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허리가 잘려 나간 지 77년이 지났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다. 동독과 서독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지도 어언 3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계 모든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나름대로 번영하고 있는데 왜 우리 민족은 이토록 하나가 되지 못하고 아직까지 서로의 이념과 체제 안에 같혀 살고 있을까. 이 시점에서 두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통일독일의 탄생은 차열한 외교 전쟁의 결과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 4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동서독 6개국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를 뒷받침한 최대의 공감대가 독일 통일을 승인한 이른 바「2+4 협정」(동·서독+미국·소련·영국·프랑스)’이다. 1990년 제정된「2+4 협정」은 특별한 방식으로 세계적 중요성, 고유성, 대체 불가능성을 부여받았다. 수십 년에 걸쳐온 적대국 간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 핵전쟁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대결과 긴장 완화(데탕트, détente)의 국면이 요동치며 교차했던 긴 세월을 극복했다. 유럽 통합의 과정은 진일보하였으며, 세계를 동쪽 진영과 서쪽 진영으로 양분한 정치적 분단을 종식 시켰다. 냉전 체제 아래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미·중 강대국들의 각축전 속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나갈 즈음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사령관과 중국군 사령관 및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고 만다.
이후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자하는 자주적인 통일 노력은 지속되어 왔다. 1980년대 국제사회가 탈냉전 시대를 맞이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분단 47년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이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의 잇단 방북으로 대화의 물꼬는 이어져왔다.
물길이 막힌 물은 썩어 버리기 쉽다. 윤 정부의 소극적 대북정책은 대부분의 민간교류를 위축시켰을 분 아니라 ‘담대한 구상’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명제만 제시됐을 뿐 이렇다 할 대북 정책 제안이나 대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물길을 이어줄 만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 민족의 통일 문제에 대한 윤 정부의 관심은 국내 정치 문제에 가려져 그 흐름조차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시대, 일본의 제국주의화, 소련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경제 안보 위협 등 동북아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대륙에 연결된 반도국의 특성상 강대국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친미 위주의 외교·안보정책은 자칫 자주권의 상실로 이어져 또 다른 정치적·경제적 속국이 될 우려도 크다. 윤 대통령이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발표한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은 미-중 패권·전략 경쟁 와중에서 확실히 미국 쪽에 서겠다는 공개선언에 가깝다. 중국의 핵심 국익이 관련된 문제인 대만해협을 두고도 중국의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는 뜻을 명시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 동북아 평화를 위한 역내 외교 관계를 감안할 때 우리가 남중국해에 대한 미중 갈등 속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지혜롭지 못하다.
우리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한미일이 북중러와 맞서는 동북아시아의 신냉전시대이다.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정세를 전반적으로 살피고 대응할 숭 있는 외교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