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서 혼란스럽지만 그것마저 한번 사랑해 보려고
손때 묻은 책처럼 날카로운 모서리가 닳아서 둥글어졌다. 칼같이 그어놓은 선이 흐려졌다. 새 종이 위의 잉크만큼 선명했던 것들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도,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하는 것도 계속 머뭇거려진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도 계속 걸어가는 게 맞을 거라고 막연히 믿어본다. 그것 말고는 해 볼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본래 나는 선이 아주 명확한 사람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새로운 사람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지금을 충만하게 살아가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언제나 현재의 적정량은 미래를 위해 할당시켜 놓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도 해야 하는 일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최선을 다했다. 밤산책가에 나가서 글을 쓰고 출판을 할 때도 내가 우선시하는 것들을 먼저 해야만 했다. 그렇게 살아가야 후회가 없이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후회는 없었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작은 미련은 남아도 매일을 괴롭히는 거대한 후회는 남지 않았다. 그래서 만족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자그마한 불안이 마음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게 진짜 맞는 걸까? 무언가를 진심으로 선택해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후회가 너무 두려워서 그 길만 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비겁한 게 아닐까? 출판업에 종사하려는 사람, 출판사를 만들어보려는 사람, 글을 전업으로 삼으려는 사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커지기만 했다. 이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길을 가려고 했다. 안전한 길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하고 싶은 길을 택하는 용기가 때로는 경이로웠다.
그때부터 선을 일부러 조금씩 흐리려고 했다. 시간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않고 믿음이 아직 연약하더라도 마음의 빗장을 조금은 풀어버렸다. 미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를 조금 더 사랑해 보기로 했다. 글과 출판이 내 본업이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이니까 더 많은 시간과 마음과 몸을 써보려고 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잘 모르게 되어버렸다. 적당하게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던 삶이 내 손아귀를 벗어나 버린 느낌도 든다. 모눈종이처럼 규격화되었던 일상이 아예 종이 바깥으로 나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을 열었던 사람 중에서는 아예 손을 맞잡게 된 사람도 있지만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떠나간 사람도 있다. 현재를 살아가려고 노력했다가 미래가 조금쯤은 흐려져 버렸다. 밤산책가에서도 그렇다. 내가 조금 더 애착이 생겨서 조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썼다고 해서 그게 진짜 도움이 되었을까? 내가 한 것의 효용이나 가치가 있기는 할까? 변변한 능력도 없는 내가 그곳에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약간은 물러났다. 상황이 변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상황을 핑계 대고 조금 멀리 왔다.
그래도 아예 선을 긋고 발을 빼고 싶지는 않다. 열정이 소진되고 마음이 지쳤어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이 정도면 됐어, 하고 거대한 선을 만들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선이 흐릿하다면, 선이 없다면 언젠가는 다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가능성을 믿어본다. 믿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