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I 엄마가, 확신의 E 엄마를 만났을 때.

E 심은 데 E 나고, I 심은 데 I 날까?

by 낯글


학부모 공개수업에서 처음 본 H엄마가 언제 차 한 잔 하자며 내 연락처를 물어왔을 때, 반가우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다. 아이의 학교 생활을 생각한다면 반 친구 엄마를 한 명쯤 사귀어 두면 좋을 테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아이 친구 엄마들의 모임은 곧 내 아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저 편치만은 않았다. 함께 공개수업에 나섰던 남편은 그냥 인사치레로 건넨 말이니 따로 연락은 안 올 거라고. 그러니 너무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했지만. 그럴 리가, 아까 그분 말하는 거 못 봤어? 그냥 인사치레가 아냐.


[안녕하세요 저 H 엄마예요, H가 J 얘기 많이 했는데 시간 될 때 같이 차 마셔요.]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바로 그날 오후 문자가 왔다.


어쩌지, J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아아, 그때 체스&멘사보드 같이 들었던 친구구나. "아, H가 체스 잘하는 친구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오늘 뵙게 돼서 반가웠어요. 시간 되실 때 차 마셔요. " 우선 나도 칭찬으로 응수했다.


[혹시 언제가 편하세요?] ;;;;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볼까요? 차 말고 식사는 어떠세요?] ;;;;

[혹시 K 엄마도 같이 보는 건 어때요?] ;;;;

[혹시 카톡은 안 하세요? 혹시 저 뜨나요? 뜨면 말 한번 걸어주세요 ㅋㅋ] ;;;;


한 가지 질문을 겨우 넘겼나 싶으면, 그다음 질문이 휘몰아쳤다. 번호를 교환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문자를 보내왔고, 만남이 가능한 날짜를 물어왔으며, 첫 만남에 식사 약속은 어떠냐는 질문에 응하자마자 다른 엄마까지 동행하는 건 어떠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게다가 읽음 상태가 바로 표시되고 단체대화가 가능한 카톡이라니. 순식간에 약속을 잡고 곧바로 카톡친구추가까지 마무리된 뒤에야 대화가 종료되었다. 그렇다. H엄마는 확신의 E였다.


오랜만에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아니 차라리 그냥 낯설기만 하다면 좋으련만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모임이었다. 2학기 들어서 아이는 친구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의 말을 빌리자면, 반 아이들은 찐찐친구가 있는데 자기는 그저 친구이기 때문에 자기를 놀이에서 끼어주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다. 종종 놀이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아이의 고민거리였다. 아이가 친구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나 때문은 아닐까? 다른 엄마들과의 만남에 소원하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만들어주는 것에 소극적이어서 그런 걸까라는 걱정과 미안함이 밀려오던 때였다. 그즈음 성사된 만남이었다. 그러니 나는 I라서 안 되겠다는 핑계뒤에 숨을 수는 없었다.


각자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초밥집에서 만났다. 나는 긴장했는지 수저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식사도 좀처럼 편히 넘어가질 않았다. 핸드폰은 언제쯤 사줄 계획이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J는 어떤 학원을 다니고 있는지, 집에서는 어떤 학습을 시키고 있는지 구체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나는 H엄마와 K엄마가 던지는 질문에 번갈아가며 대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면 어떤 교육을 시키는지 묻고 답하는 것이 언젠가부터는 통과의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남에 따라 H엄마와 K엄마가 편해졌고 대화도 유쾌했다. 대부분이 긍정적인 대화였고 나보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제가 I라서 이 자리 나오는데 용기가 필요했어요."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를 건넸다. 혹시라도 다음에 또 갑작스럽게 약속이 정해질 걸 대비해, 핑계를 만들어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 문자로 H엄마가 확신의 E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웃음 "


그런 나의 말에 놀리기라도 하듯, 대화 중 H엄마는 언제 우리 집에 놀러 가면 안 되냐고 물었고 나는 우리 집은 지저분해서 안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집? 집에온다고욧! 맙소사. 질색팔색하며 말하자, H엄마가 웃으면서 마음의 준비가 되면 갈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우선 자기네 집에 먼저 놀러 오라고 했다. 오 맙소사. 집이요? 집이라구욧!


1시간의 식사와 2시간의 커피타임이 이어진 후, 아이들 하교 시간이 되어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H엄마가 다음에는 식당에서 만나서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우리는 저녁을 먹자고 약속을 잡자고 했다. 2주 뒤쯤 어떠냐며 스케쥴러를 확인했다. "네? 2주 뒤요? (추석 지나고 바로라니, 명절 때 고향 갔다 오면 사람들 많이 봤으니까 일주일은 쉬어야 하는데..) 저희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서 또 봐요? 그렇게 자주요? 그럼 우선 두 분이 만나는 걸로 하시고, 저는 그때 상황 봐서 되면 합석할까요? " "에이 - 안 돼요. 언니 안 오시면 저희도 안 만나죠. " K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나이를 이야기한 후 어느새 호칭이 '언니'로 자연스럽게 변해있었다. K엄마는 본인도 I라고 했지만, 아니었다. 변죽을 울리는 말투를 보아하니 K엄마도 I는 아니었다. I주장인 일뿐. 절대 I들은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구욧. 오 맙소사.


그렇게 헤어지고 집으로 와서 아이가 올 때까지 침대에 널브러져 쉬었다. 그리고는 정확히 2주 뒤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내일 아이들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죠? 어디 갈까요? 혹시 생각하시는 데 있어요?]


그리고 j가 말했다. 엄마, 나도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