불교의 시대, 근세는 주자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자학이 조선만큼 일본 사회에 깊숙이 퍼진 것은 아니나 에도 막부는 꾸준하게 주자학을 관학으로 지원했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근세 개념을 중국사에도 적용하여 한때 중국사 시대구분론이 일본 학계의 열띤 주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18년 경 나이토 코난(内藤湖南)이나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등이 주장한 중국 근세론이 그것입니다.(주1) 이들에 따르면 중국사는 고대, 중세, 근세, 근현대로 이어지는데 중세는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시대를 포함하고, 근세는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 시대를 포함합니다.
이들 역사학자들의 시대구분론은 자본주의 발전론, 토지 정책, 통치 구조, 생산관계, 농민운동의 양상 등과 연결되어 매우 복잡하지만 학술사와 종교사상사의 측면에서 보면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학자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중국의 중세(삼국, 위진남북조, 수당송)가 불교의 시대이며, 근세(송원명청)는 주자학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송, 원, 명, 청이 주자학 일변도는 아니었지만 명나라의 양명학이나 청나라의 고증학도 크게 보면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학술연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명청시대에도 과거시험은 주자학 경전이 주요 텍스트였으며, 주자학은 여전히 통치자들과 지식인들에게 주류 학문이었습니다. 주자학은 그야말로 1000년 가깝게 중국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주자학이 불교를 대신해서 새 시대의 종교이자 학술이 된 것은 중국의 근세사회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나친 영향력에 대해서 반발하고 기존 유교의 훈고학적 경전해석을 거부하였으며, 사회적 실천과 경세의식이 요구된 상황에서 주희(朱熹, 1130~1200)가 등장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이기론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것이 주자학입니다. 이후 300여 년이 지난 뒤 주자학이 당시 사회의 발전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발견되어 명나라 중엽에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 1472~1528)이 마음(心)을 중심에 놓고 주자의 심성론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개혁한 것이 양명학입니다.
양명학은 명나라(1368~1644) 말엽인 16세기에 발생했습니다. 창시자 왕수인이 귀주성 용장(龍場)에서 깨달음을 얻은 때가 1508년이었으며, 20년 뒤에 그가 사망하고 이후 양명좌파인 이지(李贄, 호는 탁오, 1527~1602)가 마지막으로 활동하다 사망한 때가 1602년입니다. 그 뒤에 양명학은 차츰 쇠퇴하다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명학이 중국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기간은 약 100여 년 정도입니다.
명말의 원로 유학자들인 왕부지(王夫之),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등은 양명학이 지나치게 공론적이라고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이후 청나라 시기 학술계는 문자와 문헌해석을 중시한 고증학으로 기울었습니다. 청대 학자들이 경학이나 역사학의 실증주의적 연구로 방향을 잡은 것은 청나라 만주족의 집권에 따른 지식인 탄압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양명학은 이민족 통치자들에게는 위험한 학술 사상이었습니다. 너무도 주관적이었고 직관적인 방법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 연구자들도 일본학자들의 근세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면 한우근은 조선시대를 근세로, 고려시대를 중세로 구분하고, 한영우는 고려와 조선을 합하여 중세로 구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대구분을 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고대(고조선, 삼국, 남북국, 후삼국 시대), 중세(고려 시대), 근세(조선 시대), 근대(1864년의 대원군의 집권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입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시대구분을 무시하고 왕조 중심으로 구분하여 그냥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부르는 것이 대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세는 역시 주자학의 시대이고 그 이전은 불교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는 600여 년간 주자학의 영향하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왜 주자학을 받아들였을까요? 주자학은 고려시대 말엽에 전래되었습니다. 당시 교류가 활발하였던 원나라가 주자학으로 과거시험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젊은 지식인들이 선진 학문으로 새로운 유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뒤 조선이 건국되자 주자학은 새 정권의 정치, 사회 개혁의 이념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주자학이 가진 불교 지양의 사상과 사회개혁적 성격이 조선 통치자들의 추구 방향과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100년쯤 지난 뒤, 1521년 이전에 양명학이 들어왔습니다. 이때는 왕양명이 아직 살아 있을 때입니다. 당시 양명학은 명나라에서 아직 권위를 확실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정통 주자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사회는 이미 주자학 경전으로 시험을 보는 과거제도가 정착되어 지속적으로 수많은 주자학자들이 배출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명학이 적극적으로 수용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주자학은 한중일 삼국 근세의 지배적인 학술이었습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러한 주자학을 주목하여 그것이 종교개혁의 산물이며, 유럽에서 말하는 학예부흥, 즉 르네상스와도 같은 현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주자학을 송나라 학문이라는 뜻에서 송학이라고도 합니다.) 이치사다에 따르면, 송학은 전통적인 유학을 비판한 유교 개혁운동이며, 주자의 격물궁리는 합리적인 사고를 방법으로 채택하였고, 주자가 말한 리(理)란 구체적으로는 삼강오륜이며, 상하의 도덕적인 가족윤리가 그 근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고대에 대한 동경, 과학 존중, 인도주의, 미신 배제 등의 근대적 정신이 담겨 있는데 그것이 근대 사회 형성의 사상적 기점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주2)
그런데 우리나라의 근세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시대도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국가가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몰락한 국가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근세'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남북의 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은 부끄러운 '근세'가 낳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근세, 즉 에도시대는 다릅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서 에도시대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시대는 없습니다. ) 일본학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화려하게 꽃 피웠던 에도시대를 염두에 두고 '근세'를 말한 것입니다.
이치사다는 중국에서 주자학이 전래된 뒤에 그 학풍을 반영하여 에도시대에 양명학, 주자학, 고학, 고문사학과 같은 학파가 다양하게 발생하여 결국에 일본 국학이 탄생하였는데 그것을 일본 문예부흥의 정점으로 보았습니다.(주3) 근세가 끝나고 일본에는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근대 국가가 출현했습니다. 일본이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문명과 근대 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근세라고 이름 붙인 에도시대의 충실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양명학은 그러한 일본 르네상스 시기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여 새로운 일본의 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명치유신 뒤에 일본사회에 울려 퍼진 양명학 현창 운동은 그러한 양명학에 대한 일본사회의 헌사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근세, 즉 에도시대(1603∼1868)는 초기(17세기), 중기(18세기), 말기(19세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조선 후기(1598∼1910,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도 대략 초기(17세기), 중기(18세기), 말기(19세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또 중국의 경우 청나라가 통치하던 시기에 해당됩니다. 청나라(1616 ∼1912)도 초기(17세기), 중기(18세기), 말기(19세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어서 본다면 한중일 삼국 동아시아는 17, 18, 19세기가 매우 유사한 역사적 변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세기는 새로운 시작의 시기, 18세기는 절정의 시기, 그리고 19세기는 몰락의 세기입니다. 약 300년의 이 기간은 전통시대의 마지막 시기였으며 다가오는 근대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17세기는 중국에서 청나라, 일본에서 에도 막부 등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조선의 경우는 전란으로 황폐된 국가를 재건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뒤 18세기는 각 사회가 정비된 제도와 조직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가했던 시기였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강희제(재위 1661~1722), 옹정제(재위 1722~1735), 건륭제(재위 1735~1796)가 군림한 강건(康乾)의 성세(盛世)였고, 조선은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가 집권한 시기로 진경시대라 불리던 호황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18세기 초에 일본 역사 최대의 호황기라 불리는 겐로쿠 호황기(1688~1704년)를 거쳐서 각종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어지는 19세기는 각 나라가 내부에 축적된 다양한 부조리가 심화되면서 차츰차츰 쇠퇴해 가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서양 열강이 적극적으로 진출함으로써 동양 3국의 전통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일본은 근대국가로 재탄생하면서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조선은 그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받고 고전하다가 내전에 휩쓸렸습니다. 이후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근대국가가 설립되었습니다.
양명학은 일본에 17세기초, 즉 에도시대 초기에 주자학과 거의 동시에 전래되었습니다. 에도시대(1603∼1868) 265년을 앞서 소개한 대로 17세기(초기), 18세기(중기), 19세기(말기)로 구분한다면, 에도시대 양명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활동 시기를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에도시대 초기) : 나카에 토쥬, 구마자와 반잔 - 일본 양명학의 시작 시기
18세기(에도시대 중기) : 미와 싯사이 - 양명학의 명맥 잇기
19세기(에도시대 말기) : 사토 잇사이, 오시오 츄사이, 쇼잔, 요시다 쇼인 - 양명학의 흥성 시기
다음에서는 각 세기별로 나누어 일본 학술계의 동향과 함께 양명학파의 면면을 살펴봅니다.
주1) 柳田節子, 「宮崎 사학과 그 근세론 비판」, 『중국사시대구분론』, 창작과비평사, 1997, 208-209쪽.
주2) 柳田節子, 「宮崎 사학과 그 근세론 비판」, 208-209쪽.
주3) 柳田節子, 「宮崎 사학과 그 근세론 비판」, 223-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