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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예술 Sep 05. 2023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모노노케 히메 (もののけ姫)」, 1997

신에게 돌려드립니다!


산과 들개신 모로

「모노노케 히메 (もののけ姫)」, 1997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많은 사람들이 지브리 시리즈 중 최고로 꼽는 걸작입니다.


  인간과 자연, 그 둘의 필연적인 충돌과 이를 내려다보는 신. 우리의 삶에 짙게 내려앉은 주제의식을 아름다운 장면과 인물들의 관계성으로 더욱 여운을 끌어올리죠.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제일 감성 있는 영화는 아닐지 모르나, 감독의 주제의식과 더불어 신비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다는 작품성으로만 보아도 다른 애니메이션과 꽤 큰 격차를 두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시놉시스

  배경은 무로마치 시대 일본. 어느 날, 총알을 맞고 죽어가며 재앙신이 된 멧돼지 신 나고가 에미시 일족의 마을을 기습했다.

  주인공 아시타카가 나고를 사살하지만, 그 원한의 대가로 저주에 걸려버린다. 그 저주는 아시타카의 뼈를 파고들어 결국 죽게 만드는 저주. 죽을 위기에 처한 아시타카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저주를 막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서쪽으로의 여행 중 '타타라 마을'에 다다른 아시타카는 거기서 일어나는 인간과 신들의 전쟁에 끼어들게 되고 산이라는 야생의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인간에게 버려져 들개의 딸로 자란 과 재앙신의 저주를 받고 치유를 위해 사슴신의 숲을 찾아간 아시타카. 또 자신이 일궈낸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인한 지도자 에보시.


  같은 편인 듯 각자의 이유로 움직이고, 물과 기름 같다가도 무언가를 위해 투쟁한다는 점에서 겹쳐 보이는 인물들과 생과 사, 자연과 인간에 대한 주제의식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된 장면들과 환상.






I

피장파장

다툼의 발화점


  작품 속 확연히 대립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자연의 분노를 대표하는 산과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맞서는 에보시. 즉 자연 대 인간입니다.

이거 말고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이끄는 지도자입니다. 사철이 잔뜩 매장된 산을 차지하고자 산의 주인이자 신이었던 나고를 죽여 재앙신으로 만들었고, 이는 아시타카가 죽음의 저주를 입도록 만든 원인이 됩니다.


사슴신 토벌에 나선 에보시

  아시타카는 그녀에게 증오를 키우고 화를 산다며 일갈하지만 에보시는 단호하게 대응합니다. 사철을 계속 캐내어야 마을이 살 수 있고, 마을이 살 수 있어야 주민들은 활기찬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녀는 받아줄 곳 없는 나병 환자들을 거두어 주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슴신 토벌에 나서는 등 후술 할 '선악의 잣대'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들로 움직이는 인물입니다.


 에보시와 그녀의 사람들

  방식이 급진적이고 냉정할 뿐 딱히 뒤 구린데 없고, 결과적으로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지도자이기에 마을사람들은 물론이고 잠시 에보시와 협력하는 조정 병사들 역시 그녀를 지도자로서 높게 사기도 하는데요.


  반면 산은 들개의 딸로 자랐습니다. 동물처럼 불같은 성격과 거친 모습, 원시적인 옷가지를 입은 그녀는 마치 타잔을 보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이죠. 갓난아기일 적 들개신 모로의 이빨을 두려워했던 인간들에게 버려졌고, 모로는 그런 산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키우게 된 사정이죠.


들개와 산

  에보시와 같은 인간이지만서도 그녀에게는 끔찍이 아끼는 짐승 가족들이 있고, 버려진 자신을 말없이 받아준 대자연이 등 뒤에 있기에,


   나무를 베고 산의 주인이자 신들을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 절대신인 사슴신의 목까지도 노리는 인간을, 에보시를 극도로 미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각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관객들은 결국 "이 영화의 악역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모호함에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나마 누구의 이유가 더 와닿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눌 뿐, 살아가며 부딪힐 수밖에 없는 대척점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변곡점이죠. 내주고 싶지 않아도 앗아가는 이들에게 포용을 베풀 수는 없듯이.





II

중립과 평화


  중립과 평화가 동의어는 아닙니다. 사전적으로도 그렇고 꼭 서로가 필요충분조건이지도 않죠. 한쪽의 강력함이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이도저도 아닌 대치 상태가 평화 같은 고요함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연에 사는 옷코토누시와 모로를 더불어 숲의 존재들은 모두 사슴신을 절대적인 선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숲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원망을 사기도 하고요.


사슴신의 아우라

  그러나 이 사슴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영화의 매력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관객들은 사슴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며 의구심을 가지곤 하거든요.


  아시타카의 치명상은 말끔하게 치유해 놓고선 왜 숲을 지키려던 존재들의 죽음을 묵인하고 자연의 몰락을 보고만 있는 걸까요?


  닿는 곳마다 탄생과 죽음이 따라오는 발걸음이라던지, 사슴신이 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로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사슴신은 죽음과 탄생을 관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죽음 그 자체요 생명의 근원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자신조차 피할 수 없는 철칙을 지키는 '안톤 쉬거'가 단순 사이코패스가 아닌 '재앙'의 의인화로 표현된 것처럼 사슴신도 생과 사의 의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없는 존재들

  환자의 목숨을 손에 쥔 의사가 아니라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들을 보호하는 간호사, 고인을 마주하는 장의사에 가깝습니다. 생과 사의 현장에 자연히 따라붙는 존재이자 이것이 사라질 경우에 우리는 죽음과 탄생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설정에 걸맞게 사슴신은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탄환에 목이 잘려 죽음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너도 나도 사슴신의 머리를 손에 넣기 위해 난장판이 시작되고,


  머리를 잃은 사슴신의 또 다른 형태 '데이다라봇치'는 온 땅을 휩쓸며 자신의 몸에 닿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초월적인 권능을 건든 벌이라고 볼 수 있겠죠. 


데이다라봇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참사가 일어나자, 아시타카와 산은 겨우 사슴신의 머리를 뺏어 다시 그에게 바칩니다. 저주가 몸에 퍼질 대로 퍼진 아시타카는 곧 죽을 목숨이나 다름없었으나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죠.


  하지만 제로보단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 균형이기에, 사슴신은 자신이 파괴한 숲을 스스로 희생하여 재건합니다.


  신의 분노로 무너질 것 같던 숲에는 다시 풀이 무성하게 자랐지만, 엎드려 섬기고 따르던 존재의 죽음 뒤에는 분명 혼돈이 있을 것입니다. 자연의 짐승들은 목적을 잃을 수도 있고 사슴신의 머리를 원했던 인간들은 원하는 보상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서술했듯 사슴신은 절대선이 아니기에 그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후에 남겨진 혼란뿐인 세상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산과 아시타카죠.

  에보시도, 산도 아닌 언제나 공생을 바라보는 캐릭터였던 아시타카가 진정한 평화를 상징하는 캐릭터였음을 우리는 엔딩에서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던 산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에보시를 구해냈으며 마침내 죽음의 저주를 치유받기도 하죠. 


  유일하다시피 조화롭게 섞인 인물들이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할 두 사람. 「모노노케 히메의 엔딩이자 남은 앞날이 너무나도 무궁무진한.


한쪽의 구원과 책임이 아닌 공생을 바라보던 아시타카와 그를 통해 희망을 엿봤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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