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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Nov 07. 2023

내가 요즘 불행한 이유

「OK COMPUTER」, 1997

*모든 것은 글쓴이의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OK COMPUTER」, 1997

・ 라디오헤드 (Radiohead) 정규 3집


  영국의 밴드, 라디오헤드의 3집이자 역사상 위대한 앨범 중 하나인 「OK COMPUTER」입니다. 앨범은 얼터너티브 락 장르로서 세상 속 불합리하고 녹슨 것들을 밴드 특유의 몽환적이고도 음울한 감성으로 풀어낸 작품인데요.


비틀즈 이후 약 40년 동안 장르를 지배해 온 향락적 분위기를 멸종시키고
본격적인 아트 얼터너티브 / 일렉트로닉 락의 유행을 발생시켰다


  「OK COMPUTER」는 1997년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에서는 'No Surprises'나 'Paranoid Android'가 잘 알려진 바 있습니다.


  필자 역시 어릴 적 라디오헤드의 지독한 대표곡인 'Creep'보다도 'Paranoid Android'로 그들의 음악을 처음 접했는데요. 빅뱅과 투애니원 노래를 듣던 소년에게 그 경험은 굉장히 기괴하고도 새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알고리즘에 뜬 명작.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듣게 된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들어도 실험적이고 독보적인 사운드였습니다.


  녹슨 스틸과 기름진 나일론, 유통기한이 지난 항생제 사이에서 삶에 느낀 염증을 울부짖는 돼지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남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20년도 더 지난 앨범이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으며 틈 없이 치밀하게 짜인 시적인 가사, 음악적 장치들은 지금의 라디오헤드가 가진 명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I

그때는 그랬지

앨범의 컨셉


영국 범생이들 같은 모습

  먼저 앨범 콘셉트를 설계한 라디오헤드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음반 제작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멤버이자 라디오헤드의 보컬인 '톰 요크'는 환경주의자, 사회인권운동가로도 활동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을 향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특유의 기민한 우울감이 합쳐져 자기 파괴와 분노, 또 방황하는 이들에 대한 조언이 그들의 음악에 여실히 묻어나죠.


  또한 라디오헤드가 3집을 제작할 때쯤 세상은 인터넷의 등장과 보편화로 격변하고 있었습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되는 과도기와 맞물린 셈이었는데요.


  지금에서야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2000년대가 오면 컴퓨터가 숫자 2를 인지하지 못해 지구가 멸망한다더라'는 괴담이 떠돌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당시의 막연한 공포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나 음악가로서의 자가복제를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은 서정적인 기타 사운드가 주였던 2집 「The Bends」를 탈피하기 위해 이 격변에 대한 공포를 역이용합니다.


  '밴드'하면 떠오르는 사운드인 드럼, 베이스, 기타, 보컬에서 벗어나 전자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기계적인 사운드와 락을 융합해 예술적인 특성은 유지하며 음악적으론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게 됩니다.


  'Fitter Happier'라는 트랙에선 아예 보컬 대신 번역기를 튼 것처럼 로봇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등장시키기도 하죠.


TRACKLIST

1. Airbag
2. Paranoid Android
 3. Subterranean Homesick Alien
4. Exit Music (For a Flim)
5. Let Down
6. Karma Police
7. Fitter Happier
8. Electioneering
9. Climbing Up the Walls 1
0. No Surprises
11. Lucky
12. The Tourist





II

난 편집증일뿐, 안드로이드는 아냐

앨범의 베스트 트랙 「Paranoid Android」



https://www.youtube.com/watch?v=fHiGbolFFGw&pp=ygUQcGFyYW5vaWQgYW5kcm9pZA%3D%3D

어렸을 적 봤다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뮤직비디오

  「Paranoid Android」, 두 번째 곡이자 본 앨범 중 가장 좋아하는 트랙입니다. 우리말로 ‘편집증 로봇’이라는 뜻을 가진 특유의 실험적인 사운드와 전위적인 구성이 청자로 하여금 몰입감에 휘청거리도록 만들죠.


  먼저 편집증이란,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받을 것이라는 병리적인 의심 증세를 말합니다. 노래 속 화자 역시 노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봐도 편집증 환자인 것처럼 헛소리들을 하는데요.


  화자 자신이 왕이 된다면, 내게 적대적인 사람을 총살시키고, 사실 별로 귀담아듣지도 않았던 의견들도 함께 묵살해 버리겠다고요.


  곡이 진행되며 화자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울부짖고, 이내 ‘그놈은 기억하는 거 같던데 말이야’ 라며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밝히듯 바로 다음 가사에서 화자는 하늘을 보며 제발 비를 내려달라고 빌죠. 그러나 비를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신은 묵묵부답.


  앨범 내내 설명하듯 나를 둘러싼 것들에 치여 위태로운 개인 하나하나의 영혼은 안중에도 없는 세상입니다.


  여전히 돼지 껍질이 타는 소리가 들리고(희생되는 동물들), 공기 중에 먼지는 가득하며(대기오염) 절규 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셀 수 없는 공포와 구역질들.


  이내 마지막 가사에서 화자는 ‘신은 그의 어린양들을 사랑하시지.’라고 중얼거리다 마지막엔 ‘Yeah!’를 붙이며 ‘그래, 그러시겠지 뭐!’라고 비꼽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고 증오하는 편집증 환자가 세상의 혼란을 방관하는 신을 원망하며 울부짖는 내용 정도로 볼 수 있지만, 트랙 제목대로 우리는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더 집중적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Paranoid Android」마치 기계가 작동되듯 세 번의 기계음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러나 가사 속에서 화자는 ‘난 편집증 환자일지도 모르지만, 안드로이드는 아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내뱉죠.


  마치 절대 스스로가 기계임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말입니다. 화자가 구분하고자 하는, 안드로이드와 편집증 환자는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화자는 편집증 환자인가? 기계로봇인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냉소주의. 프로그래밍된 인물 외에는 모두 시야의 모자이크 덩어리일 뿐인.


  자신의 정체를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화자는 곧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곧 세상으로부터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리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을 만든 절대자를 떠올리죠.


  이내 비가 오길, 아주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진 비가 거세게 자신에게 부딪히며 깊은 곳까지 스며들길 기도합니다. 아마도 이 가사에서 화자가 기계인 자신의 죽음을 염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먼 옛날 40일간 비를 내려 대홍수를 일으켰다던 기독교의 창조주가 떠오르기도 했으니. 당신이 만든 혼돈이니 당신이 깡그리 정리하시길.


  현대인은 점점 편집증 환자처럼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나는 살아있나, 죽어있나. 나는 편집증 환자일 뿐인가, 혹은 기계일 뿐인가. 그 해답을 알고 있는 자는 오로지 내 주변의 것들을 일궈낸 ‘그놈’.


  그러나 하늘 아래 들끓는 수많은 편집증 환자들에게로 하여금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대자를 보며 화자는 끝끝내 자신을 창조한 이마저도 적대시하게 됩니다.


  창조자를 의심하고 원망하는 안드로이드. 제목대로 편집증 로봇인 셈이죠.





II

행복하고 건강하고 생산적이게

앨범 총평



  라디오헤드가 본 세상은 '불감증' 그 자체입니다. 직접 만들지도 않은 안전망에 삶을 맡기고 - Airbag -, 이기심으로 인해 인과응보를 간과- Karma Police - 하는 등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너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영향들은 정치인들의 확성기가 되며 - Electioneering - 세상을 바꿀 인터넷을 타고 더 빠르게 전파될 것이고 오늘날 시국을 본다면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은 듯싶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죽음 없이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우울을 전염시키고 있죠. 인공지능기술에 회의적이었던 만큼 '컴퓨터'의 목소리를 빌려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예방주사 같기도 합니다.


  해결책이 아니라 닥쳐올 공포를 심어주면서요. 딱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볼 정도로만.


음울시인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조용하게, 스스로 영원히 눈을 감기도 합니다. - No Surprises -


  조금 멀리서 봤을 때 개별적인 이야기 같은 노래들을 7번 트랙 - Fitter Happier - 와 마지막 트랙  - The Tourist - 가 각각 묶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반전, 후반전 같은 느낌이죠. 앞서 설명했다시피 7번 트랙 'Fitter Happier'은 보컬이나 멜로디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높낮이도 억양도 없는 기계가 문장들을 읊조릴 뿐이죠.


  고조되는 기계음과 차가우리만치 단조로운 가사들을 듣고 있자면, 정말 내면 깊은 곳에서 공포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4SzvsMFaek&pp=ygUOZml0dGVyIGhhcHBpZXI%3D

Fitter, happier, more productive
더 적합하게, 더 행복하게, 더 생산적이게
 
Comfortable (Not drinking too much)
편안히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않고)
 
Regular exercise at the gym (Three days a week)
체육관에서의 규칙적 운동 (일주일에 3일)
 
Getting on better with your associate employee contemporaries
동료 직원과 더 잘 지내기
 
At ease
편안히
.
.
(후략)


  컴퓨터가 인간에게 내리는 형식적이고 차가운 진단입니다. 기울어가는 경제와 빈부격차, 인간의 사익에 희생당하는 자연과 동물, 국민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들.


  그 사이에 던져진 사람들. 자신의 삶을 놓아버리지 않고 해야 할 간단한 과업에 대해 기계는 이야기하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고 생산적이게 살라고요.


  어딘가 아이러니합니다. 우리가 만든 기계로부터 듣는 조언이라니. 심지어 맞는 말임에도, 결국 인간이 집어넣은 정보의 파편을 조합해 내놓은 처방일 텐데도 정작 인간은 이를 실천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12번 트랙이자 마지막 트랙은 - The Tourist - '인간'이자 라디오헤드라는 아티스트가 건네는 무심한 조언처럼 들립니다.


https://youtu.be/HkgzObf8uVU

Hey man, slow down, slow down
이 사람아, 천천히 가, 천천히 가

Idiot, slow down, slow down
 멍청아, 천천히 가, 천천히 가라고

Sometimes I get overcharged
때로 난 과충전돼버려

That's when you see sparks
그때 불꽃을 보게 되는 거지

They ask me where the hell I'm going
그들은 내가 대체 어딜 가냐고 물어봐

At a thousand feet per second
초속 1000피트의 속도로


  전체적으로 휘몰아치는 우울감과 긴장감. 고립감은 이 트랙에서 해소됩니다. 세상을 향하던 손가락질은 이제 하늘을 향하며 "이제 이렇게 하면 될 겁니다."라고 말하는 듯하죠.


  라디오헤드는 천천히 가자고 말합니다.


타국에 간 여행객처럼,
쉴 틈 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을 헤집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아가며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살아가는 인간!
으로 살아가는 삶을 놓아줘야 한다


  본 작품은 우리가 불행한 이유를 고착화된 고속이라고 지적하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서로에게 우울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Fitter Happier'처럼 간단하고,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외면하던 해결책입니다. 다만 두 곡의 조언은 그 성격이 좀 상반되죠. 해야 할 것들을 산더미처럼 나열한 기계에 비해 여러 번 반복되는 후렴에서 같은 문장을 반복해 말합니다.


멍청아, 천천히 가.


  어느 쪽이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일지는, 듣는 사람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듣기에 더 현실적이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컴퓨터의 말들은 굉장히 딱딱하고 높낮이를 가지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할 필요도 없고, 카드 고지서를 보듯 머리에 입력되는 텍스트들. 반면에 담담하게 조언하는 톰 요크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우린 비로소 내려놓은 기분으로 앨범 감상을 끝마치게 됩니다.


  과제를 끝낸 듯한 기분이 아닌 친구에게 전화해 좋은 음악을 들었다고 말하면서요.




  「OK COMPUTER」는 전체적으로 보면 꽤 우울한 감성이 그득한 앨범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우울감에 빠져 우회로 없는 자기 연민만을 일삼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하고 사회와 개인에게 발생하는 어떤 문제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

  당시 받았던 평가대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죠. 특히나 오늘날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우울을 전염시키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과시, 비교라는 백신을 찾아 인터넷을 헤집고 매몰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예언 같은데요.


  뭐든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손에 넣겠지만, 과도한 속도를 선망한 나머지 나의 인생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위해 행복을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천천히 가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귀에 들리는 소리들은 녹슬어가고, 내가 만지는 것들은 점점 퀴퀴해지지만 모든 것을 천천히, 본질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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