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by 이스라엘 이영란

의미있는 예배

고 이정복 목사님에 대한 기억은 2002년? 크리스마스 이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에 온지 얼마 안된 때라 아는 사람도 적을 때 친한 한 사모님이 매년 모인다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우리 가족도 초대되었다. 마침 히브리대 화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딸은 그림도 잘그리는 매우 재능있는 학생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선물 따뜻한 분위기의 저녁 식사는 항상 내 기억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따고 나서 좀 여유로워졌을 때 목사님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별로 대화를 못해봤던 사모님도 조잘조잘 말씀이 많아지셨다. 박사과정의 예쁜 따님은 이제 졸업하고 포닥으로 미국을 갔고 함께 공부하던 유능한 남편이 자매를 좋아하여 미국까지 따라간 이야기 .지금은 딸을 낳아 집에 오는데 한국말 잊어버릴까봐 매일 오면 할머니 ~~할머니~~하며 한국말을 가르친다고 해맑게 웃으며 말씀하시던 모습이 내 기억속의 목사님과 사모님의 모습이다.


시장에서 마주칠때면 멋진 챙있는 모자를 쓰시고 늘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시던 분 .. 늘 두분은 만나면 상냥했다. 참 좋은 분으로 기억된다.


몇년전 한 목사님 가정의 초대로 그분 집에서 함께 같이 식사할 기회가 생겼다. 목사님은 오랫만에 나를 보시자마자 내가 이스라엘 처음 왔을 때 피아노치던 나를 기억하신다. 2001년 한인회때 내가 피아노 연주를 했었는데 그 때 목사님이 한인회장으로서 대통령 상?을 받으셨다. 마침 상을 받으실 때라 내가 연주해주어서 좋으셨나보다. 그 분의 기억을 통해 나도 그 때를 다시 회상할수 있었다.


몇년 전 우리 교회에 설교를 오셨다. 그 때 축도송으로 643장을 쳐달라고 부탁하셨다. 이스라엘의 어느 외국 교회에서 이 축도송을 하며 교인들이 나간다는 것이다.

쩌렁쩌렁하던 목사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도는듯하다.


잊고 있었다. 며칠전 고 이정복 목사님이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은 함께 가보자했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며칠을 못넘기실것 같다는 말이었다. 나는 회피하고 싶었다. 고통을 피하고 싶었다. 아픔을 보고 나서 생길 감정의 소용돌이가 두려웠다. 나는 어눌하게 말실수를 할수도 있다. 뒷걸음질 치고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말했다. 그래도 가보는게 낫다고 이게 마지막이 될수도 있다고 .


나는 용기를 냈다. 피할수 없다면 그냥 받아드리자. 그렇게 나는 병상의 목사님을 뵈러 남편을 따라나섰다. 함께 예배하는 동안 목사님이 실눈을 뜨시는 것이 보였다. 역시 찬송과 예배 가운데 평안이 오시는가보다. 아픈 목사님도 힘드시겠지만 사모님과 아들의 흐르는 눈물이 더 가슴아팠다. 남겨질 사람들 .. 그것이 더 가슴아팠다. 사모님은 너무 연약하셨고 아들은 너무 마음이 여려보였기에 말이다. 해맑게 뛰어노는 손주만이 모든 슬픔의 시간을 잊게 할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몇시간이 지났을까 목사님은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슬픔에 휩싸여있을 가족들의 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마침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찾아온 딸을 만날수 있었다. 여리한 아름다운 여대생은 이제 2명의 아이를 둔 40대 중반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집안 벽에 걸린 많은 그림들. 그 때 크리스마스 파티때 보았던 그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25.6년전 그대로 그림들은 걸려있다. 과거의 추억이 떠오르며 중년 여성의 모습과 지난 추억이 오버랩된다. 나는 다시 26년전으로 돌아가 그들과 교감하고 있다. 슬픔에 쌓인 사모님과의 옛 추억이 내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안게 했다. 지나간 시간의 간격은 지금 우리에겐 없다. 나는 26년전 처음 나에게 따스함을 건네준 가정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입관예배도 참석을 했다.돌아가신 목사님의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지시는 사모님의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너무도 평온하게 잠드신 목사님 . 가족의 품안에서 정말 너무도 평안하게 잠드셨다. 가장 가슴 아픈건 가족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올곶이 감당해야할 아픔이다.


이스라엘 한인회장으로 위로 예배를 드렸다. 50명은 족히 넘는 한인들이 모여들었다. 예배당이 꽉찬 느낌이었다.

마침 나에게 반주를 부탁하셔서 찬송가를 치게되었다.

마지막 축도송을 하려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셨던 찬송가 643장이 떠올랐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목사님과의 추억은 마지막 축도송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예배를 마무리하였다.


참 슬픈 예배였다. 지나온 과거의 사진첩이 넘어가는 중간중간 나는 사모님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엔 남편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시며 밝은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픔이 되어 돌아옴을 느끼시는지 자꾸 우신다.

나도 이렇게 잔잔한 슬픔을 주는 예배는 없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눈물이 많이 났다.


하지만 참 의미있는 예배였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의 마지막은 어떨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고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덜하지도 않았던 중도의 길을 걸으셨던 고인의 삶이 참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43년동안 이스라엘에 사셨지만 나는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반반인 삶을 사신다고 말씀하시던 고인 . 이제 목사님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시리라.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반평생 쉽지않은 이스라엘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신 고인의 길을 축복하며 사모님과 가정에 큰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