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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의 화양영화(花樣映畵)

김종훈의 화양영화(花樣映畵)

― 이중섭을 따라 걸으며,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하다

어떤 예술은 시대를 건너 살아남고,

어떤 예술은 시간을 건너 누군가의 마음에 도착한다.


이중섭의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이 그랬다.

바람 속에서 흩날리는 벚꽃과, 그 위로 내려오는 작은 새 한 마리.

그 배경은 슬픔보다 깊었고, 파란빛은 눈물보다 따뜻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반드시 행복한 시절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아프고 가장 뜨거웠던 시간이,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림 속 떨어지는 꽃잎처럼


이중섭의 그림은 화려하지 않다.

그는 삶의 비극을 큰 목소리로 외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선 하나, 흔들리는 색 하나에 마음을 담았다.


그가 그린 풍경은 늘 사람을 품고 있다.

그가 그린 사람은 늘 이야기를 안고 있다.

그에게 예술은 거대한 구원이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한 작은 손짓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그림 앞에서 자꾸만 가족을 떠올린다.

내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

멀어졌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얼굴들,

말 한마디가 필요했던 순간들.


이중섭의 그림은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마음을

조용히 토닥이는 손바닥 같은 그림이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파란빛


전쟁은 도시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나라를 바꾼다.

이중섭은 그 변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부산과 서귀포와 일본과 통영을 떠돌며

그는 사랑을 잃고, 집을 잃고, 그림마저 잃어갔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겨진 것은

가난도, 병마도, 절망도 아니었다.

그에게 끝까지 남은 것은 사랑을 그리려는 의지,

즉 사람을 향한 마음 한 조각이었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는

그 파란빛 터널을 지나야 한다.

나도 그 한복판을 지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작은 선 하나에도 마음을 실었던 이중섭의 손을 이해하게 되었다.


희망은 거대한 불꽃이 아니라 작은 싹이었다


이중섭의 마지막 그림들은

놀라울 만큼 순하고 고요하다.

고통의 끝자락에서 그가 바라본 것은

거대한 이상도, 승리도, 구원도 아니었다.


그는 풀빛 싹을 그렸다.

작고 약하지만, 다시 피어나려는 생명의 기척.

삶은 그런 싹 하나가 있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 새 한 마리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다. 다시 피어날 수 있다.

떨어지는 꽃잎도 봄의 일부다.”


나의 화양영화는 무엇이었을까?


이중섭의 인생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그림 속에서

자신만의 화양연화를 만들어 냈다.

가난과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려 했던 순간들.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렸던 시간들.


책을 덮고, 나는 나의 화양연화가 무엇인지 오래 생각했다.

가장 화려했던 때가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사랑하고

가장 진심으로 절망하고

가장 용기 있게 견뎠던 순간들.


그때가 어쩌면

나의 ‘참 좋았다라’가 아닐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당신의 화양연화는 어떤 모습인가?

가장 행복했던 장면일 수도 있고,

가장 아팠던 장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을 견디고 지나온 당신의 마음이다.


이중섭의 그림 속 작은 새처럼

우리도 다시 내려앉을 장소를 찾아

기억과 사랑의 가지 위에 앉아 쉼을 얻을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말할 수 있기를.


“참 좋았다라.”

그때의 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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