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김장하 선생님과 진주의 시간들
환경운동으로 시작해 교육의 현장으로, 그리고 기억과 책임으로 이어진 20여 년. 김장하 선생님과의 인연을 따라 걸으며 제가 배운 것들을 적습니다.
처음의 문 앞에서
1998년, ROTC 장교로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가장 먼저 두드린 곳은 진주환경운동연합이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맡아오는 종이 냄새, 사무실 벽의 구호, 사람들의 눈빛. 그곳에서 서도성 선생님이 의장을, 김장하 선생님이 고문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공익’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그쪽으로 한 걸음 더 가고 싶었습니다.
배움의 계절들
한국학에 마음을 두고 한문학·철학·윤리교육학을 가로지르며 공부하던 즈음, 2008년 경상국립대학교 학보사 학술전문기자를 맡아 개교 60주년 행사들을 취재했습니다. 서로 다른 학문 현장에서 만난 연구자들의 언어는 제게 새로운 사전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무렵 ‘지식문화공간 노리터’를 꾸려 협동조합의 가치를 지역에서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밝게 보다 함께 미약하게라도 오래 빛나자”는 마음으로요.
2006년 진주혜광학교에 근무하던 때,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인연이 닿아 여러 초청과 토론에 참여했고, 이후 회원이 되어 이사회에도 함께했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어김없이 선생님이 카드를 꺼내 계산하셨습니다. 형평운동 99주년 행사에서도, 평소의 소박한 식사 자리에서도. 그 단정한 동작 속에는 “책임은 말이 아니라 비용을 함께 지는 일”이라는 조용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교실에서 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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