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실습에 들어선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곧장 복부를 가르고 내부부터 관찰하지는 않는다. 아주 겉껍질부터 벗겨낸다. 얼마나 많은 층이 인간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지, 그 사이에 실가닥만큼 가는 신경을 찾아내고 다시 포를 뜬다. 아주 얇게. 합쳐져 있던 사람을 기능과 모양으로 분류할 수 있는 단위별로 쪼갠다. 그래야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강의실에 들어선다. 사람이 죽는 이유를 낱낱이 파헤친다. 직접적인 작용에서부터 거슬러 타고 올라가 근원적인 이유까지 찾아낸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아주 잘게 잘게 다져서 구할 수 있는 만큼으로 조각낸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도 살릴 수 있도록.
소매자락 아래의 붉은 실금마저도 분해된다. 일련의 증상을 우울증, 정도의 병명으로 진단한다. 병식과 양상에 따라 이미 매뉴얼화되어 있는 치료방안을 선택한다. 치료될 지도 모른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건 의학이 아주 포르노그래피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몸과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고장난 이유와 그것을 고칠 방법마저 파헤치는 행위는 신체에 대한 모든 미스터리를 지운다. 몰라서 신비로운 것, 궁금해지는 것,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 찬 바람에 오소소 솟는 솜털, 빛에 부딪히는 머리카락 같은 것들은 경이롭다. 고전적으로 미적이지 않아도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이 담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육신은 예술이 된다. 그러나 의학은 그 모든 기적과 아름다움을 벗겨 내린다. 피부를 얇게 벗겨내고 지방을 걷어내어 근육을 박리하고 혈관과 신경을 찾아내다 보면 인체는 대상이 된다.
죽음과 삶조차 해체된다. 죽음과 삶을 겪는 사람과 그의 이야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죽음을 분해해서 도해할 줄 알아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장 당면한 죽음을 멀리 치우고서야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은 그 후에서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반박할 것이 없다. 맞는 말이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살리고 봐야한다는 것도, 더 효율적으로 잘 살릴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죽음을 분해해야 한다는 것도 옳다. 나만 하더라도 그것에 인생을 투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저, 그 과정에서 소실되는 아름다움에 대해 애도할 뿐이다. 아름다움과 생기가 없어진 삶에 약간은 지칠 뿐이다.
나는 그래서 캠퍼스를 벗어난다. 하얀 가운을 곱게 접어 서랍장에 넣어놓고 길을 나선다. 사람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아픈 사람을 보더라도 병과 건강만 볼 눈만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이야기를 들을 귀를 열어놓기 위해서. 그렇게 환자에게 일일이 마음을 쓰다보면 심력이 소모되고, 그러다보면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쯤은 안다. 차가워 보이는 의사 선생님들은 사실 마음을 다치지 않고 묵묵히 계속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딱딱한 외피를 두르고 다닌다는 것도 안다.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효율을 포기하고 싶다. 조금 더 다가가고, 더 부딪히고. 맨마음으로 다정해지고 싶다. 생존이 아니라 삶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의학은 병을 고친다. 병을 고치는 의사조차 사람이기에,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맞댄다면 그건 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릴 지도 모른다. 그런 가느다란 희망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