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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Jan 22. 2024

염치없는 행복

「소공녀」, 2018

난 네가 염치가 없는 것 같아.

소공녀 포스터

「소공녀」, 2018

・ 전고운 감독 / 이솜, 안재홍 주연


  모든 게 비싸지지만 희소성은 떨어지는 요즘입니다. 오르는 담뱃값의 스트레스를 흡연으로 해소하고 막막해지는 삶을 달래려 비싼 술을 마십니다. 어릴 적 어른들이 "사는 게 뭔지, 산다는 게 참" 하고 내뱉던 작은 한숨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전고운 감독의 2018년작 장편 「소공녀는 극심한 생활고에 부딪힌 미소가 집을 떠나 청춘을 함께 했던 옛 지인들의 집에서 묵으며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그린 작품입니다. 절대빈곤이 해결된 현대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궁핍 재치 있게 표현해 낸 장면 연출.


  그리고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처럼 평범하게, 동시에 역설적으로 다양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군상을 보여주며 평론가와 대중들에게 고루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요.


미소의 모습

  돈이 없을 뿐이지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고, 비루한 삶에서 안식처가 되어주는 풋풋한 연애도 하고 있는 미소. 형편에 안 맞는 사치와 미련이라기보단, 그것뿐이라면 다 견딜 수 있다는 미소의 소박함은 자꾸만 오르는 술담배값과 도시의 무거운 공기에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데.





I

줄거리



  미소는 전업 가사도우미로 일합니다. 부모조차 없는 그녀는 살기 위해 타인의 집을 드나들며 집안일을 한 뒤 일당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데요.


  탁 트인 통유리를 닦고 발이 푹푹 빠지는 러그를 빨다 힘겹게 보금자리로 돌아오면 기다리는 것은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작은 원룸. 하물며 미소는 머리가 자연적으로 탈색되는 병을 앓아 약값까지 감당해야 하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미소

  개인적으로 잉꼬커플인 한솔과 미소가 관계를 하려던 장면을 되게 인상 깊게 보았는데요. 집인데도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있던 둘은 '한 지 너무 오래됐다'는 말과 함께 옷을 훌렁훌렁 벗습니다.


  그러나 옷이 한 겹, 한 겹 바닥에 떨어질수록 두 사람의 숨은 가빠지고 표정은 굳어가죠. 급기야 미소는 몸을 웅크리며 '너무 춥다'라고 말하고, 한솔은 그런 미소를 안아주며 달랩니다.


봄에 하자.


  작 중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순수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의 사랑조차 틈새 곳곳으로 들이치는 냉기를 덥히지는 못했습니다.


  후반부 한솔이 사우디 발령 소식을 미소에게 알리며 말하던 '나도 너랑 남들 다 하는 거 하고 싶다'는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사랑을 나눌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차가운 현실을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표현해 낸 재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추워서

  그러나 힘든 상황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타인에게 따뜻하며 연인인 한솔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미소. 틈틈이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개비의 여유도 즐기며 그녀는 나름의 행복을 느끼고 살고 있었습니다. 담뱃값과 월세가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 까지는.


  담배는 무려 2000원이 올라 4500원이 되었고, 집주인은 자신의 형편을 위해 방세를 5만 원 올립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군가 책임질 수도 없는 문제. 당장 하루 벌어 빠듯하게 먹고살던 미소는 순식간에 마이너스를 마주하는데요.


  자금 계산을 하던 그녀는 [집, 담배, 위스키]라는 항목에서 고민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겠지만 글쎄요.


  그것마저 없으면 평안한 곳은 없다는 듯 미소는 집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떠돌이 생활을 시작합니다. 옛날에 청춘을 함께 보냈던 밴드부 부원들을 찾아가 신세를 지면서요.





II

소공녀



  먼저 '소공녀'는 미국의 여성 작가 F.E. 버넷의 소설 속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소녀의 이상적인 모습 (부모님을 여읨, 어린 나이부터 성실히 살아가는)을 보여주는데요.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미소를 빗대어 말하는 뜻이기도 한 '소공녀'는 그녀가 다시 재회하는 밴드부 부원들과의 차이를 은유합니다.


누군가는 전원주택에서 뇌출혈이 왔음에도 건강을 되찾은 부모님과 살아가고,
누군가는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 적성에 맞지 않게 살아갑니다.

또 누군가는 가부장적인 남자에게 꼼짝없이 잡혀 살고,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대출금에 허덕여 술로 밤을 지새웁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현정 (키보드)

  미소가 신세 진 모든 '집' 속 저마다의 불행은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진 차이라면 현실에 순응했다는 것이겠죠.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더 살아야 할지,


  왜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에 끊임없이 집착하지만 어쩔 수 있겠냐는 듯 마음속에 눌러놓고 살아가는 사람들.


  여전히 소녀의 모습인 미소와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찾아가는 집마다 계란 한 판을 사가는 미소의 모습. 다른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껍질 속 연약한 알맹이를 담아두었다면, 미소는 이미 알을 깨고 나와 오믈렛이 되어버린 모습인 듯도 합니다.


  그렇게 미소는 부원들의 집을 떠돌며 살아가다 사라집니다. 생명 수당을 포함한 돈을 벌기 위해 한솔은 사우디로 떠나고, 혼자가 된 미소는 핸드폰 마저 끊겨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게 되는데요.


  약값조차 감당하지 못해 완전히 백발이 되어버린 미소의 모습이 등장하고,


마지막엔




III  

염치없는



  미소는 사람들을 찾아가며 항상 계란 한 판을 사들고 갑니다. 남의 집에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라던 어른들의 말씀. 나는 그 집에 잠시 있다 사라지더라도 남겨두고 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작품은 미소가 사들고 가는 것으로 계속 계란을 보여주며 값비싼 휴지를 사지 못하는 궁핍함, 그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는데요.


  마지막엔 두꺼운 벽도 천장도 없는 얇은 텐트를 보여주며 계란으로 이미지화된 미소의 삶을 다시 보여줍니다.


나 술담배 사랑하는 거 알잖아_미소
그 사랑 참, 염치없다_정미 선배



  작 중 미소는 신세를 지던 언니에게 '염치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집세도 못 낼 정도라면 술담배 따위는 독하게 끊는 게 맞지 않냐고요.


  남의 집에 얹혀살고 그렇게 미래 없이, 계획도 없이 살아가면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건 포기 못하냐고. 어떻게 보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에선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미소가 어떤 소녀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자신의 삶에 녹아들어 살아가며 우울에 사로잡히지 않은, 어떻게 보면 등장인물 중 가장 성숙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작품은 부원들의 눈으로, 한솔의 눈으로, 관객의 눈으로, 세상의 눈으로 미소를 바라보게 유도하며 이유 모를 씁쓸함을 남깁니다. 저마다 사는 이유가 다르니 사는 모습도, 각자의 기준도 다르니까요.  


여기도 값이 오르는구나

  「소공녀를 보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 염치라는 키워드였습니다. 미소는 염치없는 사치를 부리고 있는 걸까요? 다음날 숙취 깨면 그만, 숨 한번 들이쉬었다 내쉬고 양치하면 그만.


  어차피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행복도 타인의 납득이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나요. 단지 옆에 있어준다면 행복한 한솔과 미소의 사랑은 한순간의 무모한 스파크쯤으로 보이곤 합니다.


  꼭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행복과 사랑들은 그저 미성숙하고, 계획 없는 낭비처럼 취급되는 것 같아서요. 그게 어디까지나 개인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반대로 생각했을 때 미소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버티도록 도와주는 것이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개비는 아닌지요. 더 좋은 형편에서도 음지로 빠져드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그 정도로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이 대견하진 않으신가요.


나 어디 지원해서 뽑힌 게 처음이야. 그래서 너무 신나_사우디 발령에 자원했던 한솔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알아보는 집들. 하나같이 지독하게 현실적이어서 실소까지 자아냅니다.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한 정미의 일침들도, 정답이 없는 말이어서 반박하려다가도 마음에 아파오는 게 사실입니다.


  미소를 제외한 모두가 제 몸 뉘일 자리는 있지만, 미소보다 행복한가?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자신을 제외하면 무엇이 있을까요.


  「소공녀에는 피식 웃게 하는 장면과 현실을 콕콕 찌르는 대사들이 많습니다.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는 사람들. 비싸지는 세상 속 지레 싸구려가 되어가는.


누나, 여기 한 달 이자가 얼만지 알아?
원금 좀 포함해서 100만 원이다. 근데 월급이⋯, 190이거든. 근데 100만 원⋯.
그걸 얼마나 내야 하는 줄 알아? 20년, 20년.
매달 100만 원씩, 20년을 내면 이 집이 내 거가 된다?
그때 되면 집이 되게 낡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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