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LICA : 복제품 혹은 추억 회상
성인이 된 내 방에 처음 들인 향수병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레이지 선데이 모닝’이었다. 그것도 마음마저 든든한 100ml 용량으로. 한 번 분사할 때 0.1ml 정도라고 생각하면, 천 번은 족히 뿌릴 수 있는 대용량이었다. 양쪽 귀 뒤에 칙칙, 아우터 안쪽 옷감에 한번 칙 뿌리는 루틴으로 따지면 삼백 번은 넘게 쓸 수 있었던 셈.
향수란 자고로 뿌리자마자 코끝에 가닿는 확산력에 놀라 고개를 슬쩍 뒤로 빼게 하는 것 아닌가. 10대 시절 그렇게 그렇게 아껴 뿌리던 베이비 파우더 향 향수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런데 팡팡 뿌려도 미간 찌푸리는 일 없이 부드러운 이 향수는 어릴 적부터 엄마 화장대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진한 분내나 어른스러운 꽃향기와는 달랐다.
“이거 어디에서 맡아본 냄새인데?”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흐릿한 장면이 떠오르는 이 향수에 그렇게 입문하게 되었더랬다. 분명 처음 맡는 향은 아니지만 그려지는 장면이 명징하지는 않았다. 흔치 않게 약속이 없는 주말 아침에- 모처럼 맑은 하늘이 보여 머리맡의 창문을 열고 그대로 누워 얼굴 위로는 바람을, 손등으로는 이불을 쓰다듬던 언젠가의 기억. 뭐였더라, 뭐였더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향에 스며들어 갔다. ‘레이지 선데이 모닝’을 처음 만나던 날 내 머릿속 캔버스는 그 장면으로 채워졌다.
감각 기억 중에서는 만지고, 듣고, 보고, 맛본 것보다 향기에 대한 기억이 월등히 높은 유지율을 기록한다고 한다. 낯설지 않고 익숙한 이 느낌. 어느새 나는 같은 향기를 만났던 순간을 찾아 기억과 추억 사이를 오갔다. 가끔은 상상의 영역을 드나들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자꾸만 그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 똑똑한 전략이 아닌가. 마르지엘라 향수는 열이면 열, ‘나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보게 했다.
게으른 주말 아침답게 조금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아무 이유 없이 침대에 드러눕는 시간.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좋은 날, 바람 소리만 가득한 이 계절의 오후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플라잉’은 나른한 공기 속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그 깨끗하고 시원한 향취는 무게감 없이 가볍고 투명해서 현실감 없이 떠 있는 기분을 선사한다.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분을 향기로 만들다니, 약제병 모양을 가진 레플리카 컬렉션 중에서도 남다른 컬러와 라벨을 가진 판타지 라인에는 재미있는 점이 있다. 블랙 보틀 제품은 이름에 걸맞게 ‘판타지 노트’가 쓰였는데, 플라잉에는 ‘오조닉’이라는 판타지 노트가 쓰였다. 오존이라. 우리 머리 위의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오존층을 다녀왔다는 뜻이 아니라, 조향사의 상상으로 탄생한 향료라고 이해하면 쉽다.
눈을 감고 ‘플라잉’을 깊게 들이마셔 보면 순간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만큼은 몸 누인 곳이 푹신한 이불 위가 아니라 보송한 구름 위가 된다. 어릴 적 자주 꾸던 하늘을 나는 꿈에서는 이런 향이 났다. 정확히는 이 향을 맡는 순간 수도 없이 꿨던 그 꿈이 떠올랐다고 하는 게 맞겠다. 신비롭고도 아득한 경험이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저녁 약속에 조금 더 공을 들이게 된다. 가벼운 데이트였는데 어떤 향을 뿌릴지 고민하다 보면 괜히 긴장되기도 한다. 이럴 땐 조금은 분위기 있고 깊은 향을 집어 든다.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해질녘의 바람에는 경계하던 마음도 번번이 풀어지고 마니까.
로맨틱한 선율에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맡겨봐도 좋은 날, ‘재즈클럽’은 별다른 멘트도 스킬도 필요 없이 농밀한 무드를 만들어 준다. 럼에 절인 바닐라처럼 은은하게 달콤하면서도 포근한 느낌과 진한 여운은 같은 이름의 공간과 향 모두가 가진 승부수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세상에서 밝은 시간에 레이지 선데이 모닝이 있다면, 어두운 시간에는 재즈클럽이 독보적으로 빛을 발한다. 이 존재감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
좋아하는 계절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 내가 초여름을 기다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테라스 때문이다. 노을빛 물드는 테라스 자리를 예약하고 와인바로 향하는 날마다 처음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곳에 들어서던 걸음부터 와인 리스트를 훑어보던 시선까지, 내내 긴장감이 묻어나던 시절에는 미숙함이 그 자체로 무기였다. 그게 어른 흉내인 줄도 몰랐던 그때는 달콤한 와인이 어찌 그리 맛있던지.
성숙한 척 조심스레 부딪히던 와인잔, 침이 고이는 당도를 참지 못하고 꿀꺽 삼켜버리던 가벼운 레드 와인, 점점 과감해지던 푸어링까지. 눈빛이 닿을 때마다 우리 사이에는 잔잔한 스파크가 터지고, 가끔 스치는 손끝이 간지러워 괜히 와인잔으로 손을 옮기곤 했다. 어김없이 져버리고 마는 달콤한 날씨, 깊어져 가는 밤공기와 함께 무르익는 야외 테라스의 로맨틱한 분위기에 마음을 홀랑 다 내어주던 여름이었다. '온 어 데이트'가 선사하는 그날의 기억.
햇살 좋은 날을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비가 그친 뒤의 땅 냄새에 마음을 빼앗기는 스스로가 가끔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 ‘웬 더 레인 스탑스’의 첫 시향에서 곧장 매료되고 말 거다. 잔잔한 빗소리를 배경 삼아 걷는 돌길, 풋풋한 흙냄새와 나뭇잎이 비에 젖은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젖은 공기라고 할까.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누구나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 냄새 말이다.
쏟아지는 비가 오히려 반가운 무더운 여름날, 번화가의 한가운데서 비를 피하다가 빗줄기가 잦아들어 거리로 걸어 나오는 순간. 포장도로 위로 물이 빠지고, 유리창마다 촘촘히 맺혔던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장면. 이런 날의 풍경은 도심에서도 나만의 고요를 만들어준다. 마르지엘라는 평범한 장면을 이야기로 살려낸다.
녹음의 생명력이 몸서리치게 좋은 날 ‘소울 오브 더 포레스트’는 조금 더 깊은 자연으로 내 손을 잡아끈다. 풀과 나무, 나무껍질, 그리고 숲속 공기에 섞인 약간의 습기까지. 싱그럽다기엔 조금 부족하고, 차분하다고 하기엔 생기가 넘친다. 숲에게 영혼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야, 상상만 했던 장면이 향기로 그려진다. 내 일상에는 없지만 분명히 마음이 편해지는 안락함에- 언젠가 그 숲에 발 디뎌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현실에서 살짝 비켜난 기분을 만들면,
주어진 오늘을 힘차게 살아갈 기운이 나기도 한다.
기억하고 싶은 하루는 이렇게 쌓여 간다.
마르지엘라 향수는 거창한 판타지를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어쩌면 지나쳤을 장면들을 다시 꺼내볼 수 있게 도와줄 뿐이다. 레플리카(REPLICA) 시리즈는 복제품이라는 이름 그대로 ‘특별한 장소, 시간, 추억’을 본떠 향기로 재해석한다. 구체적인 경험이나 분위기를 향수의 이름과 향으로 표현하는데, 이 직관적인 표현력에 번번이 놀란다. 그게 누구의 추억이냐 싶지만, 보편적인 경험을 발굴해 공감되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게 마르지엘라의 능력 아닌가.
향수의 시작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한 번쯤은 눈 감고 메종 마르지엘라를 선택해 봐도 좋다. 이들의 향기는 나에게도 있었던 이야기를 새삼스레 발견하고, 그날의 공기, 감정, 분위기를 다시 만나게 해준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매일 살아도 소중하듯, 오랫동안 곁에 두어도 여전히 좋은 것들이 있지 않나.
Editor. Sonior
향수 브랜드 에세이를 기록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향수는 퍼퓸그라피 자사몰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