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균열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 정체성 정치의 시대, 윤리적 감수성에 관한 한 고찰

1.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모든 비극은 거대한 악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역사는 오히려 사소하게 방치된 균열들이 어떻게 구조적 폭력으로 전화되는지를 반복해서 증언해 왔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애써 외면한 불편함,

“그럴 수도 있지”라는 관성적 합리화.

이 모든 것들은 즉각적인 파국을 낳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들이 책임의 주체 없이 축적된다는 데 있다.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방치된 감각의 실패가

마침내 한계점에 도달한 결과다.

2. 결핍 이후의 시대, 왜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가

오늘날 인류는 물리적 결핍의 시대를 상당 부분 통과했다.

식량, 에너지, 기술, 정보의 총량만 놓고 보면

과거 어느 시대보다 풍요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과 혐오, 배제와 전쟁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 역설은 단순한 자원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구조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현대 사회의 갈등은 점점 더

사람이 아니라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종교, 이념, 국가, 진영, 세대, 지역이라는 이름들은

본래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은

사람을 대신하는 표식이 되었고,

이해의 도구가 아니라 분리의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은 설명이 아니라 무기가 되고,

상징은 의미가 아니라 동원의 장치가 되며,

사람은 담론 속에서 사라진다.


3. 정체성의 전도와 윤리의 공백

정체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정체성이 사람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어디에 속했는가”가 먼저 묻는 사회에서

윤리의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윤리는 타자를 한 인간으로 인식할 때 작동한다.

그러나 상대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진영’, ‘적’, ‘상징’으로만 보이는 순간,

윤리는 작동 조건을 상실한다.

이때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

언어의 조롱,

제도의 무시,

침묵의 방관 역시

충분히 폭력적이다.


4. 하나의 원칙

사회의 주체는 언제나 사람이다

이 글이 붙드는 원칙은 단순하다.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의 주체는 언제나 사람이다.

어떤 명분도, 어떤 대의도

사람을 지우는 순간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 원칙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윤리적 기준이다.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의 문제다.

역사적 비극은 대부분

이 원칙이 예외로 취급될 때 발생했다.

“이번만은”,

“대의를 위해”,

“질서를 위해”라는 말은

언제나 사람을 후순위로 밀어내는

가장 그럴듯한 명분으로 작동해 왔다.


5.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더 빠른 기술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균열을 감지하는 감각이다.

말이 거칠어질 때,

상대가 상징으로만 보일 때,

“우리”가 “사람”보다 앞설 때.

바로 그 지점이

가장 위험하다.

윤리적 붕괴는 언제나

감각의 둔화에서 시작된다.


6. 다음 비극을 막는 주체는 누구인가

다음 비극을 막는 일은

거창한 영웅의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은 균열을 그냥 넘기지 않는

시민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침묵 대신 질문을 선택하는 용기,

편 가르기 대신 사람을 다시 부르는 용기,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적 성숙.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나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을 잃지 않는 사회만이

정체성의 시대를 넘어

다시 인간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 다움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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