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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Nov 11. 2023

죄인에겐 반드시 벌을,
벌 받은 자는 틀림없이 죄를

「살인자ㅇ난감」, 2011

플랜 B 따위는 없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이탕

「살인자ㅇ난감」, 2011

・ 꼬마비 작품


  「3인칭」,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가 있기 전에는  「살인자ㅇ난감」 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그림체에 그렇지 못한 작품성으로 역시 꼬마비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요.


   본 작품은 데뷔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작가의 강점으로 꼽히는 탄탄한 서사, 심오한 주제의식을 엮어내는 유려한 연출을 통해 명작으로 거론되곤 하는데요.


  「살인자ㅇ난감」은 엄연한 스릴러물로, 죽이는 사람마다 ‘죽어 마땅한’ 흉악범들이 얻어걸리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 이탕과 그를 추격하는 장난감 형사, 그리고 또 다른 심판자인 송촌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선악’, ‘정의’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I

줄거리


현직 검사를 납치한 이탕

  

  한 남자가 현직 검사를 납치했습니다. 눈물점과 짝눈을 가진 남자. 그는 스스로를  ‘이탕’이라고 소개하며 이는 가명이 아닌 본명임을, 원한다면 주민 번호도 불러주겠다는 패기까지 보이는데요.


  검사는 이탕이 자신을 살해할 수도 있음을 눈치채고 눈을 감아버리지만 이탕은 재밌다는 듯이 검사의 눈을 강제로 벌려 눈을 마주치곤 말합니다.



아저씨, 뭔가 죽어 마땅한 짓 한 적 있지 않아요? 분명 있을 거예요.




  성인成仁으로 살아오진 않았지만 그저 적당히, 조금 못되게 말해 비루하게 살아오던 평범한 남자 이탕은 모종의 사건으로 우발적인 살인들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첫 번째 살인은 오히려 억울한 면도 있죠. 자신을 폭행하던 취객에 맞서다 벌어진 일이니까요. 어쨌거나 강력범죄들과 평생 멀 것만 같았던 평범한 청년의 삶은 미친 듯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이탕은 큰 절망에 빠지며 고통스러워하고, 갑작스레 망가져버린 자신의 삶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데요.


  그러나 「헤어질 결심」 속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라는 대사처럼, 이탕은 점점 정당방위도 아닌 ‘진짜 살인’을 연속적으로 자행하기 시작합니다.


  자식이 살인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 후 무너져 내릴 어머니,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두려움에 자수까지 결심하던 그가 점차 죄책감을 잊어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살해 도구를 빌리는 장면이 파리에 가려진다

   이탕은 자신이 일으킨 사건에 대한 보도, 그리고 술집에서 우연히 들은 경찰들의 대화를 통해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죽이게 된 사람들이 실은 죽어 마땅한 천하의 악마들이었으며, 매 살인마다 우연으로 증거가 완벽하게 인멸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신이 나를 선택한 게 아니고서야..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이탕은 자신에게 기이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없는 게 더 나은 인간쓰레기를 만나면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오고, 그들을 살해해도 모든 증거가 우연을 넘어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능력.


  그 후 이탕은 스스로 심판자의 역할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히어로의 사이드킥이 되고자 하는 범죄자 출신 프로파일러, 노빈과 콤비를 이루며 '인간 청소' 활동을 하게 되죠.





II

당신은 어떻게 읽히시나요?

・ 제목에 대해



  제목의 난해함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알파벳 오(o)인지 한글 이응(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제목의 진정한 의미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세운 선악의 잣대, 정의의 기준이 작품의 주된 요소임을 생각해 본다면 제목이 작품 전체를 은유하는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본 작품에는 사실 이탕 말고도 세 명이 더 등장합니다. 장난감, 노빈, 송촌.


왼쪽부터 이탕, 장난감, 송촌

  사람을 죽여도 신이 뒤를 봐주는 이탕과는 반대로 ‘하는 일마다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한 이름을 가진 베테랑 형사, 장난감인데요.


  장난감은 이름대로 하는 일마다 운명의 장난인 듯 손해만 보고 사는 캐릭터입니다. 그는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는 직업 중 그나마 되기 쉬웠던 경찰의 길을 걷게 되며 아버지를 따라 강력계 형사가 되는데요.


  공무집행 중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 비록 장난감의 가정에도 비극의 손길이 뻗쳤지만 그를 존경했던 장난감은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면 대꾸도 못하는 아버지를 찾아가 푸념을 하곤 합니다.


  장난감은 분명 형사로서의 재능도, 나름 인간적인 면도 있는 사람이지만 뒤처리만큼은 냉혹하리만치 철저한. 그냥 세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처럼 보입니다.


  송촌은 이탕과 마찬가지로 악을 단죄하는 또 다른 심판자이자 최종 빌런입니다. 장난감 형사의 아버지와 지독하게 엮인, 장난감에게는 부모의 원수나 다름없죠.


  작품 내 최고의 전투능력과 노빈을 뛰어넘는 정보력. 그러나 초능력 따위는 없었던 송촌의 심판은 경중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버스에서 떠들었단 이유로 심판을 하거나 심지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지져 지문을 없애고 매일같이 머리를 면도하는 등 영웅이라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모습을 보입니다.


  살인을 하는 매 순간, 하루가 끝나는 매일 밤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며 저주처럼 도망자의 삶을 살던 송촌은 이탕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를 만나려고 합니다.


  악을 단죄하길 그토록 원하던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신의 권능이, 대체 어떤 건지 궁금했던 걸까요. 왜 내가 아니라 이탕이었는지.


히어로보단 조수가 더 어울리는 노빈

  노빈은 앞서 말한 대로 다크 히어로의 사이드킥이 되기를 원하는 인물입니다. 이탕의 살인을 목격한 뒤 그를 설득해 이탕을 심판자로 만들었고, 더 이전에는 송촌을 심판자로 선택했으나 그의 심판에 의문을 제기하고 녹아들지 못한 채 연을 끊은 바 있죠.


  이탕 역시 송촌처럼 엇나갈까 봐 노빈이 보험 삼아 두었던 이탕의 범행 증거가 빌미가 되어, 네 사람은 한 공간에 모이게 됩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단죄살인'들이 두 사람의 소행임을 알아챈 장난감 형사





III

죽어 마땅한 사람



  장난감은 작품 내내 그들의 심판을 부정합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 그걸 누가 정하냐.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이지만 성매매업소를 다니는 동료 형사, 자신에게 폭력은 나쁘다며 가르쳐놓곤 장난감이 두들겨 맞고 오자 경찰 신분을 내세워 깽판을 친 아버지, 또 본인조차도 무조건적인 선도 악도 아님을 알고 있는 장난감 형사.


  장난감은 이탕과 노빈이 추구하는 선악의 기준, 죽어 마땅하다는 잣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한들 같은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요.


  앞서 말했듯 노빈이 숨겨두었던 이탕의 범행 증거. 그 빌미로 인해 엔딩에 이르러 네 사람은 빈 건물에 모입니다.


  그곳에는 장난감의 아버지를 인질 삼은 송촌, 장난감과 노빈, 그리고 이탕이 있죠. 송촌은 장난감에게 빈 총을 넘겨받아 총알을 넣어 노빈을 단박에 살해합니다.


  그 순간 불이 꺼지고, 이탕과 송촌이 몸싸움을 하는 와중 총을 되찾은 장난감이 송촌을 쏴 무력화시키죠.

결전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사람에게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배웠던 두 사람, 장난감과 송촌은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송촌은 장난감의 아버지를 폭행해 식물인간으로 만든 이가 자신임을 시인하지만, 장난감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실체, 또 어머니의 실체를 까발리며 장난감의 과거와 영혼을 무너뜨립니다.

아빠는 비리 경찰, 엄마는 바람난 여자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장난감이 분개해 송촌을 쏘려고 하자 이탕이 막아섭니다. 그리고 그는 송촌에게 다가가고, 잠시 장난감을 돌아본 사이.

누가 진정한 정의인가





IV

오답은 있는데 정답은 없어요

  


  정의라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 히어로 영화의 교훈 등 타인의 교정에서 벗어나 스스로 깨달아갈수록 복잡해지는 가치입니다.


  장난감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인의 인식은 '법을 준수하는 것이 정의' 쯤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반대로 말했을 때 벌을 받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 않은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제재가 불가능한 현대 사회에서 법이라는 잣대가 나를 벌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사회의 시선에선 난 죄지은 자가 아니거든요.


  그보다 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살인자ㅇ난감」 속 인물들 중 누가 절대적인 선 또는 악이라고 할 수 있나요?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아버지, 누군가에게는 부패경찰, 누군가에게는 나쁜 놈,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연인.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만든 법 역시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죄와 벌. 그 근원에는 나와 내 사람들의 평화(영역)를 침범한 이에 대한 응징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언제나 그러했듯이요. 어떤 거대한 공동의 가치라기보단, 서로 잘 살자고 법으로 악을 규정한 거나 다름없는 셈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정의에 대한 표현

  작품은 이러한 인간 내면 깊은 곳의 상대성을 비틉니다. 이탕에게 신이 내린 듯한 권능을 주면서요. 작품은 '절대적인 정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이탕은 선하게만 살아온 인물도 아니었고, 또 살인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죠. 능력을 사용하며 살아가지 않고 남들처럼, 법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간 이탕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이탕의 손에 죽은 이들이 인간쓰레기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그에게 선악의 잣대를 맡길 수 없습니다.


  이탕 같은 능력이 없는 송촌에게는 더더욱 그러하고요. 독자들의 정의관은 끝없이 흔들리며 장난감, 이탕, 송촌 등 도무지 정답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갈래에서 고민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장난감은 결국 송촌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의 총구 앞에서 오줌을 지리던 이탕을 놓아주며 말합니다.

영웅은,  X발.. (오줌을 지린 이탕을 보며)
너를 믿을 순 없지만 부정도 못하겠어. 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장난감은 이탕의 초능력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부정하지도 못하죠. 이탕의 손에 죽은 사람들에 대해 "잘 죽었다-!"라고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요.


  우리는 끝내 절대적인 정의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사실 장난감의 말처럼, 우린 절대적인 정의의 존재를 믿을 순 없지만, 또 부정하고 싶지도 않지 않나요.


  현대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절대적인 정의. 이탕은 그러한 오늘날의 모호한 무언가로 표현됩니다.


  아버지를 따라 '법을 어긴' 나쁜 놈들을 잡아오던 장난감은 이제 살인자입니다. 그 동기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죠.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송촌을 보며, 우리는 통쾌함을 느끼지 않았나요.


  정의에 열광하는 이유. 내 일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악이 한 조각 떨어져 나갔으리라 싶은 카타르시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평화가 한 움큼 안전해졌다는 인식은 분명 우리를 안심하게 만듭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본 작품에 정답이 없다는 의미는 이미 설명되고 있습니다.

살인자
      ㅇ난감


  살인장난감은 이탕을 말하는 것이고,

  살인자 장난감은 결국 송촌을 살해한 장난감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이를 모호하게 나타낸 점 역시 작품은

  장난감을 그냥 살인자로 볼 수 있겠는지,

  이탕을 정말 심판자로 볼 수 있겠는지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 도발에 응하든, 무시하고 제 갈길 가든 상관없습니다. 작가가 「살인자ㅇ난감」을 읽고 싶은 대로 읽고 읽히는 대로 읽히도록 놔두듯이 우리는 자신만의 선악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테니까요.


  지켜져야 할 선과 지켜내고 싶은 내면의 악. 그 비율의 몫은 언제나 자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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