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날 더 그리운 레몬맛 이탈리아

새콤하게 기억되는 이탈리아 남부의 한여름, '아쿠아 디 파르마'의 풍경

by 퍼퓸그라피

언제 그렇게 비가 쏟아졌냐는 듯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잠시 눈을 감으면, 미처 양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하얀 팔뚝을 노릇하게 굽는 햇살의 위치를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아주 천천히 걸으면 은근하게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당장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쐴까 싶다가도, 살랑살랑 흔들리며 하얗게 반짝이는 진한 초록의 가로수 잎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뭐랄까 변덕스러운 마음을 품고 사는 계절.


한국의 뜨거운 여름을 지날 때면 아말피 해안(The Amalfi Coast) 옆을 낡은 버스로 달리던 몇 해 전의 나를 생각한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구불구불한 골목과 이탈리아 남부의 쭉 뻗은 해안도로의 닮은 구석은 거의 없지만 이 계절의 감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더워도 너무 덥다. 하긴 요즘 날씨가 아무리 덥다 해도 내 인생 그보다 더운 곳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pexels-oleksandra-zelena-495851763-18523342.jpg


파아란 바다, 그보다 더 새파란 하늘, 구름 한 점 있을까 말까 한 깨끗한 공기 아래 절벽을 따라 빽빽하게 자리 잡은 형형색색의 집들이 절경을 이룬다. 아말피 해안이라 불리는 이곳은 1997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갈 때쯤 처음 그곳엘 갔는데, 말로만 들어본 상상 속 지중해 마을의 실체를 만났다. '이럴 수가! 내가 생각한 그대로라니!' 어릴 적부터 보던 포카리 스웨트 광고가 만들어준 상상력이다.


당장이라도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한여름의 한낮, 작은 버스에서 내린 한국인 관광객들 빼고는 모두 수영복 차림이었다. 해안가의 피서객들은 나이, 성별, 인종과 관계없이 톡톡 튀는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동양인은 진한 오렌지색의 긴팔 셔츠와 허벅지 중간쯤 오는 청바지를 입었는데, 더위와 물놀이 그 무엇도 즐길 수 없는 복장 탓에 신발이라도 벗어보자, 용기를 냈다. 얼마나 더우면 바닷물도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만.

아말피 해안은 서쪽에 있는 포지타노(Positano)부터 동쪽의 비에트리 술 마레(Vietri sul Mare)라는 동네까지 쭉 뻗어있다. 10개도 넘는 마을이 모여있는데, 들어본 이름이라고는 포지타노뿐이라 그냥 포지타노로 뭉뚱그려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포지타노밖에 모른다. 아말피 해안에서 가까운 도시 중엔 나폴리와 폼페이, 소렌토가 있는데, 이것도 나폴리 피자와 폼페이 유적, 기아 자동차 소렌토를 알고 있던 덕에 아직 기억하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이탈리아 남부 마을은 우리 생활에 꽤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shutterstock_2299740647.jpg


해안도로에서 물이 있는 해변까지는 꼬불꼬불한 해안마을 구석구석으로 직접 걸어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 양옆으로는 온갖 상점이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 지역 특산물인 레몬으로 만든 상품을 판매한다. 레몬 샤베트, 레몬 사탕, 리몬 첼로라 불리는 레몬주까지. 접시도, 자석도, 모자도 온통 레몬 무늬로 가득하다. 태양이 작열하는 그 동네에서는 레몬이 그렇게 잘 자란다고 한다. 여름이 길고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와 습한 아열대성 기후가 함께 나타나 실한 레몬을 수확하는데 제격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기념품은 레몬 사탕인데 가게마다 서로 원조를 주장한다. 어느 골목의 몇 번째 집이 진짜고 그 맞은편은 가짜라는 인터넷 블로그의 상세한 설명은 마치 제주도 동문시장의 한라봉 초콜릿 가게 방문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포도알 크기의 동그란 모양을 한 포지타노 사탕은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노란색을 띠고 있다. 투명한 포장지 양쪽 날개를 바깥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사탕이 도르르 구르면서 새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물 건너 온 건 다르네-라며 혀로 이리저리 사탕을 굴려 녹이다 보면 가운데에 다다랐을 때 색다른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썬키스트 사탕의 원조가 이거였어?' 그보다는 훨씬 묽은 제형의 고농축 레몬 오일이 마지막까지 기분 좋은 캔디 타임을 만들어준다. 이게 포지타노 사탕의 킥이다. 지금은 쉽게 수입되어 동네마다 있는 연둣빛 간판의 드럭스토어에서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딱 한 알씩만 나누어줄 수 있는 귀한 기념품이었다.


shutterstock_2169870245.jpg


커피에 길들여진 직장인이지만 특별히 피로회복이 필요한 날에는 레모네이드를 마신다. 그럴 때마다 카페의 차가운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포지타노 골목의 레몬 가게들을 떠올린다. 상상만으로 달콤하고 황홀하다. 톡 쏘는 목 넘김과 함께 입안을 간지럽히는 고농축 레몬의 확실한 존재감. 물론 설탕 시럽이 한가득 들어있겠지만 액상과당이라는 해로운 글자는 잠시 잊기로 한다.


이 아름다운 장면들을 생생히 떠올리게 한 건, 바로 이름 그대로의 풍경을 가진 이 향기와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아쿠아 디 파르마 베르가못 디 칼라브리아. 겉모습은 이탈리아 남부의 해안도로를 따라 옆으로 쭉 뻗은 바다의 색깔이었고, 스치는 향은 상큼하고 청량하면서 기분 좋게 달콤한 포지타노 레몬 사탕의 실루엣이었다.


Acqua-di-Parma-Bergamotto-di-Calabria-Eau-de-Toilette-th.jpg

매일 새로운 레몬 사탕을 하나씩 까먹으며 더위를 이겨내는 동안 하늘은 높아지고, 땅은 단단해지며, 바다는 깊어지고, 레몬은 익어간다. 여름 덕에 즐기는 새콤하고도 황홀한 감칠맛 아니겠는가.


계절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강하다. 레몬 사탕보다 조금 더 달콤한 마음이 필요할 땐 카프리의 아란치아를, 촉촉한 눈빛이 필요할 땐 아말피의 피코를 집어 들면 된다.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이름 그대로 오렌지와 무화과의 싱그러움을 정직하게 마주해보시라.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와 타오르는 태양 속으로 걸음을 내딛고, 지중해 바다를 떠올리며 찰나의 시원한 마음을 얻고, 레몬 사탕을 상상하며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꼴깍 삼키고, 별다를 것 없는 끼니로 기력 없는 몸을 꾸역꾸역 채운다. 우리를 든든히 채워줄 열매들이 싱그럽게 익어가는 시간을 함께 세어보면 갈수록 뜨거워지는 여름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Editor. Sonior

향수 브랜드 에세이를 기록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향수는 퍼퓸그라피 자사몰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