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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Oct 30. 2023

증오는 창조의 어머니

「CENIT」, 2018


국내 정발된 작품 표지

「세닛 (CENIT)」, 2018

・ 마리아 메뎀 Maria Medem 작품


  스페인 세비야 출신 만화가, 마리아 메뎀의 작품 「CENIT」몽유병을 앓고 있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컷과 컷의 연결이 매끄럽지만은 않은 이 작품은 마치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끝인지 모를 회화를 보는 듯도 한데요.


  최고점, 정점, 천장 등을 뜻하는 스페인어인 'CENIT' 속 두 남자는 해가 가장 높게 뜬 시간이 되면 함께 식사를 하며 지난밤에 잃어버린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기억의 편린과 생선처럼 살이 발린 대화로 진행되는 만큼 굉장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작가조차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부분이 많기에 여러 번 읽을수록 다르게 보이는 고진감래형 작품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어느 홈페이지 속 이 작품의 소개대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작가로부터의 불친절한 회화를 접한 뒤 나만의 세계와 연결 지어 흥분한 채로 떠들어대는 산책을 연상케 하는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I

줄거리


  몽유병을 앓는 두 친구가 있습니다. 가까이 살고 있는 그들은 해가 하늘 꼭대기에 뜰 때면 함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요.


  지난밤에는 잘 잤는지, 각자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무얼 했는지에 대해 나누는 두 사람의 식사 자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기 그지없습니다.


  머리를 싸매도 지난밤의 기억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거나,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마시고 좋은 꿈을 꾼 기억 밖에는 없는데요.


  더듬거리며 모아보는 두 사람의 기억의 합치는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태양처럼 손에 쥐기 어렵습니다.


견디기 힘든 적막함
"어젯밤은 어땠어?"
"휴, 말도 마. 어땠길 바라는데? 해 질 무렵에는 완전히 피로에 절어서 그대로 잠들었지, 뭐... 요새 항상 이렇다니까. 겨우 잊었는데 네가 상기시켜 주네. 고맙다?"
"예민하게 굴지 마."
"예민하다고? 이 정도를 예민하다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우리 딴 얘기 하자."
"아니, 아니. 마저 얘기하자..." 


  한 명은 유리 공예사, 한 명은 도예가. 각자의 작업실에서 창작을 하는 두 사람에게는 창작의 고통 말고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과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몽유병 증세가 두려워 잠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부서져 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의문을 던지죠.


  가끔 투덜대기도 하는 두 친구는 분명 함께 침대에서 잘 만한 사이는 아닙니다. 철저히 어둠 속에 혼자였던 지난밤. 두 사람은 턱을 괴고 입맛을 다시다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그림의 묘사대로라면 꽤나 닮아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제 너무 피곤해서 내 집이 아닌 친구의 집에서 잤던가? 내가 어제 집에서 본 괴한은 사실 거울에 비친 나였나? 


  기억하지 못하는 밤에 대해 T와 F처럼 관점조차 너무 다른 두 사람.


  그럼에도 자신의 업을 열심히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두 사람은 흙을 빚어 굴곡을 만들고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요.


  어쩌면 서로 시기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날이 갈수록 창작의 피로에 절어 예민해지고 말에는 날이 서기 시작합니다. 네가 부쉈지. 너 아니면 누가 그래.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어젯밤도 기억 못 할까 봐? 오늘 아침엔 뭘 먹었는지 기억하냐고?


나를 쫓아내는 낮
잠에 들었더니 엉뚱한 곳에서 눈을 떴다거나, 잠에서 깨고 주변을 둘러볼 때 몇몇 물건들이 어제와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의 음산한 공포감.


  그 불안감은 점점 모든 것을 집어삼켜 급기야 두 사람은 자신이 지켜오던 신념과 관점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감정들과 의문들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각각 서로에게 품던 증오를 발견하는데요.


  결정적인 순간 충격에 휩싸이게 하는 엔딩으로 작품은 다시 한번 독자를 휘감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깨진 도자기들과 자신의 영혼. 그 조각 사이로 흘러나오는 축축한 것. 그리고 태양이 비추는 반대편 사람의 얼굴. 





II

증오는 창조의 어머니



  세닛은 그림으로써의 메타포, 은유적인 묘사를 굉장히 다양하고 난해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엔딩 역시 여러 갈래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보이는데요.


  심지어 세세한 그림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작가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당장 질문 공세를 박아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죠.


  그러나 난해하기만 하고 기 빨리는 작품이었느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창조와 파괴. 그 속에서 추구하는 진실과 외면, 그리고 증오. 상대를 향한 증오.


  그것은 곧 행동의 동력이 되어 또 다른 도자기의 파괴를 창조한다는, 그런 심오한 메시지가 두 사람의 대화나 여러 색채, 이미지와 구도 등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의 대화를 면밀히 관찰해 보면 수많은 해석의 여지가 보입니다. 두 사람이라고 그려졌지만 사실 한 사람의 두 가지 인격일 수도, 혹은 한 사람의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낸 반작용적 심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맞긴 할까요. 그들은 서로가 몽유병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도자기는 누가, 도대체 왜 부순 것일까요. 아니, 그것들이 내가 부순 게 아니라 부서졌다고 믿고 싶은 게 아닐까요.


  창조란 것은 곧 파괴를 동반합니다. 흔히들 '영영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라고 표현하는 인간의 욕망.


  하지만 창조란 그릇은 한계가 있기에 또 다른 창조를 하기 위해선 그릇 안에 든 걸 가차 없이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창조'라는 말은 친구관계가 될 수도, 꿈이 될 수도, 진실이 될 수도, 그리고 파괴가 될 수도 있고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밤에, 정말 난 얌전히 잠만 자고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그 어떠한 창조도, 파괴도 하지 않았으며 꿈속에서조차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탄력적이지만 얇디얇은 표면장력. 뜨거운 열기로 모든 기억을 표백해 버릴 듯한 하늘 꼭대기의 태양.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창조'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무시무시한 단어로 대체될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몽유병을 앓지 않는 이는 없을 테니. 


  이제, 다른 사람을 증오해야 할 차례일까요.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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