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RA」, 1988
동명의 연재만화를 바탕으로 후에 수많은 작품들에게 영향을 준 SF 애니메이션 걸작, 「AKIRA」입니다.
오늘날의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아날로그 한 방법으로 영화를 제작했기에 비교도 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을 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출, 미술적인 면에서는 포스트 아키라라는 단어가 붙을 정도로 어마무시한 비주얼을 선사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인류를 멸종시킬 수도 있는 막강한 실험체, “아키라”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처절한 전투들. 그 속에서 발화하는 희망과 쓰디쓴 쇠 맛.
다만 방대한 양의 연재작을 하나의 영화로 압축하다 보니 원작의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중후반부까지 조금 난해하다는 감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답게 사람에 따라 폭력의 수위 또한 버거울 수도 있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각 장면의 디테일과 이 모든 것을 無에서 구현 가능케 한 작가의 상상력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도쿄는 알 수 없는 대폭발을 맞이합니다. 이로 인해 세계는 제3차 대전을 연이어 겪게 되고, 이 쑥대밭을 복구하고 도시를 재건하며 30년이란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높이가 가늠되지 않는 건물들과 형형색색깔의 간판이 반짝이는 길거리, 사이버펑크 시대를 방불케 하는 미래적인 신비 도시 "네오 도쿄".
과거의 아픔을 잊고 유토피아를 만들었나 싶었지만 실상은 고담 시티처럼 범죄와 약물, 문란함과 타인과의 갈등이 극심한 암흑 도시였는데요. 그 안에서 언제나 낙제생들로 살던 사고뭉치 폭주족 "하시리야 패밀리".
언제나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광란의 질주를 즐기던 중 카네다 쇼타로의 죽마고우 시마 테츠오가 정체불명의 초인적 생명체와 접근하면서 네오 도쿄는 두 번째 파란을 맞이합니다.
카네다와 테츠오를 비롯한 하시리야 폭주족 단원들은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썽을 일으키지만 서로의 뒤를 봐주는 친구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카네다와 테츠오는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깡다구 있고 행동력 있는 카네다가 테츠오를 구해주는 일이 많았는데요.
실제로 두 사람은 다른 단원인 카이와 야마가타보다 더욱 깊은 우정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테츠오는 언제나 마지막에 나타나 자신을 도와주는 카네다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습니다.
일례로 그의 빨간 모터사이클을 탐내거나 영화 내에서 시종일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라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이러한 열등감과 구원 뒤편에 있던 자존심, 힘을 갈망했던 테츠오의 성격은 그가 아키라를 제외 가장 강력한 초능력을 가지게 되자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람을 파리처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서슴없이 사용하며 곧이어 자신보다 막강한 존재라던 아키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테츠오는 아키라의 봉인을 강제로 풀어내는데요.
봉인이 풀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아키라는 대폭발을 일으키고,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해 망가져가던 테츠오는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됩니다.
카네다는 아키라로 인한 거대한 폭발의 잔재를 조용히 품에 담고, 다시 폐허가 된 도쿄 위에 서 있죠.
난해함에 대해 언급한 만큼 작품을 관람한 사람들은 종종 "그래서 아키라가 뭔데?"라는 의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키라는 서사 그대로 설명하자면 실험체입니다. 작품 속 일본은 과거 승전을 갈망하던 여느 나라가 그랬듯 세계를 호령하고 자국을 보호할 무기를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죠.
인간 병기를 만들고자 했던 연구, 아키라 프로젝트. 실험체 중 가장 우수한 성공사례이자 그 힘이 가히 인류를 자멸시킬 수도 있는 수준이었던 28번 실험체.
이러한 파괴력 앞의 무력감을 이성적으로 해석하지 못한 과학자들은 28번 실험체이자 '아키라'를 봉인시켜 버립니다. 줄거리에서 설명한 1980년대 도쿄에서 발생한 대폭발의 정체도 아키라의 초인적인 파괴력의 영향이죠.
아키라는 우리나라의 "철수"처럼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굉장히 흔한 이름입니다. 막대한 능력을 가진 것 치고는 대사도 없고 외양도 평범한 남자아이일 뿐.
그러나 이야기의 내면을 조금만 파고들어 보면, 이야기의 시발점이자 실마리인 아키라를 그저 최종 보스, 혹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데요.
당시 일본은 경제 호황기를 거쳐 버블 경제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도취되어 무너져가는 것들에 무책임한 회생을 기대했고, 결국 작품 세계관 상 네오 도쿄의 시민들은 각자의 이유로 죽어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반정부시위와 이에 대항하는 공권력의 무력진압. 이러한 당대 시류에 작품 속 아키라의 광신도들은 예수의 재림처럼 아키라가 다시 나타나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아키라가 뭐냐면,
아키라는 폭발이자 무기이고, 인류(일본)의 실수이자 답습입니다.
아키라의 존재와 영화의 메시지를 일본 히로시마 원폭 사건에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꽤나 명확합니다.
작가가 자국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는지 그저 인간사에 던지는 회의였는지까진 알 수 없습니다만,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거나 시행착오를 토대로 방전하는 것이 아닌, 그저 단편적인 일념으로 더 강한 힘과 더 많은 자본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태도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장 네오 도쿄만 보더라고 겉만 번지르르한 빛 좋은 개살구일 뿐, 그 속내는 이미 곪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요.
아키라를 제재할 생각 없이 그저 더 강력함의 표본으로만 인식하던 작품 속의 과학자처럼, 그리고 후반부 테츠오를 집어삼킨 또 다른 대폭발처럼 고통과 아픔조차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도 같습니다.
스토리도, 캐릭터성과 더불어 이 영화의 강점을 꼽으라면 단연 작화와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향수와 미래의 호기심을 적절히 섞은 장면들로 찬사를 받았으며 카네다가 모터사이클을 급정거하는 장면은 많은 영화에서 오마주 될 정도로 상징적인 장면이죠.
사이버펑크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 윤리성과 적절한 상한선. 그리고 현실성을 모두 압도할 만한 설득력 있는 작가의 연출이 백미이며 바이크의 속도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된 바퀴의 네온 잔상, 「터미네이터 2」에서도 오마주한 대폭발 장면 등 수많은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심미적인 영감을 주고 있음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