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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맞이하여 찾은 파주 장릉

by 이스라엘 이영란

서울 정릉 사람인 나는 파주 장릉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하고 보니 그랬다.

가끔 파주에 들르면 이곳 장릉에 자주 오곤 했지만 누구의 묘인지 그렇게 관심가져본적은 없다. 그저 조선 왕조의 어느 한 왕이겠거니 했다. 이효령대군파의 왕족을 자랑하는 납편을 따라 오늘도 장릉에 온 김에 설명서를 자세히 볼수 있었다. 전세계를 다니며 푯마힐과 설명서를 보던 습관이 이제 한국 방문에도 하게 된다. 이집트의 수많은 무덤들이 왕이나 왕비 대신들의 무덤이 아닌가? 이곳 장릉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실의 무덤이다. 조선16대 왕 인조대왕의 묘다.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그 인조말이다. 인조와 그 첫째 왕비의 묘가있는 곳이다.


파주 장릉은 인조대왕과 그 부인의 묘다 .파주 운천리에 있다가 뱀이 많아 영조대왕때 이곳으로 옮겼다고한다. 이 묘지의 아랫마을에 비가 오면 서해안이 넘쳐 논과 집채가 물에 잠기기도 했단다. 그래서 둑을 만들어서 비피해를 막았다 . 그 이후로 드문드문 있던 농경지들이 이제는 조직화되어 드넓게 경작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노태우대통령때 통일로를 만들면서 이곳 땅값이 급상승했고 농촌의 농부들이 땅부자가되었다.. 돈냄새를 맡은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여성이 돈많은 농부를 꼬셔 결혼한후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도있고 이 돈때문이 형제간 재산 싸움이 나기도했다. 순진한 농사꾼들에게 돈은 그렇게 두눈을 멀게 하기도 했다.


농토를 사들여 공장을 지은 곳도 많다. 지금은 농토뿐 아니라 공장들도 많이 들어섰다. 파주에 원 주민들 뿐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남편은 효령대군파의 후손이다.

세종의 형중 농사를 지으러 내려온 효령대군말이다. 늘 자신의 왕족이라며 늘 뿌듯하게 말한다.


사실 나도 전주이씨다. 왜 이성계의 위 선조들있지 않은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육용중 목조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 이중 익조에서 나온 후손이 우리 이버지다. 그러니 태조 이성계보다 우리가 높은거 아닌가? ㅎㅎ 어쨌든 이성계는 왕이 됬으니 왕족인것 맞긴 맞다.


정릉은 태조의 두번째 아내 신덕왕후 강씨의 묘가 있는 곳이다. 고려말기 명문가의 딸로 이성계가 조산을 개국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 개국전에 죽었기에 신덕왕후 강씨가 최초의 조선 왕비가 되었다. 정도전과 함께 자신의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지만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 의해 왕비의 직위도 박탈되고 능도 파헤쳐졌다. 정릉은 도성안 지금의 정동 영국대사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이방원이 그녀의 묘를 성 밖 지금의 성북구로 옮겼다.

이후 현종이 그녀의 직위를 복귀시키고 정릉도 왕위의 격식을 갖추게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조선 최초의 왕후의 묘였다.

음 맨날 왕족이 사는 곳에 산다고 자랑하던 남편에게 정릉에 대해 다시 설명해줘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우리는 왕족이 사는 장릉과 정릉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2000년 1월에 만나 5월에 상견례를 하려는데 우리가 같은 전주있 동성동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마침 우리의 뎔혼을 축복하려는지 국가에서 동성동본 결혼이 허가되었다.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는 비운의 남녀주인공이 될뻔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결혼때부터 만난 남편의 형수님이 계시다. 그 유명한 58년개띠. 나와 거의 띠동갑이다.

임신 5개월에 이스라엘에 가서 만삭이 될즈음 형님은 해산간을 위해 이스라엘로 오셨다. 22살에 결혼해 군복무를 앞둔 20살 아들을 둔 43살의 젊은 형님이었다. 30살의 나에겐 꽤 큰 어른으로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나 형님이나 둘다 어린건 마찬가지였는데 . 어린 동서 해산간한다고 겁없이 오신셈이다. 내가 29에 겁없이 이스라엘 땅을 밟은것처럼 말이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오시는 형님을 잘 모시고 올 분이 필요했던 남편은 성지순례오는 분들과 함께 올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때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오시게 되신셈이다. 하필이면 그날이 형님의 아들이 군대에 가는 날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형님은 아들 군 입대는 보고 왔어야했다. 그랬으면 늘 볼 때마다 불평하는 조카의 소리를 내가 듣지 않아도 됬을텐데말이다. 그날 안된다고 했으면 다른 팀을 알아봤을테고 아니면 그냥 직항으로 혼자 오실수도 있지 않았을까? 늘 들을 때마다 미안함 보다는 아쉬움이 더 남는다. 모두에게 피해 없이 했어야했는데 말이다. 아쉽다.


어쩌면 형님은 처음 나와보니 해외에 설렘을 느꼈을 것이다. 처음으로 간 카이로 피라미드 시내산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생활 .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 김치도 담궈주시며 음식준비를 해주셨고 남편은 잘해드리려고 음식점에도 가고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시켜드렸다.


사실 첫아이라 헌재는 며칠 늦게 나왔다.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남편은 가이드를 떠났고 딱 그날 나는 진통을 느끼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마도 그때 나와 형님은 둘이서만 베들레헴 병원에 갔던것 같다. 아이가 나오지 않아 형님과 펠라펠을 먹으며 한참을 병원주위를 걸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웠지만 감격스러운 첫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


늦게 나온 헌재의 배꼽이 떨어지기도 전에 형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남편이 헌재 목욕이며 모든 것을 챙겨주었다. 오전엔 울판을 오후엔 아이 목욕을 시켰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건 나이고 가장 힘든건 산모아닌가 . 그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그 당시엔 별로 보이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그래도 40대는 아이보기가 힘이 난다. 50대인 나는 손주가 생기면 잘 돌볼수 있을지 걱정된다.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 말이다.


내 신혼초 사진을 꺼내 오시며 이 얘기 저 얘기 많은 꽃을 피운다. 예전 아버지 사진도 보인다. 25년이.이렇게 흘렀구나 싶다. 나이드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애잔하다. 내일 모래 이스라엘을 가기전에 한번 더 부모님 뵙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이번 추석은 지난 26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26년의 이스라엘 세월동안 나이들어가시는 부모님을 잘 보지 못란것 같다.

괜히 죄스러워진다. 나 살기 바쁘다고 . 그저 일년에 한번 찾아뵙는 것이 고작이다.. 그저 지난 세월이 야속하다.


3주간의 한국 여정이 끝나간다. 오자마자 부러진 치아를 메꾸기 위해 치과를 3번을 다녔다. 갑자기 닦쳐온 대상포진에 피부과를 2번 내과를 1번을 다녔다. 대상포진 후유증을 느껴 한의사를 찾아 보약을 한달치를 지었다. 나보고 너무 쇠약해졌단다. 아니 노인도 아닌데 왜 내가 쇠약한지 . 그럴때가 있다고한다. 너무 더운 여름을 지났거나 너무 과로했던자. 잘 먹고 건강해 지라고 조언해주니 마음이 놓인다. 하도 기략이 넚어 혹시 우울증이 아닐까 걱정하던 터였기에 말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이 우울증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극복할수 있는 정도가 아니란다. 그래서 다행이다. 나는 우울증이 아니니 말이다.

씨채널 500회 특집을 위해 기자회견도 갖고 5ㅔㅔ회특집 발송도 만들었다. 500회를 이어오기까지 1ㅔ년의 세월이었지만 내가 이스라엘에 산 26년의 세월자체가 성지가 좋다 이다. 내 인생과도 같은 성지가 좋다를 책으로 내는게 내 꿈이기도하다.

또한 이스라엘 한인회장으로서 전세계 한인회장 대회에 참석하여 나도 함께 워커힐 호텔에서 자고 점심에 친한 사모님과 함께 갈비탕도 먹고 한강을 바라보며 3.4일을 보내기도했다. 하룻밤은 남편대신 유정이가 와서 함께 보낸 좋은 시간이었다.


틈만 나면 부모님 집에 들러 함께.시간을 보내기도했다. 집에 마당이 있는데 그 때문에 날파리도 많고 아직도 모기가 많다. 밤새 모기에 뜯긴거 생각하면 참 불편한 밤이었다. 그래도 엄마와 함께 티비도 보고 아침 저녁 같이 먹으며 대화도 나누고 . 우리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진한 감동을 느낀 시간들이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북에서 피난나온 실향민들이시다. 아빠는 함흥 . 엄마는 흥남 사람이다. 아버지는 10살에 피난을 나오셨는데 마침 피난민들을 위한 배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교인들을 통해 듣고는 아버지가 피난을 나올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교회 잘 다니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625동란때에도 이북에 땅을 사시고 그 땅문서를 들고 먼저 피난을 나오셨다. 다시 이북으로 돌아가려는 심정으로 속초에 정착하셨고 속초 설악산에 땅을 사시고 큰 여관을 지으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피난 나온줄은 모르시고 사촌형의 아들이 국군으로 ㄱ착출되신것을 알고는 전쟁중에 그 부대로 찾아가서는 내 핏줄이 이 아들밖에 없으니 풀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드리고 빠져 나온 이후 그 부대는 전멸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친형은 당시 16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남한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차라리 국군이 있는 것이 나을것 같아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작은 형 이야기릉 할 때마다 우신다. 한번은 에티오피아 인들이 625때 도와주었다고 하시면서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신다.


실향민들끼리 서로 어울려 살다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강원도에서 그렇게 서로 친해졌고 오빠 동생하던 사이에서 이제 부부의 연을 맺고 6ㅔ여년을 함께 동거동락 하며 사신다.


어머니느 꼬장꼬장한 아버지에게 매우 순종적이셨다. 아버지는 사라이 많으시지만 늘 말을 곱게 못하셔서 오해를 사신다. 좀 예쁘게 말하시고 상대방을 좀 이해해주면 좋은데 말이다. 아버지에게는 좀 아쉬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어려운 625 동란을 겪으시고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시고 사시를 붙으시고 변호사로서 한 평생 살아오신 아버지 . 아버지 그늘 아래 나는 그렇게 대우 받으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매번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서로에게 정도 많지만 한도 많다. 외국인들은 개인주의가 많아서 맺고 끊는게 장확한데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못하다. 계속 만나야하고 헤어질때도 안보인때까지 여러번 인사해야한다.


이제 이스라엘에 간다.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또 떠난다. 우리 부모님은 일년후에 어떤 모습으로 또 만나게 될지 늘 마음과 몸이 모두 건강하시길 기도한다.


나도 이제는 천국 소망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유한한 인생길에 주님이 주시는 천국 소망만이 불안한 인생의 마지막을 빛나게할 소망이 아닐까?


우리 부모님 . 하나님 께서 부르시는 날 까지 주님 잘 섬기다가 평안하게 삶을 영위하고 몸 아프지 않고 큰 병 걸리지 않고 평안하게 사실수 있게 해주세요 . 모든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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