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애쓰고 있다는 걸

by 낯글

‘노력이 재능’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 말을 듣던 시절의 나는 그 평가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전교생 대표로 수학 올림피아드 반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대표로 뽑혔지만 나는 어려운 문제를 쓱쓱 풀어내는 천재형은 아니었다. 언제나 될 때까지 붙드는 노력형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그런 나를 두고 다른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듯 내 노력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유쾌하지 않았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늘 조금 모자란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영어가 내 발목을 잡은 것은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그 시절 토익 900점대의 점수는 흔한 점수는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던 직장을 지원하기 위해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그저 반드시 갖춰야 하는 점수였다. 컴퓨터 자격증처럼, 받아내야만 하는 점수였다.


그 점수를 위해 890점과 895점이라는 성적표를 몇 번이나 받아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딱 한 문제만 더 맞으면 될 것 을, 책을 쌓아두고 문제를 풀어대도 점수는 늘 조금씩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목표 점수가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시험을 반복해서 봤다.


공기업 채용과정 중 어렵사리 전공시험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조차 마냥 기쁘지 않았다. 그 공사의 특성상 곧바로 영어 라이팅과 스피킹을 보는 다음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장에 가고 싶지 않았다.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 서서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무슨 문제가 나오든 이 답을 적겠다는 심정으로, 수십 편의 논문을 뒤져 그 회사와 관련된 현황과 개선점을 몇 장으로 정리해 통째로 외워 갔다. 그리고 정말로 그 문제가 나왔다. 나는 학술논문이 구사하는 언어로 거의 완벽한 답안을 써냈고, 부족한 회화 실력을 딛고 결국 그 시험을 통과했다.


내게 오는 운조차도, 늘 노력은 기본값이었다. 노력은 내 삶의 디폴트값. 그러니 결과가 늦게 오는 일쯤은 어느 순간부터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늦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내 몫의 결과는 늘 늦게 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육아에 있어어도 적기 교육이라는 말은 내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늦는 것 역시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늦을 수도 있지, 언젠가 잘하게 되면 되니까.


J는 한글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겨울에 겨우 떼었고, 수학도 1학년 2학기에서야 처음 연산 문제집을 풀렸다. 하지만 영어만큼은 달랐다. 내 노력 대비 번번이 발목을 잡았던 그 영어 실력을 아이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섯 살 때부터 영어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알파벳과 파닉스를 먼저 가르치기보다는, 그냥 재미있는 영어영상으로 노출하고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는 쪽을 택했다. 나는 피곤했지만 아이는 즐거워했다.


자주 도서관에 드나드니 도서관 사서가 SR 테스트를 권했지만 아이는 스스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응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애초에 영어를 ‘학습’으로 접근한 적이 없었기에 조급하진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영어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테스트를 보기 시작할 때도 괜찮았다. 우리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시험을 보지 않았다.


문제는 학교 교과로 영어가 등장하는 초등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이었다. 저절로 영어책을 읽게 되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아이는 여전히 영어를 읽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영어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SR 테스트에서 2.8점을 받았다고 했다. 영어 책은 어떻게 읽히냐고 묻던 그 엄마의 톤이 어느 순간 달라져 있었다.


그저 아이가 영어를 재미있게 따라오면 실력은 쌓이겠거니 하고 4년째 인풋만 쌓고 있었다. 4년 동안 거의 매일 2시간씩 영어 영상을 보고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그렇게 쌓인 책이 어느새 몇 천 권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도 아이는 책을 스스로 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도 느끼고 있었다.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과 비교해 자신의 영어 실력이 어딘가 뒤처져 있다는 것을.


“나도 테스트 잘 보고 싶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바꿨다. 결국 파닉스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 일찍 스스로 일어나 음원에 맞춰 책을 읽었다. 방학 내내 정해진 분량의 파닉스를 매일 공부하고, 나와 함께 쉬운 책부터 다시 낭독을 했다. 대견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너무 놀이로만 접근해서 뒤쳐진 걸까. 처음부터 파닉스를 했더라면 지금쯤은 달랐을까. 시행착오로 늦어진 거라면 지금이라도 더 달려야 하는 걸까. 조급해졌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 증명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 마음을 먹자, 아이의 읽기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보자. 당분간만 힘내보자. 그렇게 양을 늘려갔다. 하지만, 영어책을 보는 일이전처럼 즐겁지만은 않았다. 해야만 한다는 것, 잘하고 싶다는 압박이 눈에 보였다.


영어책을 읽다가 짜증을 내는 횟수가 늘었다. 그렇게 할 거면 그만하라고 했지만, 아이는 더하겠다고 했다. 잘하고 싶으니 더 하겠다고. 차라리 내 일이라면 나는 더 나 자신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리고 결국 결과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 과연 내가 하는 이 교육은 강압적인 걸까, 아니면 자발적인 걸까. 어디까지가 아이의 의지고, 어디부터가 내 기대일까.



오늘 아침, 아이는 6시 20분 알람에 맞춰 혼자 일어났다. 감기가 걸려 힘들 텐데 더 자라는 말에도 졸린 눈을 비비며 음원을 틀고 영어책을 펼쳤다. 한 시간쯤 뒤 거실로 나갔을 때, 아이는 갑자기 후다닥 음원을 따라 책을 펼쳤다.


“너 이거 보고 있었던 거 맞아? 왜 갑자기 보는 척해?”


아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잘할게.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더 열심히 할게.”


“누가 잘 하래? 힘들면 그냥 자면 되잖아. 왜 일어나서 이러고 있어. 차라리 자. 하는 척하지 말고. 그럼 피곤하기만 하잖아.”


목소리를 높이다가 문득 멈췄다.

아차 싶었다.


“이 책이 어려우면 다른 쉬운 걸 보겠다고 해.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말하고 멈춰. 그것도 아니면 그 시간에 그냥 더 자.”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아냐, 잘하고 싶어. 계속할 거야.

그리고… 엄마가 화낼까 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가 화나는 건 네가 영어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야. 이렇게 힘든데도 말 못 하고, 괜찮은 척해서야.”


나는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영어를 잘하고 싶다.' '친구보다 잘하고 싶다’는 너의 말을 핑계 삼아 내 목표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내려놓자.

우리, 천천히 빨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