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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영 Jul 23. 2024

TV와 나

김주영

얼마 전 청주KBS에서 전화가 왔다. 전기요금에서 TV수신료 징수가 안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우리집에 TV가 없다고 했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담당자는 "집인데 TV가 없어요?"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네."라고 답했다.


최근 장마로 인해 인터넷이 잘 안돼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AS접수가 끝나고 담당자는 인터넷TV결합상품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여러 번 제안했다.(우리집은 TV가 없어 인터넷 상품만 쓰고 있다.) 나는 TV가 없다고 말하기가 귀찮아 괜찮다고 얼버무렸다.


TV 없이 지낸지 벌써 14년이 되어간다. TV, 텔레비젼, 테레비와 함께했던 추억을 꺼내어 본다.


TV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곁에 있었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내 뒤로 손으로 채널을 돌리는 TV가 보인다. "텔레비젼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동요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채널을 돌리는 손잡이도 부러뜨린 적이 있고 어느 날은 엄마를 찾아다니는 내용의 슬픈 드라마를 보며 운 기억도 있다. TV가 잘 안 나올 때 TV를 손으로 치면 잘 나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안테나가 잘 안 잡혀 지지직거리는 AFKN 채널을 봤다. WWF 미국 프로레슬링을 열광적으로 봤다. 헐크 호건 등 선수 이름을 줄줄이 외워가며 동생과 함께 레슬링을 따라 했었다. 내 눈에는 진짜로 선수들끼리 때리고 맞고 뒤집는 걸로 보였지만 아버지는 다 짜고 하는 거라고 했던 게 의아하기만 했다.


TV는 나에게 전설의 고향 '내 다리 내 놔'로 혼을 쏜 빼놨다. 뿐만 아니라 '키트', '육백만불의 사나이', '맥가이버', '천재소년 두기'는 나의 TV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느 날 TV를 사러 아버지와 함께 동네 가전제품 매장에 갔었다. TV를 고르신 아버지는 점원에게 현찰로 만원짜리 수십장을 건넸다. 그때부터 리모콘TV를 경험했던 것 같다. 그 TV로 게임기도 연결하고 비디오도 연결해 실컷 시간을 때우며 놀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TV를 새로 들였는데 무려 29인치였다. 앞뒤 양옆으로 거대한 TV가 전축 위에 가분수 형태로 놓여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중학교 때 토요일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늘 나오는 '레니게이드' 외화 드라마를 시작으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까지 주말에는 TV를 끼고 살았다. 물론 일요일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는 빼먹으면 안 되었다.


중학교 때는 아이돌 춤 보는 재미에 푹 빠졌는데 연예가중계 등 가십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 공부는 금방 잊어버려도 왜 연예인 얘기는 다 기억나는지... 신문에 나오는 TV편성표를 체크해가며 채널을 돌려보곤 했다. 특히 설, 추석 연휴에 어떤 영화, 프로그램을 틀어주는지 신문을 넘기며 기대하는 게 재미있었다.


집에 TV가 하나밖에 없다 보니 아버지가 야구를 보시는 날이면 나는 따분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요즘 말로 노잼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민영방송 SBS(서울방송)도 개국하고 케이블 채널이 많아지더니 선택할 수 있는 볼거리가 더 많아졌다.


TV 보는 재미 중에 월드컵, 올림픽 중계도 빼놓을 수 없다. 94 미국월드컵은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친구들과 같이 보며 응원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대학 강당에서 대형스크린을 보며 응원했는데 그 때의 감동이 생생하다. 실제 월드컵경기장에서 축구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선수들이 멀리 보여 그런지 TV로 보는 게 더 실감난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렇게 수십 년 TV를 보며 살다가 결혼을 하고부터 TV와 결별하게 되었다. 신혼살림을 차리며 특별히 TV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리 아이들은 TV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요즘은 80인치 TV들이 거실에 떡하니 있기 마련인데 우리집에는 책상이 놓여있다. 필요한 영상은 주로 유튜브로 보고 있다. 아이들은 이따금씩 할머니 댁에서 TV를 보기도 한다.


이제 파리올림픽 시즌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기록들이 갱신될지 기대된다. 개막식 퍼포먼스도 이 세상에 어떤 비전을 제시해 줄지 궁금하다. 옛날처럼 소파에 앉아 온 가족이 TV를 보는 정취는 없을지라도 스마트폰으로 여름축제를 즐겨보려고 한다.


시원한 에어콘을 쐬며 말해본다. "시리야, 유튜브 틀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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