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2016
구교환 연출, 주연
간결한 스토리라인과 독창적인 연출, 빼어난 연기로 육각형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배우이자 감독인 구교환의 단편 영화.
그의 작품은 어렵고 난해하다는 '독립영화'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우리가 영화에 빠지는 이유인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로 다시 회귀합니다.
인터넷에 무료로 업로드되어있는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는 자신이 출연했던 감독들의 작품 DVD를 수집하러 다니는 무명배우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예술의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씁쓸함을 남겨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은 영화 제작 사무실에 어떤 남자가 찾아옵니다.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체크무늬 쇼핑백을 든 장발의 남자, 이름은 고기환. 그는 과거 무명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곤 했던 이름 없는 배우입니다.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기환은 생계 때문인지 예술가로서의 연명인지 단역이라도 구하기 위해 온 것인가 짐작이 들게 하지만, 그는 사실 DVD를 모으고 있는데요.
자신이 출연했던 단편 영화들의 DVD들. 작품이 담긴 CD를 받기 위해 과거 연이 있었던 인물들을 찾아가는 기환은 과거와 다르게 살아가는 인물들을 만납니다.
영화는 숨이자 호흡이며 성기라던 수염 선배,
대사 NG를 낸 자신을 두들겨 패던 여후배,
언제나 함께하며 공동작업을 하던 삼 형제,
"넥스트 마틴 스콜세지"라는 별명을 갖던 천재 감독 지망생,
언제나 사람들과 부비던 사교왕 대학 동기 등
기환은 DVD를 받기 위해 한 때는 밤낮없이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영화라는 예술을 자신의 업으로 삼던 인물들을 찾아갑니다. 그들에게 건네받은 CD에는 아마도 아련한 추억과 치기 어린 혈기가 여전히 남아있겠으나,
수염 선배는 숨 쉴 틈 없이 설명을 하는 영업 사원이 되었고,
아직도 필름을 고집하며 평가를 두려워하는 여후배는 아둔합니다.
삼 형제는 의절하여 '개인 작업'을 한다며 연락조차 하지 않고,
넥스트 마틴 스콜세지는 비관적인 폐인이 되었으며
사교왕은 스스로를 방에 가둔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더랍니다.
Q : 어떻게 그 지경지까지 가게 되셨나요? 궁금해요.
A : 별 거 없습니다. (웃음) 그냥 열심히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있더라고요.
거장과 패잔병의 사정은 [다들 사는 인생]이란 플롯을 뚫고 나오지 못합니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말처럼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여전히 출연할 작품의 대사를 틈나는 대로 연습하는 무명의 기환 역시도.
잘하고는 있었겠지. 잘 됐으면 좋았을 걸.
줄거리에 나왔듯 기환이 만나는 인물들은 각자의 세계와 불같은 영혼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쩌다 보니, 살다 보니 자신이 걷던 길에서 많이 벗어나있죠.
내가 걷는 곳이 길일테니 각자의 인생이라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씁쓸한 감상을 줍니다. 기환이 수집한 CD들이 수북이 담긴 체크무늬 쇼핑백, 그것은 곧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기환과 동일시됩니다.
자신의 창작욕과 열정을 섞어 쌓은 것들이자 후에 그 쇼핑백은 뭔데 촬영장에 들고 왔냐는 스태프의 질문에 대답하는 기환의 대답.
메소드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메소드 연기법]. 가상의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되어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이입을 통해 꾸밈없는 연기를 유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다만 메소드 연기의 큰 줄기는 '즉흥성'을 줄이는 것에 초점을 두는데요. 이를 위해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가 겪었을 법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노출시켜서, 정서적으로 기억을 각인시키는 과정을 거칩니다.
현실의 내가 겪지 못한 상처를 재현하여 각인시킨다던가 하는 훈련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기환이 만나는 사람들은 한 때 자신의 DVD를 세상에 알리고 동그란 CD에 새겨진 자신의 무한한 창작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인물이었을 겁니다. 예술을 통해 발현되는 '나'라는 페르소나가 겪는 상처들, 현실의 벽으로부터 상처받는 예술 속의 나.
반복적인 실패 혹은 나태, 넘어짐을 통해 인물들은 한 명씩 자신이 가던 길을 벗어 낫나 봅니다. 그럼에도 기환은 그들의 유산을 모으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려 하죠.
동시에 지하철에 쇼핑백을 놓고 와버린 기환이 헐레벌떡 다시 찾으러 오자
우린 다들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 빛을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취해 스스로의 수준을 망각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잘하고 있는 건지, 나 혼자 망해가는 중인데 다들 낄낄댈 준비 하느라고 말리지 않는 건지. 내 유산은 다른 사람이 더러운 껍데기를 버릴 곳인 건지.
실제로 봉준호 감독의 시사회를 방문했던 구교환이자, 고기환. 더 이상 페르소나로 보이지만은 않는 엔딩으로써 현실을 찔러주는 듯한, 오히려 위로와 격려가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