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양명학 #1
2025년 4월 29일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에서 발표한 내용을 이곳에 올립니다. 발표 내용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일부 내용 중에는 수정하거나 추가된 부분도 있습니다.)
1. 일본에 들어온 양명학
2. 에도시대 학술계 동향과 양명학파
2.1 17세기 일본의 학술계 동향과 양명학파
2.2 18세기 일본의 학술계 동향과 양명학파
2.3 19세기 일본의 학술계 동향과 양명학파
3. 나카에 토쥬 - 일본 양명학의 태동
3.1 효도가 최고 원리다
3.2 태허에는 상제가 있다
4. 구마자와 반잔 - 양명학 실천자의 고달픔
5. 오시오 츄사이 - 행동하는 양명학
6. 요시다 쇼인 - 실천을 중시한 양명학
7. 질문과 답변 - 일본문화와 양명학
이 발표는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일본 양명학의 특징을 살펴본 것입니다. 발표의 주요 내용은 필자가 2010년에 발표한 『일본사상을 만나다』(성균관대학교 출판부)와 2014년에 발표한 『일본사상을 다시 만나다』(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가져왔습니다. 특히 전자는 나카에 토쥬(中江藤樹)와 오시오 츄사이(大鹽中齋)의 사상 관련 부분을, 그리고 후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상 관련 부분을 각각 참고하고, 학계에서 최근에 발표된 연구 성과를 추가하였습니다.
양명학이 언제 일본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도쿄대학 교수 고지마 쓰요시는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陽明, 1472~1528)이 생전에 일본 승려와 교류한 흔적이 있고, 일본의 배들이 왕수인의 고향 근처인 닝보(寧波)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점을 들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양명학의 전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 적이 있습니다.(주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도시대 초기에 주자학이 전래된 뒤에 양명학이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에도시대 초기에 활동안 주자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나 하야시 라잔(林羅山)도 양명학에 대해서 호불호는 있었지만 그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습니다.(주2) 특히 일본 양명학의 시조라 불리는 나카에 토쥬(中江藤樹, 1608∼1648)의 경우를 보면 먼저 주자학에 심취한 뒤에 양명학으로 관심을 바꿨습니다. 따라서 일본 양명학은 에도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그 출발을 촉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양명학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ㅇ 나카에 토쥬(中江藤樹, 1608∼1648)
ㅇ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1619∼1691)
ㅇ 미와 싯사이(三輪執齋, 1669∼1744)
ㅇ 사토 잇사이(佐藤一齋, 1772∼1859)
ㅇ 오시오 츄사이(大鹽中齋, 1793∼1837)
ㅇ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1811∼1864)
ㅇ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나카에 토쥬와 구마자와 반잔에 이어 중기에 활약한 미와 싯사이로 계승되었습니다. 이후 에도시대 말엽에 동쪽 에도(지금의 도쿄)에서는 사토 잇사이가 등장하여 활약하고, 서쪽 오사카에서는 오시오 츄사이(본명은 헤이하치로平八郎)가 나와서 활약하였습니다. 사쿠마 쇼잔은 사토 잇사이의 제자이며 요시다 쇼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들 양명학자들의 활동 시기 순서를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왕양명 『전습록』을 읽어보니 정말로 재미있었다. 최근에는 이지(李贄, 호는 탁오, 1527-1602)의 『분서(焚書)』를 읽어보니 양명학파인데 말마다 내 마음에 들었고 오시오 츄사이의 『세 심동차기(洗心洞劄記)』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오시오 츄사이도 양명학파인데 읽어볼 만하다. 나는 양명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학술이 진짜이며 여기저기 나의 뜻에 정말로 잘 맞는다.”
이 글을 보면 쇼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양명학자가 아닙니다. 양명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명학이 자신의 뜻에 잘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1868년에 일어난 명치유신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제자들이 명치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강제 병합을 추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명치정부 주요 정책 결정자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육군장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조선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재무대신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등이 쇼인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정한론을 주장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정한론, 즉 조선을 정벌하자는 사상과 양명학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궁금한 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시다 쇼인이 양명학자라고 한다면 양명학은 일본의 근대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 되고, 양명학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양명학과 명치유신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쇼인뿐만 아니라 많은 양명학자들이 진정으로 양명학자인지 아닌지, 그리고 양명학이 명치유신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주3)
‘일본양명학’이란 단어는 엄밀하게 따지면 상당히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1) 사회운동으로서의 일본양명학, 2) 학술연구로서의 일본양명학, 3) 정치와 윤리도덕 사상으로서의 일본양명학 등 각기 서로 다른 측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양명학을 말할 때는 이 중에 어떤 분야 혹은 영역에 한정되는 것인지 미리 전제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발표하려는 내용은 3번의 정치, 윤리도덕사상으로서의 일본양명학입니다.
1)의 사회운동으로서 일본양명학은 명치시대, 특히 1890년대에 일어난 운동을 말합니다. 이때의 일본양명학은 사회사 혹은 사회사상사 영역에서 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명치시대 초기에 사회운동 차원에서 선양된 양명학입니다. 2) 학술연구로서 일본양명학은 현대적인 학술연구의 한 분야로 철학사, 특히 중국철학사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개념입니다. 대학사회에서 인문학 연구의 한 분야로 일본양명학이 있는데 그것을 말합니다. 3) 정치, 윤리 사상으로서의 일본양명학은 에도시대 사상사 영역에서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에도시대 양명학자들의 사상 혹은 철학을 일본양명학이라고 합니다.
이들 ‘일본양명학’ 개념을 다시 상세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회운동으로서 일본양명학
19세기말, 즉 1890년대에 일본의 몇몇 지식인들, 예를 들면 히가시 게이지(東敬治),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 구가 가쓰난(陸羯南) 등이 양명학을 이용해 사회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목적은 일본에서 천황제 중심의 국가 건설을 위해 양명학으로 국민도덕을 정립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주4) 이러한 양명학은 나중에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주5) 이런 일본양명학에 당시 지식인들이 열광한 것은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지행합일 정신이 일본인의 인종적 특성과 연결되며 일본은 이러한 특성을 발휘하여 뒤쳐진 조선과 중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우월의식을 갖게 하였기 때문입니다.(주6)
사회운동으로서의 일본양명학 범위를 좀 더 넓게 잡으면 명치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의 양명학, 자위대의 친위쿠데타를 선동하다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양명학, 도쿄제국대학 교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 1855~1944)가 일본양명학이 서양철학과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 저서 『일본양명학파의 철학』,(주7)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저서 『대표적 일본인』에서 나카에 토쥬를 집필하여 선양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운동으로서의 일본양명학은 근대 조선과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국의 계몽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 ~ 1929)는 양명학이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보고 중국에 역수입하여 근대화운동에 활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조선의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도 주자학을 대체하고 조선을 근대화할 수 있는 학문으로 양명학에 주목했습니다.
2) 학술연구로서 일본양명학
1945년 이후,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일본학계의 중국철학사 분야에서 왕양명 철학 사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의 전문 학자들에 의한 학술적인 연구를 말합니다. 특히 중국철학사 영역에서 말하는 왕양명 철학사상 연구를 뜻하는데, 이런 연구는 사실상 중국 양명학 연구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일본 학계는 일찍부터 실증주의적 연구가 중시되어 일본학계의 양명학 연구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요시다 코헤이의 저서 『일본 양명학』 부록 「왕양명 연구사」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주8) 이 자료의 아쉬운 점은 1985년까지 정리된 연구성과로,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3) 정치, 윤리사상으로서 일본양명학
이 발표에서 염두에 둔 의미로, 특히 에도시대 한학자들 중에 양명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현실 사회와 정치에 활용한 사람들의 양명학을 말합니다. 이들 유학자 혹은 한학자들은 양명학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그리고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 사회에서 양명학이 가르치는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양명학의 핵심적인 이론인 지행합일의 정신을 받아들여 실천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3가지 일본양명학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일본양명학은 이렇게 복합적인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히 '일본양명학'을 정의한다면 사실 일본양명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발표는 정치사상, 윤리사상으로서의 일본양명학을 염두에 두고 에도시대 양명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1890년대에 일본에서 사회 운동으로서 일본양명학이 제창되고 양명학의 현창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에도시대에 일정 정도 일본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양명학 실천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에도시대에 양명학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그것이 현실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해석, 실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시오 츄사이와 요시다 쇼인 등이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서 일본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고 공감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양명학이 생명력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양명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일본 사회는 양명학을 잘 수용하여 사회 개혁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토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 저변에 널리 퍼져 있던 불교적 사유 그리고 단순 명쾌함과 행동을 중시하는 사무라이 문화이며, 그런 것들이 양명학의 정신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소개할 사상가들의 치열한 모색도 양명학이 일본에 잘 정착한 이유였습니다.
주1) 고지마 쓰요시, 신현승역, 사『대부의 시대 - 주자학과 양명학 새롭게 읽기』, 동아시아, 2004, 82쪽.
주2) 호사카 유지, 「일본으로 전래된 성리학의 변화과정 고찰」, 『일본학연구』72, 2024, 14-15쪽.
주3) 이새봄,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유학 삼부작’ - 근대 일본 유학사의 시초」, 『한국사상사학』61, 2019, 17쪽. 이혜경,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에도 유학 삼부작」, 『태동고전연구』50, 2023, 319쪽.
주4) 김선희, 「일본 메이지 시대 양명학과 근대화」, 『양명학』64, 2022, 125쪽. 鄧红, 「日本阳明学”的真实与虚构」. 이새봄,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유학 삼부작’ - 근대 일본 유학사의 시초」, 3쪽, 19쪽.
주5) 박균섭, 「근현대 일본양명학의 특성 분석」, 『철학사상』83, 2022, 3쪽.
주6) 김선희, 「일본 메이지 시대 양명학과 근대화」, 136쪽. 신현승, 「일본의 근대 학술사조와 양명학」, 『일본사상』14, 158쪽.
주7) 이인화, 「근대적 학술로 재편된 양명학의 국가주의적 변용―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 연구」, 『일본학연구』73, 163쪽.
주8) 요시다 코헤이, 정지욱 역, 『일본 양명학』, 259-3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