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삶이란?
쇼츠를 보면서 느꼈다. 사람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도록 디자인되어 있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매력적인 부분을 지니고 있다. 쇼츠는 짧은 영상에서 개개인의 매력을 어필한다. 성향이나 관심분야에 따라 알고리즘이 다르겠지만, 개인 콘텐츠가 주류이다 보니, 이 콘텐츠의 힘이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송승헌 주연의 영화 ‘인간중독’이란 타이틀이 떠올랐다. 영화 내용과는 별개로 제목이 인상적이었는데, 중독이 정상적인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향을 주는 해로운 탐닉이라 할 때 그 대상이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대중이 스타나 영웅을 원하는 것, 특정 인간을 우상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생명체가 다양한 환경과 변수에서 생존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개체의 복잡 다양성을 유지해야 한다. 동일한 세포가 자가분열한들 같은 것에서는 이점이 없다. 서로 다른 개체가 각자의 유전정보를 반반씩 나누어 가지면, 새로운 개체가 탄생한다. 정보를 결합하는 데는 한쪽의 작은 정보를 다른 큰 쪽으로 넘겨주는 것이 편리하다. 새 생명체를 위해 영양공급 환경을 세팅된 곳에, 최대한 단순하고 가벼운 형태로 효율적인 정보전달을 한다. 작은 게 큰 쪽으로 이동하는 게 쉽다. 결합을 위해선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야 한다.
인간은 비단 이성뿐 아니라 인간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그것이 복잡성을 유지하며 이어올 수 있었던 생명체의 프로세스이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
콘텐츠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비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인간이 천편일률적일 수는 없다. 정규분포를 따른다. 극단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을 것이고 대부분은 중간에 수렴한다. 일방적인 소비자나 생산자는 많이 않다.
일반적으로는 생산이 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자가 그에 따른 보상을 많이 가져가는 것은 응당 합당하다. 수많은 쇼츠들이 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소비자들이 존재하다. 그렇게 유지가 된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 명망 있는 자리 역시 같은 메커니즘으로 이뤄진다. 의사는 아픈 환자가 있어야지만 존재 의미가 있고, 교육자는 배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이 있어야 존재 의미를 갖는다. 범죄자가 있으면 법조인도 있을 것이고, 먹는 사람이 있으면 요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꿀을 빨아먹는 벌이나 나비를 떠올려보자, 꽃이 있어야 먹을 꿀이 있고, 꽃은 또 그 곤충을 통해 수정을 통해 개체를 유지한다. 다양한 존재가 인간 군상에 존재한다. 불필요한 존재라는 건 사실 없다. 한 개인에게도 장단점이 있듯이, 사회는 다양한 인간들의 집합체이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노자는 쓸모없음에 대해, 실상 쓸모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악한 것을 인정하고 용인하자는 게 아니라, 그 악조차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항상성을 위한 생명체의 활동처럼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움직임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비극적인 일들, 실존하는 악을 보며, 인격적인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세상이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이상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명체가 지니는 가능성과 탄생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 생각한다. 날 때부터 처참한 상황도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인간은 기계와의 전쟁에서 지고, 기계는 자신들의 창조자인 인간을 멸망시키지 않고 열에너지 공급처의 하나로 사용한다. 기계 나름의 배려라고 할까? 그 인간들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도록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주는데 그게 매트릭스이다. 파라다이스 같은 환경을 제공하니 적응하지 못하던 인간은 20세기말 사회를 구현한 시스템에서 잘 적응해 살아간다. 시뮬라시옹,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는 게 가능한가, 진짜의 의미는 무엇인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테마는 인류 역사 이래 변함없이 지속한다. 글을 쓰는 시점에 상당수의 과학자가 시뮬레이션 이론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이상적인 것이든 세상은 신비롭다.
원자 단위, 보이는 것의 1억 분의 1 정도의 미시세계에서는 일상에서 적용되는 물리현상이나 규칙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이다. 거시세계는 어떠한가. 2천억 개 이상의 은하계와 계속 팽창하는 우주,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멀리서 조망할 때 이미 다 이뤄진 상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상이라는 것도 제한된 인식과 사고의 틀에서 만들어내는 것일 뿐, 이미 세상은 인식할 수 없는 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어떠한 것의 부재나 결핍이 불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린 시절 생각한 이상적인 세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으니, 주어진 세상에 위대함에 경탄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을 보고 경탄할 수 있음도 인간이 지닌 위대함이다.
쇼츠를 통해 인간 매력에 대해 생각했고, 그 매력이 인간의 다양성과 끌림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양성 속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얘기했다. 기질과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모두가 기술자가 될 수 없고 예술가가 될 순 없다. 사회는 그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뤄진다. 일반적으로는 소비가 더 쉽고 다수가 소비자의 포지션에 선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다. 내 삶을 어느 쪽에 둘 것인가는 스스로의 선택이고, 본인이 선호하고 잘하는 쪽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지속성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다. 훌륭한 삶, 후회 없는 삶을 단정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부모의 유전정보의 결합으로 거저 주어진 생명, 신체와 능력, 그 재능 모두 선물(Talents)이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냐는 개인의 몫이다. 주어진 것에는 책임이 따른다. 각자의 몫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 가」라는 책에서 저자는 타인에 대한 애정을 품은 글에 대해 얘기했다. 공감한다. 글의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응당 콘텐츠가 대중을 향한 것이라면, 그들에 대한 애정을 품고 도움이 되는, 선익을 위하도록 애쓰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모든 것이 그럴 필요도 없다. 개인의 진솔함?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은 무례한 것이 되지만 때론 거칠고 투박한 표현들이 그 자체로 사랑을 받고 소비되기도 한다.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나간다면, 그것이 악이 아니라면, 충분히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콘텐츠 소비자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