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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예술 Dec 07. 2023

우리의 로즈버드

「시민 케인」, 1941

「시민 케인」, 1941

・ 오슨 웰스 감독 / 오슨 웰스, 조셉 코튼 주연


세상 그 어떤 단어도,
한 사람의 인생을 말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영화사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오슨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은 사망 소식만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찰스 포스터 케인 - Charles Foster Kane - 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시대를 감안했을 때 독특하고 혁신적이었던 비선형 서사 구조와 적절하게 설치된 미장센 / 몽타주, 제작 기술 그리고 '로즈버드'라는 장치 등이 이러한 명성을 뒷받침합니다.


  개봉 당시에는 홍보에 실패해 큰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후에 재평가를 받으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봐야 할 작품 중 하나로 언제나 거론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I

줄거리



  콜로라도 깡촌의 소년, 졸부, 기자, 신문사 사장, 정치인, 그리고 세계적인 부자로 숨을 거둔 찰스 포스터 케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인 만큼 그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이토록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케인의 유언은 이렇습니다.



  케인이 숨을 거두며 남긴 한마디. 사람들은 이 '로즈버드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물건? 지역 이름? 여자? 숨겨진 자식?


  결국 로즈버드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제리 톰슨이라는 기자가 편집장의 지시를 받고 케인과 생전 연이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며 케인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케인의 집사, 첫 번째 부인 에밀리 노턴, 불륜 후 재혼한 수잔 알렉산더 등 수많은 사람에게서 케인의 생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톰슨이 만나는 인물 모두가 로즈버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인데요.


  그들은 로즈버드의 진실 대신 각자가 알고 있는 케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죠. 개별적인 이야기들은 로즈버드와 당장 관련이 없음에도 관객은 아무 의심 없이 이야기들에 몰입하곤 합니다. 잠시 로즈버드를 잊은 채 케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서요.


하숙생에게 우연히 넘겨받은 광산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케인 일가.
그리고 어머니의 결정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케인.
그가 차렸던 신문사들과 그의 주변인들, 정치에 뜻이 있었던 한 때.
그리고 저택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외로이 맞이했던 비참한 말로.

 

  무엇보다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케인의 결점입니다. 작 중 인물들의 증언대로 그는 사랑을 갈구했지만 잘못된 방법을 믿었기에, 모순적이게도 사랑받고자 했던 일이 그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수잔과의 첫 만남에서 어머니 얘기를 하며 감상에 빠진 그의 표정이나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무리한 선거 운동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 등을 보면 알 수 있는 점이죠.


  답을 알았는데 문제를 잊어버린 것처럼, 로즈버드를 알기 위해선 케인을 알아야 한다고 작품은 관객에게 권합니다.





II

케인은 시민이고, 시민은 케인이었나.


  「시민 케인」은 당대의, 혹은 오늘날까지도 관통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보여줍니다.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을 비판하는 시선을 가진 장면들, - 정직한 신문으로 인정받기 위해 거짓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는 점이나 정치계에서 만연하게 이루어지는 여론조작, 비방, 음해 등 -


  특히 사회 구조의 모순적인 점들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다만 케인 같은 사람이 그 시대에 오로지 케인 한 사람만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 이런 내막들을 모르던 ‘시민’들은 신문을 어떤 마음으로 봤을 것이고 정치인의 선거 유세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 것이며 나에겐 별로인 무언가를 극찬을 하는 평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날의 시민들에게도 던져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케인의 야욕과 어두운 점 역시 어떤 ‘시민’에게는 공통점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시민들이 모여 작품이 비판하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나는 ‘시민’인가? 혹은 ‘케인’인가? 아마 우리가 인생의 모순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III

꽃봉오리



  엔딩에 이르러 로즈버드는 결국 그가 어릴 적 부모와 이별하기 전 타던 썰매의 이름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아니라 관객에게요.


  'Rosebud'가 적힌 썰매, 그토록 찾던 유언의 단서는 그저 산더미처럼 쌓인 케인의 유산이자 ‘쓰레기’로 분류되어 화로에 던져집니다. 로즈버드의 의미를 찾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에게 톰슨 기자는 말하죠.



아뇨, 아닐 겁니다. 절대로. 원하는 걸 다 얻고도 잃어버린 사람 아닙니까.
로즈버드는 그가 얻을 수 없었거나, 잃어버린 것일 겁니다.
별 의미도 없을 거예요. 누군가의 일생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로즈버드는 퍼즐 한 조각일 겁니다. 빠진 조각이요.


  작품 외적으로 보면 로즈버드가 케인의 인생 전부를 요약하는 단어가 되고, 또 「시민 케인」이라는 방대한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으니 아이러니하죠.


  톰슨의 대사와는 반대로 케인은 무의식 속에 결여된 '걱정 없이 가족에게 사랑받던' 삶을 찾아 헤매다 외로운 말로를 걸었거든요.


모든 것의 시작

  영화는 이토록 로즈버드를 찾는 과정이 용두사미인 것처럼 단편적으로 보여주지만, 결코 그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케인은 비교적 손쉽게 부와 명예를 가졌지만 그가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리워했던 건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는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 누구도 주의 깊게 바라봐주지 않았기에,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순간이기에 추억조차 찾을 수 없는 그때를 더 간절하게 그리워하며. 혹은 가만히 있어도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마음으로 그 시절을 떠올린 것일 수도 있고요.


  사랑을 갈구하지만 여러 번 실패를 겪는다는 점에서 케인은 상처받은 이들과 닮아있습니다. 그의 잘못들이 정당하다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그가 안쓰럽거든요.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손등을 내밀며 입을 맞출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순간도 있지만 때때로 내게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거나, 나에게 이럴 순 없다며 앙심을 품는 등 항상 고결하지만은 않습니다.


   나의 로즈버드는 무엇일까요. 아니 어디일까요. 혹은 언제일까요. 우리가 진정 놓치고 있는 것, 더 이상 찾을 수 없기에 더욱 깊이 그리워하는 것.


  그것은 이제 소식도 모르는 첫사랑이 될 수도 있고 이제는 만나볼 수 없는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로즈버드에 값이란 없으며 무게만 존재할 뿐이어서요. 아름다운 장미를 받치는 장미꽃봉오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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