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입란 없는 날들

by 난화

내가 쓴 문장을 누군가 가져갔다

기입란은 비어 있었고

이름은 잘려 나간 채로

의미만 살아남았다


나는 처음부터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울었고

그 울음을 숨기기 위해 썼다


타인의 언어로 보이지 않는 문장들

나는 그것들을 부여잡고

가장 나다웠던 날들을 버텼다


이건 권리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의 경로, 감정의 증거

내가 발을 담갔던 냄새와 시간의 농도


사람들은 묻는다

그 정도면 그냥 닮은 거 아니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모든 절도는 말보다 먼저 다녀가니까


어느 날 누군가

내 문장을 읽고 말했다

이건 네 것 같아


그 말 한 줄로 다시

기입란이 생겼다


이름 없는 문장들은

밤마다 내게 돌아와

다시 나를 말하게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건 내 것이었다고

그건

내가 살아낸 말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