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2010
「레퀴엠 포 어 드림」을 연출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작품, 「블랙 스완」입니다. 유명 발레 작품 '백조의 호수'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우아한 심리스릴러극이죠.
예술가로서 '정상에 오르다'라는 말은 곧 자신의 한계를 부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정상은 똑같지만 그 '모두'의 각각의 눈높이는 다르니까요.
본 작품 역시 유명 발레 작품 '백조의 호수'에서 1인 2역을 맡게 된 니나가 백조를 넘어 흑조의 타락까지 자신의 예술로 만들려고 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블랙 스완」은 겉보기엔 발레리나들의 우아한 몸짓과 공연 등을 담은 것 같지만 그 내용은 예술에 대한 강박, 광기, 정신붕괴 등 영화의 구조조차 백조와 흑조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듯한데요.
자신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와 멋대로 감정을 휘두르는 단장,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극단 후배의 사이에서 유약하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니나.
주연인 나탈리 포트만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또 작품 자체로는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며 그 작품성을 강렬하게 각인시킨 영화입니다.
발레단 단장 토마스는 기존 백조의 호수를 변화시키고 흑조의 비중을 늘린 새로운 백조의 호수를 만들고자 합니다. 다만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할 배우가 필요했는데, 이는 상반되는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셈이다 보니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죠.
토마스는 1인 2역을 소화할 사람으로서 니나를 선택합니다. 토마스가 사실 단원들과의 잠자리를 원해 접근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그 속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는데요.
그렇기에 언제나 정상을 동경하던 니나도 이를 수락하고, 긴 시간 끝에 비로소 인정을 받아 니나의 승승장구하는 삶이 이어질 줄 알았으나..
겸손하고 순수하며 연습벌레, 완벽을 추구하는 니나는 백조 연기를 흠잡을 데 없이 해냅니다. 토마스조차도 백조로서의 니나는 더 건드릴 게 없다고 평하지만 문제는 흑조라고 덧붙이는데요.
그는 그녀가 '백조의 호수' 중 타락한 흑조 역시 완벽하게 해내길 바라지만 니나가 아무리 노력하고 용을 써도 토마스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타락을 연기하려던 니나의 접근 방식을 눈치챈 걸까요. 연습 시간을 더욱 늘리고 고민을 더 깊게 해도 모자랄 판에 그가 '놓아야 한다', '기술적인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며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자 니나는 점점 정신적으로 부담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를 따뜻하게 지지해 줄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요. 전직 발레리나였던 니나의 어머니는 그녀를 이해해 줄 것만 같았지만, 실은 무명이었던 자신을 투영해 딸의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철저하지 않고 자유분방하며, 흑조로 따지면 니나보다 더 어울릴 듯한 신입 릴리의 등장으로 니나의 등 뒤 배수진은 점점 두꺼워지죠.
결국 그녀는 타락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타락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쌓여 환각과 환청을 겪고 성격이 점점 뒤틀리게 되죠.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적으로 두어야 하는 상황에서 니나가 지켜야만 하는 것은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자신의 자리입니다.
니나는 릴리가 배역을 뺏기 위해 자신을 해코지하려고 한다는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많은 예술가가 그러했듯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고의적으로 적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자신을 시기하고 밀어내려고 작정했다며 착각을 한 니나는 릴리를 죽이는 환각을 겪지만, 사실은 릴리의 배에 쑤셔 넣었던 유리 조각이 자신의 배에 박혀 있었으며 스스로 자해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간 유약하고 수동적이었으나 상상에서나마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살인까지 자행한 니나는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무대에 올라가 흑조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마지막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니나이자 흑조는 '백조의 호수'의 막이 내림과 동시에 잠에 들어도 되겠죠.
입시생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기술자가 되지 마라
서사의 구조, 메타포와 맥거핀, 미장센과 클리셰, 무슨 법칙, 무슨 규칙. '촘촘하게'에 집착하다 보면 깊게 만들 수 없다는 뜻이었겠죠.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열심히 하면, 그만큼 잘 나오는 줄 알았으니까요.
기술적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있고 영혼의 배설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물론 두 가치는 양립할 수야 있지만, 그런 예술가가 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도 합니다.
클리셰처럼 획일화된 기술에 내 넘치는 영혼을 담아낸다는 것은 조금 앞뒤가 안 맞거든요. 남들과 달랐음에 자부심을 느끼기엔 벌거 벗겨진 내 모습이 추하고, 흠없이 완벽했음에 안도하기에는 유일무이함을 이끌어내기 쉽지 않습니다.
작품 「블랙 스완」은 우리에게 예술의 척도를 제시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용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하루에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가치 판단합니다.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때때로 불편함마저 느껴지는 어떤 예술에 대해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연전연승의 가도를 달리는 앤디 워홀의 말처럼,
일단 유명해져라. 그럼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예술가의 명성이 예술작품의 제목이 되어주는 딜레마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블랙 스완」은 ‘감성적이고 예민하다’는 예술의 이미지 안에서 오히려 냉정하고, 딱딱한 기준을 두는데요.
모두가 완벽에 집착할 때 반대로 전부 놓아본 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동작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백조처럼 겸손하고 우아하며 순수한 니나에게 해당되는 말이죠.
다시 말해 한쪽만 해서는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이고, 왜곡해 들으면 정점이 되는 것에 집착은 해본 적 있냐는 말이 됩니다.
별생각 없이 낸 앨범이 대박 나고, 계약 조건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찍은 영화가 상을 타고. 또 별생각 없이 앨범을 내지 않고, 계약을 할 만한 필모 커리어를 쌓지도 않고.
우리는 어떤 예술을, 결과물을, 창조물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어떤 예술가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예술을 해야 하는가.
노력, 반복, 완벽. 떠오르는 키워드는 많고 보편적입니다. ‘어떻게 ‘가 곧 ‘어떤‘을 설명하죠. 오믈렛을 만들려면 달걀부터 깨야지, 하는 영화 대사가 생각납니다.
「블랙 스완」의 니나와 「위플래쉬」의 앤드류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타락해 가며 영혼을 제외한 것들을 놓아버렸듯 기술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연마되는 기술과는 달리 예술가란 변질되는 존재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사랑에 따라서.
끝없이 값어치가 달라지는 존재죠. 가치를 바꾸는 건 위험하고, 또 바뀐 가치가 사랑받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만 그 아슬아슬함과 처절함을 이겨내기 위해선 약간은 미쳐야 하는 듯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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